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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SundaySermon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1-4)

by 똑똑이채널 2021.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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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 옆 꽃밭의 '나비바늘꽃'

(설교열기)(발췌) 김광석 회장이 쓴 주가 쓰시겠다에는 그의 간증이 나와 있습니다.

본래 김광석은 약대를 졸업한 후에 서울 한복판에서 약국을 운영했습니다.

그러다가 피부병 약을 직접 개발해 팔았는데 입소문을 타고 전국적으로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그러니 약국은 날마다 번창했고, 당시에 하루 매출액이 서울 시내 아파트 한 채 값에 달할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독실한 불교 집안 사람으로, 그렇게 벌어들인 수입으로 절도 여러번 지어 바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기독교인들도 절로 인도해서 개종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그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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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야. 내 성공은 내가 절에 공덕을 쌓고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거야.”

“있지도 않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도대체 뭘 어떻게 도와줄 수 있단 말이야?”

“믿으려면 좀 상식적으로 믿어야지. 하여간 예수쟁이들은 말이 안 통해.”

 

그런데 그렇게 탄탄해 보이던 그의 인생을 뿌리채 뒤흔들어놓은 사건이 터졌습니다.

1979년 보건관리법 위반으로 검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당시에 약국에서 피부병 약을 파는 게 보건관리법 위반이었고, 벌금만 무려 8억 3천만원이나 된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100억원이 넘는 거금이었으니,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설교 동영상

하는 수 없이 친구 집에 몸을 피했다가, 경남 양산에 있는 절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안전할 것 같았지만, 절에 드나드는 신도들에게 들킬까봐 방구석에 몇 개월간 지낼 수밖에 없었죠.

그러다 어느날 골방 한 귀퉁이에 있는 누런 신문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신문의 헤드라인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무허가 약사 벌금 8억여 원 선고.”

그 제목을 보다가 피식 웃었습니다.

“엉, 나 같은 약사가 또 있나 보네.”

 

그러다가 그 신문을 읽어나가는데, 그 약사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얼굴이 화끈거리고, 창백해졌습니다.

“도대체 누가, 내가 들어오기도 전에, 이곳에 이 누런 신문지를 갖다 놓은 걸까?”

“대체 누구야? 내 인생을 이렇게 송두리째 주무르고 있는 것이?”

“누가 나를 이곳으로 끌고 왔냐고?”

 

그렇게 악몽같은 현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현실 앞에 울부짖다가, 그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온 몸에 전율이 흘렀고, 그가 믿지도 않던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

 

여태껏 기독교인들을 무시하고, 그들이 믿는다는 하나님을 철저하게 부정한 그였는데.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소리내서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이신가요?”

“내 인생을 움직이고 있는 게 하나님이신가요?”

“그렇다면 내게 왜 이런 혼란을 주시고 시험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다면 나를 여기서 좀 꺼내주세요. 그러면 당신을 믿겠습니다. 제발 나를 살려주세요.”

 

그렇게 울부짖는데,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영혼을 뒤흔들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방바닥에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고, 새벽 여명을 지나 아침 햇살 줄기가 환하게 비췄습니다.

그 순간 여태 느꼈던 분노, 원망, 좌절, 서러움, 두려움, 그 모든 것들이 바람과 함께 가슴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아, 하나님. 정마롤 당신은 살아계시는 군요.”

그러면서 그의 심령에 평안이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지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 바로 경찰서로 가서 자수를 했습니다.

 

다행이 영등포교도소에서 56일을 살고 풀려났습니다.

하지만 벌금 8억여원은 아직도 그에게 남아 있었습니다.

만약 벌금을 빨리 갚지 못한다면 다시 3년 가까운 감옥살이를 더 해야 했습니다.

바로 그 빚을 갚기 위해 1984년 빚더미 위에서 화장품 회사를 차리고 새출발을 했습니다.

더욱이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는데, 하나님께서 묻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김광석이 누구냐?”

 

그는 깜짝 놀라 두 손을 번쩍 들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시련은 사랑의 매였단다.”

“얼마나 힘들었느냐? 얼마나 아팠느냐?”

“수고했다. 너의 양식을 내가 재리라.”

 

눈을 떠봤더니 그 시각이 새벽 3시였습니다.

생생한 목소리가 아직도 그의 귓가에 맴돌았고, 그 즉시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이게 정말 고난의 끝인가요?”

“제가 모든 역경을 이겨낸 겁니까?”

“이제 완전히 백기를 들고 당신 앞에 나아갑니다. 저를 받아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면서 화장품회사를 세웠는데, 여전히 부채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적자투성이 회사를 경영하면서도 십일조 헌금을 철저하게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개발한 신상품 하나가 대박을 터뜨렸고, 주문이 쇄도하기 시작했고, 창업한지 1년 만에 그 부채를 모두 청산할 수 있었습니다.

 

1996년 그가 몸담고 있는 교회목사님으로부터 미국신학교의 한국유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때도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났습니다.

그 날 읽던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자신의 헌신을 원한다는 음성으로 들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풀어서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따고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21:2-3)

 

(깨달음) 어떻습니까?

집안 대대로 불교 골수 분자인 김광석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까?

그는 기독교인들을 혐오하고 있었고,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철저히 부정하며 살았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불가항력적인 부르심의 은혜를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적용) 우리가 어떤 모양으로 예배당의 문턱을 넘었든지, 그 일들 속에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부르심의 은혜가 임한 줄 믿습니다.

 

어릴적 부모님 손이나 친구의 권유를 받아 교회 예배당에 나왔어도,

장년이 되어 아는 사람의 권면으로 예배당에 나왔을지라도,

결혼해서 아내나 남편의 권유로 신앙생활을 하게 됐어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부르심의 은혜 속에서 주님을 믿게 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주님의 기이한 역사로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고 계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시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시편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시편은 히브리어로 ‘테힐림’(Tehillim)이라고 부릅니다. 그 뜻은 ‘찬양의 노래들’입니다.

 

시편 1편에서 150편까지 기록돼 있는 이 시편의 시들은 누가 썼을까요?

시편 90편 같은 경우에는 모세가 썼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 73개의 시편은 다윗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더욱이 시편 50편과 시편 73-83편은 아삽이 쓴 것으로 기록돼 있죠.

그런가 하면 시편 42편, 시편44—49편, 시편84, 시편 87—88편은 고라 자손이 썼습니다.

그리고 시편 127편은 솔로몬이, 시편 89편은 에즈라 족의 에단이 쓴 시편으로 알려져 있죠.

 

이 시편 중에 모세가 썼다면 적어도 B.C.1400년 경에 쓴 시편도 있고,

다윗이 썼다면 B.C.1000년 경에 쓴 시편도 있습니다.

솔로몬이 썼다면 B.C. 950년 경에 쓴 시편일 것이고, 아삽과 에단이 쓴 시들도 그 무렵일 수 있겠죠.

그런 점을 볼 때 시편 150편의 시들은 B.C.1000년-B.C.450년 경까지 기록된 시들을 한 데 모아서 엮었던 것이죠.

 

시편 1-150편은 보통 다섯 권의 시편으로 분류됩니다.

제1권인 1편—41편으로 개인적인 야훼 하나님의 경험담을 기록한 책입니다.

제2권인 시편42편—72편까지는 엘로힘 하나님에 관한 내용입니다.

제3권인 시편73편—89편까지는 어두움과 인내와 고난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제4편인 시편90편—106편까지는 왕에 관한 책으로 주로 다윗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마지막 제5권인 시편107편—150편까지는 찬양에 관한 책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오늘 읽은 시편 136편은 감사의 찬양시입니다.

누가 과연 감사의 찬양을 올려드리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죠.

 

왜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베푸신 하나님의 인자하심, 긍휼하심 때문이죠.

그 까닭에 26절로 구성된 시편 136편에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는 구절이 26개나 등장하고 있죠.

각 구절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해)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말 ‘인자하심’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헤쎄드’(חֶסֶד)입니다.

우리말로는 ‘친절’, ‘자비’, ‘긍휼’, ‘인애’로 번역되는 단어죠.

 

이 헤쎄드가 어디에 사용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소돔을 불로 심판할 때, 천사 둘을 보내 롯을 건져내지 않습니까?

그때 천사 둘은 롯과 그의 아내 그리고 두 딸에게, 뒤도 돌아보지 말고 이 성읍을 피해 멀리 달아나라고 하죠.

그런데 그 심판의 불이 너무 강력하고 멀리 피할 수 없어서 롯이 두 천사에게 곧 하나님께 간구하죠.

제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고,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생명을 건질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나 저 먼 곳까지는 너무 힘드니, 가까운 소알 성읍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도록 긍휼을 베푸소서.”(19:19)

바로 그때 헤쎄드, 인자 곧 긍휼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리고 이 ‘헤쎄드’는 아브라함이 자기 목숨을 보존코자 사라를 여동생이라고 아비멜렉 왕에게 말한 적이 있죠.

바로 그 땅에 들어가기 전에 그의 아내에게 당부한 내용이 있습니다.

여보, 내가 저 성읍에 들어가면 내 목숨이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오.”

그러니, 당신이 내게 자비를 베풀어, 내가 당신을 여동생이라고 말하는 것을 허락해주면 좋겠소.”(20:13)

바로 그때 헤쎄드라는 단어, 곧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달라는 그 단어가 쓰여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브라함의 늙은 종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배필로 리브가를 만나러 갈 때였죠.

밧단 아람의 우물터에서 엘리에셀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 단어 곧 헤쎄드가 나옵니다.

하나님 여호와여, 제가 순조롭게 만날 수 있도록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소서.”(24:12)

 

(깨달음)어떻습니까?

이 ‘헤쎄드’라는 단어는 한 개인이 관계 맺고 사는 사람에게, 또 천사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단어입니다.

소돔 성읍을 빠져나가는 롯이 천사에게, 아브라함이 아내에게, 그리고 엘리에셀이 하나님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것이죠.

 

(전개) 그렇다면 이 헤쎄드가 이스라엘 민족과 관련해서는 어떤 의미로 쓰였을까요?

이 단어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사용된 예는 출애굽기에 최초 나옵니다.

이른바 홍해에서 그 민족은 구원받고, 그 홍해 속에 애굽 군대가 수장됐을 때 찬양하는 노래에 헤쎄드가 나오죠.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15:1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베푸신 헤쎄드란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주신 것이 하나님의 헤쎄드라는 사실이죠.

뿐만 아니라 그들을 홍해에서 건져내주시고, 그 백성을 거룩한 처소, 곧 성막에 들어가 하나님께 제사드릴 수 있도록 해 주신 게 하나님의 헤쎄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녀로 삼아주신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헤쎄드라는 사실이죠.

이것을 김광석 회장에게 빚대어본다면, 불교 골수분자인 그 분에게 찾아와 그의 심령을 만져주시고 구원해내신 것,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베푸신 하나님의 헤쎄드입니다.

 

그런가 하면 출애굽기 20장 6절에는 이렇게 헤쎄드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었는데, 그때 하나님의 율법 곧 말씀을 주셨죠.

그러면서 하나님의 언약백성답게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좇아 순종하여 살면 당신의 은혜 곧 헤쎄드를 천대까지 베풀어주겠다고 친히 약속하신 것입니다.

 

(깨달음)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시를 올려드리는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과거 자신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주신 그 인자하심 곧 하나님의 헤쎄드를 찬양하고 있는 것이죠.

과거 홍해에서 몰살당할 뻔한 그들을 하나님께서 자비 곧 헤쎄드를 베풀어서 그들을 건져내주신 걸 찬양하는 거죠.

 

그리고 광야 40년간 그들의 불평과 원망 속에서 하나님 앞에 몰살당할 그들이 다시금 살아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헤쎄드였다는 사실입니다.

김광석 회장이 8억여 원의 빚을 지고 옥살이 한 후 다시금 일어선 것도 하나님의 헤쎄드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적용)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담의 원죄를 안고 태어난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의롭게 될 수 없는 죄인 아니었습니까?

마치 술 공장에서 찍어내는 도수 다른 술 제품이듯이 말입니다.

 

그런 우리는 하나님처럼 다른 사람에게 진정한 헤쎄드, 진정한 자비와 긍휼을 베풀 수 없는 존재죠.

아브라함처럼 너무나도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헤쎄드를 통해 구원받았어도 광야 40년간 끊임없는 변덕을 보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죠.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헤쎄드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코자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제물 삼아주신 그 헤쎄드의 긍휼 말이죠.

 

더욱이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그 문제의 수렁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신묘막측한 길을 통해 인생에 수렁에서 나를 건져내주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긍휼하심, 하나님의 헤쎄드입니다.

 

(주문)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 주님은 죄인이자 연약한 우리를 한없는 하나님의 헤쎄드로 품어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길 원하신다는 사실이죠.

 

(주음성) 그래서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에게 친히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내가 아브라함에게 베푼 그 헤쎄드의 은혜를 너에게도 베풀어주길 원하지 않겠느냐?”

내가 김광석 회장에게 베푼 그 헤쎄드의 은혜를 너에게도 베풀길 원하지 않겠느냐?”

갈대아 우르의 우상장수였던 아브라함을 건져냈듯이, 불교 골수분자인 김광석 회장을 불러내 자녀 삼았듯이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주시고, 홍해에서 건져내주시고, 40년간 광야 불평과 원망속에서도 그들에게 끊임없는 헤쎄드의 은혜를 베푼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하나님의 헤쎄드 사랑을 받은 언약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좇아 살지 않겠느냐?”

너의 모든 인생의 주권을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께 내어 맡기며 살지 않겠느냐?”

죄와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천대까지 자비를 베푼다고 약속치 않았더냐?”

그러니 죄의 수렁에서, 인생의 수렁에서, 온갖 풀 수 없는 문제까지도 헤쎄드의 하나님께 내어 맡기지 않겠느냐?”

어찌 암자에 숨어 있던 김광석 회장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의 헤쎄드를 베풀어주실지 누가 감히 생각이나 했겠느냐?”

하나님의 그 헤쎄드는 지금도 너를 향해 베풀고 계시고, 그분의 성실한 헤쎄드는 날마다 새롭게 역사하지 않겠느냐?”

 

 

(찬양)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많이 알고 계시며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깊이 이해하신단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쉬지 않고 지켜보신단다

그의 생각 셀 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그의 성실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 없단다

 

(발췌2) 박은몽의 〈나타내심〉이란 책에는 박성수 회장이 주님의 헤쎄드를 덧입은 삶이 나옵니다.

이랜드 그룹의 박성수 회장에 대해 아실 것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부유한 집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가정 속에서 자랐고, 어머니 손에 이끌려 예배당에 나갔습니다.

 

1971년 연세대학교 식품공학과에 입학했는데, 그때도 교회생활에 익숙했지만 거듭남의 체험은 없었습니다.

교회에 나가 예배는 드렸지만, 자기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것이었죠.

그러다 서울 회현동에 있는 교회에 나가 당시 대학부를 지도하던 옥한흠 전도사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 무렵 대학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아, 6개월간 재수를 했습니다.

그 속에서 CCC 활동을 하는 사촌 누나로부터 성령충만에 관한 전도지를 건네받았죠.

중생치 못한 성도, 주님을 섬기지만 죄로부터 자유치 못한 성도, 곧 그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이자 다가오심이었죠.

 

놀랍게도 그와 같은 성령충만한 전도지를 받았을 때 그는 처음 죄인임을 인정했고, 주님을 마음속에 영접했습니다.

그러자 여태껏 느끼지 못한 평안과 승리와 기쁨과 감사에 봇물처럼 그 심령에 밀려들어왔습니다.

이듬해 서울대 건축공학과에 입학했고, 1973년 여의도광장에 열린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에서 헌신을 다짐했죠.

 

대학 4학년 때인 1975년, 그에게 생각지도 못한 무서운 병마가 찾아왔습니다.

근육무력증이라는 휘귀질병이었습니다.

갑자기 손에 힘이 풀리면서 글씨를 쓸 수 없었고, 이불이 무거웠고, 점퍼를 입는 것도 벅찼습니다.

가장 무서웠던 것은 근육이 점점 악화돼 힘을 못 쓰다가, 심해질 경우 전신마비가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2년간 지내면서 그는 병중에 책 3천을 읽었고, 사람을 키우는 방법과 생소한 분야까지 읽어나갔습니다.

대신에 근육무기력증을 나을 생각에 금식기도와 여러 기도원도 찾았고, 주위에 중보기도해 주는 이들도 많았죠.

그러다 어머니의 소개로 어떤 한의사를 만나 한약을 먹었는데, 조금씩 힘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치료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진 그 증세가 3개월쯤 지나자 행동에 큰 불편함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혹시 재발할지 몰라 그 한의사를 찾아가 약을 더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그 한의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이상하네요. 제가 어떤 처방전을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거기다 처방전까지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버렸어요”

그때 박성수 청년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한의사를 바라봤습니다.

그러다 문뜩 깨닫게 되는 게 있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내 불치병을 고쳐주신 것이었구나.”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몸은 낫게 되었는데, 1980년 학원과외 금지조차로 학원 강사 일도 못하게 됐습니다.

그러자 그는 병상에 있으면서 읽은 책을 토대로 사업구상을 했고, 하나님께 이렇게 매달리며 기도했죠.

“하나님, 사업의 길이 열리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제 삶은 이미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하지 않았습니까?”

“사업이 성공하더라도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데 사용하겠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두 사람을 통해 5백만원의 사업자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5백만원으로 그는 이화여대 앞에 2평짜리 옷가게를 열었는데, 그것이 잉글랜드요, 오늘날 이랜드 출발이었습니다.

그때 남대문시장과 평화시장을 누비며 시장성이 있는 옷만 골라 팔았는데, 의류 체인점을 둘 정도로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그렇게 사업이 잘 되는데, 1985년까지 양심에 걸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물건을 받아 넘겨주는 위탁업을 하다 보니 세금계산서를 발행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금계산서를 떳떳하게 낼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사업이 되길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게 1986년 주식회사 이랜드, 곧 법인 이랜드가 탄생한 계기였습니다.

 

그해 매출액이 66억원, 1987년엔 1백45억원, 1988년엔 4백65억원, 1989년에는 1천1백억원이 됐습니다.

모든 업무는 컴퓨터화했고, 건설 분야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바쁘면 바쁠수록, 일이 잘 풀리면 풀릴수록, 언제나 최우선 순위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더욱이 이랜드 의류업이 성장하기까지 대리점 경영방식이 있었기에 회사 이익보다 대리점 이익에 더 신경을 썼죠.

하지만 모든 대리점에게 절대 양보하지 않은 게 하나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십계명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리점 계약시 주일은 영업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명시하고 다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몇몇 대리점에서 주일에 장사가 잘 된다며 문을 열곤 했는데, 그때 그런 프로세스를 세웠죠.

한 번 발각되면 1주일간 물건 납품을 중지토록 하고, 3번 이상 발각되면 대리점계약취소라는 조항을 두는 것이었죠

 

사실 그 당시 다른 의류 업체들은 일 년 가운데 총 매출의 30%는 주일 판매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주일을 쉰다는 것은 매출이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의류업체의 구조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을 높일 때, 자신의 인생 수렁에서 건져주신 하나님께서는 다른 의류업체들보다 훨씬 더 성장하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깨달음) 그러니 그도 전능하신 하나님께 온 힘을 다해 감사의 찬송을 올려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근육무기력증으로 2년간 고통에 처할 때도, 사업자금이 없어 해맬 때도, 주님은 당신의 신묘막측한 방법으로 새 길을 열어주셨으니 말입니다.

심지어 이랜드 의류 제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가도 주일은 쉰다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일때도 하나님께서는 평일에 더 많은 제품이 팔려나가도록 역사해주셨으니 말입니다.

 

그런 일들을 떠올릴때마다 어찌 그가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올려드리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마치 400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케 해주시고 홍해에서 몰사할 그들을 건져내주신 헤쎄드를 떠올리게 하듯이 말입니다.

마치 절간에 도피중에 있던 김광석 회장을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내주시고, 옥살이 후에 새로운 인생길을 열어주신 그 하나님의 헤쎄드를 떠올리게 하듯이 말입니다.

박성수 회장이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무리 잘 나갈지라도 하나님 앞에 늘 바로 설 수 있도록 끊임없는 헤쎄드의 사랑으로 감싸주신 것이었습니다.

 

(내음성) 그러니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실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자예요.”

저에게 질병이 찾아오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불평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자에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주시고 끊임없이 불평과 원망하는 그들을 40년간 인도해주셨어요.”

주님, 제가 주님 뜻을 잘 몰라 내 앞에 일어난 일만 보고 원망하거나 불평할때도 긍휼의 헤쎄드를 베풀어주세요.”

박성수 회장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업하고 싶어도 500만원이 없어 해매이지 않았습니까?”

그때 주님께서 예비하신 사람들을 보내주신 것처럼, 제 인생에 어려움에 해맬때도 주님께서 보내신 천사와 같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헤쎄드의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언약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주일성수하며 온전한 십일조의 삶을 드릴 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천대까까지의 헤쎄드를 저와 가정 위에 베풀어주실 줄 믿어요.”

 

(찬양) 은혜아니면 살아갈수가 없네 호흡마져도 다 주의것이니

세상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크신 계획 다 볼 수도 없고 작은 고난에 지쳐도

주께 묶인 나의 모든 삶 버티고 견디게 하시네

은혜아니면 실아갈 수가 없네 나의 모든것 다 주께 맡기니

참된평안과 위로 내게 주신 주 오직 예수 뿐이네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1-150편 중에 시편107편부터 150편까지가 찬양에 관한 시편입니다.

그러나 다른 시편들 중에도 어찌 감사의 찬양시가 묻어나 있지 않겠습니까?

모세가 썼다는 그 시편에도, 다윗과 솔로몬이 쓴 시편에도, 그리고 아삽과 뮤지션들이 쓴 시편에도 말입니다.

 

왜요?

아무리 모세나 다윗이나 솔로몬이나 아삽과 뮤지션들이 위대한 일을 했어도, 그들 홀로 인생을 헤쳐나올 수 있었습니까?

그들 너머에 하나님의 긍휼하신 헤쎄드가 없었던들 그들은 각자 인생의 수렁에 빠져들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로 살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어찌 내 인생의 풀 수 없는 난관들 앞에 내 힘으로 지금껏 헤쳐올 수 있었습니까?

 

오직 하나님께서 베푸신 인자하심, 그 긍휼과 자비하심 때문에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에 하나님께 베푸신 그 헤쎄드의 긍휼하심을 좇아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주님께서 언약하신 그대로 주님의 헤쎄드를 바라보며 주님의 계명을 좇아 사는 우리에게 자손 천대까지 복을 베풀어주시는 그 헤쎄드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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