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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SundaySermon

하나씩 임하여,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행2:1-4)

by 똑똑이채널 2021.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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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날에 애굽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때 어린 양의 피를 잡아 좌우 인방과 설주에 발랐고, 그 피를 보신 하나님께서 죽음의 심판을 넘어가주셨죠.

 

그것이 바로 세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1:29)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예표한 사건이죠.

예수님은 신약의 유월절 날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씩 임하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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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의 그 은혜를 통해 애굽에서 해방되어 그 땅을 나왔죠.

이제 홍해를 건너고, 수르 협곡을 지나, 마라, 엘림, 신광야, 르비딤에서 전투를 벌이고, 그리고 시내광야에 당도하죠.

 

그때가 바로 3개월에 접어든 시점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때가 바로 출애굽한지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하나씩 임하여,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행2:1-4)

 

그때가 바로 유월절로부터 50일이 지난 오순절날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유월절에 밀을 처음 수확한 이래 7주가 지났다고 해서 칠칠절이라고 부르고 또한 맥추절로 부릅니다.

 

그런데 그 50일째 되는 날 곧 오순절날에 시내광야 곧 시내산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언약을 맺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수여해주셨죠.

 

그것이 구약시대의 오순절날에 있었던 가장 큰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답게 살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율례를 받은 날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때 하나님과 언약식을 맺고, 하나님의 언약백성답게 살 수 있는 지침서와 같은 율례의 말씀을 받으면 끝입니까?

저절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죠.

하나님과 언약식을 맺었다면 그만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지침대로 그 삶을 맞추어 나가야만 하는 것이죠.

 

바로 그것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40년간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신명기 8장 2절에 나온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곧바로 들이지 않고 광야 40년을 이끄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식을 맺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지 그렇지 않는지 지켜보고 컨트롤하고자 하심 말이죠.

 

그 삶을 통과한 이후에 비로소 그들이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입성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깨달음) 이 사실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실은 우리의 결혼생활과 똑같다는 점입니다.

 

서로 남남이던 두 사람이 중매든, 사귐의 과정이든, 둘이 좋아 혼인식을 갖게 되죠.

그때 비로소 두 사람이 합법적으로 부부가 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합법적인 부부가 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결혼생활이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결혼식을 올린 이후에는 예전의 사고방식은 내려놓고 상대방의 뜻에 맞춰야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결코 행복한 부부생활,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끌어갈 수가 없는 것이죠.

 

결혼 전에는 야근도 하고, 친구 집에 놀러가서 자기도 하고, 친구들과 여행도 떠났다면, 결혼 후에는 어떻겠습니까?

결혼 후에는 야근도 줄이고, 친구 집에 놀러가 잠을 자거나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는 것은 완전히 금해야 할 일이죠.

 

오직 배우자만을 위해 서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성실을 다하며 살아야, 결혼생활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이죠.

 

(적용) 바로 그것이 신앙생활과 똑같은 이치이고, 실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도 동일하다는 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이 하나님의 품 안에 들어와 사는 것을 말합니다.

 

전에는 자기 심령 속에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든, 다른 신을 모시고 살든, 상관이 없었죠.

하지만 부모님 손이나 친구의 손이나 배우자의 손에 이끌려 주님 앞에 나와 주님을 모시고 살때는 다르죠.

그때부터는 오직 주님과 언약식을 맺듯이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죠.

 

물론 우리 주님은 일방적으로 너는 내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3개월에 걸쳐 여러 기적들을 체험케 하신 것처럼, 동일한 은혜를 베풀어주신 후에 ‘너는 내 것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처음 주님을 믿고 기도를 했는데, 그것이 응답이 되게 해 주시는 역사를 베풀어주기도 하시죠.

어디가 아픈데 기도를 했는데 놀랍게 회복되는 은혜를 베풀어주기도 하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전혀 믿기지 않을 것 같은데 마음 속에 ‘동의’가 일어나기도 하고 또 마음이 뜨거워지기도 하죠.

잠을 자는데 꿈 속에서 희안한 꿈을 꾸기도 하고, 희안한 환상을 보면서, 주님이 점점 믿어지게 되는 경우도 있죠.

 

바로 이런 일들이 주님을 믿기 시작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기 입으로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하고 고백하게 되죠.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하나님과 언약식을 맺듯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 배우자와 결혼식을 하듯이 하나님 안에서 예수님을 영적인 신랑으로 우리는 영적 신부로 혼인식을 치르는 거죠.

 

그런데 그것으로 신앙생활이 끝입니까?

그렇게 영적인 언약식을 거행하는 것으로만 하면 완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죠. 바로 그때부터가 중요한 것이죠.

내 마음과 내 입술로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하고 고백하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죠.

 

오직 내 속에 성령님이 임해야만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이죠.

고린도전서 12장 3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예수님과 영적인 언약식, 영적인 혼인식을 거행할 때,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고백하는 그때도 성령님께서 고백할 수 있도록 역사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그 이후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으로 내 인생의 방향이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 결혼예식 이후의 행복한 부부의 삶을 위한 길이듯, 행복한 신앙생활을 위한 성령충만한 삶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삶이 아니라, 더욱더 주님의 기쁨을 위해 사는 삶 말입니다.

 

그것이 성령세례와 성령충만한 삶이요,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날이 유월절이요, 그로부터 안식 후 첫날 새벽미명 곧 주일날 부활하셨습니다.

시체가운데 다시 살아나신 주님, 부활하신 그 주님은, 그때부터 40일째 되는 날까지, 이 땅에 머무셨죠.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 방문을 꽁꽁 걸어잠그고 있던 10명의 제자들에게 차례로 나타나셨죠.

1주일 뒤 다시금 그 방에 모여있던 제자들, 그때는 도마도 있었으니, 당신의 손과 옆구리 창자국을 보라면서 나타나주셨쬬.

그때 그들이 갈릴리로 가서 주님을 기다렸는데, 한 참을 지나도 오지 않자 어부의 삶으로 회귀해버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아침에 주님께서 그들을 찾아와 손수 밥상을 차려주시고, 다시금 제자다운 제자의 삶을 살도록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께서 하늘로 승천해 가실 날이 가까워지는 그때 그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1: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강화의 시간을 가지면서 하신 말씀을 다시금 언급하신 거죠.

내가 너희들에게 떠나가는 것이 너희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주도록 아버지께 부탁하겠다는 그 말씀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부활하신 주일로부터 37일째 되는 날,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날로부터 40일째 되는 날이었죠.

그때 주님은 감람산에서 500여명의 형제들 앞에서, 여자와 아이들까지 1천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하늘로 승천해가셨죠.

 

그때 천사들은 “갈릴리 사람들아 왜 서서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느냐?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하고 말했죠.

그러자 그 제자들, 그 무리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보혜사 성령님의 강림을 위해 기도에 힘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로부터 10일째 되는 날, 곧 우월절 어린양되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었죠.

그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120명의 무리들에게, 하늘로부터 성령님이 강림하셨습니다.

 

(본문)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날에 있었던 일을 보여주고 있는 사건입니다.

본문 2-3절은 그날 그 현장에 강림하셨던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각 개인의 주관적인 관점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같이 읽어보실까요?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원해) 여기에서 ‘홀연히’라는 헬라어 ‘아포노’(ἄφνω)말은 ‘갑자기’(suddenly)라는 뜻입니다.

갑자기 급하고 강한 바람이 임한 게 아니라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임했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 각 사람 위에 하났기 임하여 있더라, 하고 기록해주고 있죠.

 

이것은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각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을 증언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늘로부터 그날 임한 성령세례의 특징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깨달음) 구약의 오순절 날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식을 맺고 율법을 수여해주셨는데, 모두에게 객관적인 증거였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의 오순절 날에 임한 성령세례의 특징은 객관적인 증거가 아니라 각 개인에게 임한 주관적인 체험이었다는 점입니다.

 

(적용)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날 임한 성령세례입니다.

성령세례는 일생 일대에 한 번 받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는 바람처럼 불처럼 강력한 체험을 동반하여 임하기도 합니다.

성령세례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눈물과 함께 고백하는 모습으로도 나타나기도 합니다.

성령세례는 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런 나를 구원해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확증하는 유일회적인 사건입니다.

 

마치 남남이던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리는 일생일대의 유일회적인 사건처럼 말입니다.

그와 같은 성령세례를 통해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위로를 주시고, 사랑과 소망을 주시고, 치유와 능력과,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와 같은 성령세례를 어떻게 증언하고 있습니까?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했다”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예화) 성령세례는 그만큼 각 개개인이 성령님의 임재를 느끼고, 깨닫게 된다는 점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손수호 대위에게 임했던 성령세례의 임재와 동일한 것입니다.

 

발목이 뭔가 한 대 맞은 것처럼 후끈후끈하더니만, 기도할 때 온몸에 불덩이가 임한 것처럼 뜨거워지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15일간 휴가를 내고 전심으로 기도했을 때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은혜) 우리 주님은 주님과 영적인 혼인식을 올린 우리에게도 일생일대의 유일회적인 성령세례의 은혜를 부어주시길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지금 성령으로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나는 너의 일생 가운데에도 유일회적인 성령세례를 베풀기를 원한다.”

남남이던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리듯, 너도 주님의 영적인 신부로 주님과 한 몸이 되길 원한다.”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 성령세례를 부어주기도 하지만,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 후에 성령세례를 부어주기도 한단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도 없으니, 그 또한 성령세례의 증거일 수 있다.”

손수호 대위의 발목에 임한 성령세례의 증거가 온 몸에 확대된 것처럼, 너에게도 그런 증거를 부어주길 원한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일생일대에 부어주시는 성령세례를 위해 간절히 사모하고 기대했으면 좋겠구나.”

결혼식 이후에 부부가 서로에게 뜻을 맞추듯이, 너도 성령세례를 통해 주님의 뜻에 네 인생을 맡겨나갔으면 좋겠구나.”

부모의 손이든, 친구의 손이든,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주님께 나왔어도, 주님은 차츰차츰 너의 심령속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맛보아 알게 하지 않더냐?”

그때 주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주님의 죽으심과 죽고 주님의 부활하심과 더불어 살겠다는 물세례 예식을 받지 않더냐?”

그런 것처럼 성령세례를 통해 주님의 죽으심과 죽고 주님의 부활하심과 더불어 네 인생을 맡기겠다는 확증 속에 네가 살면 좋겠구나.”

바람처럼 불처럼, 폭포수처럼, 성령세례를 통해 눈물과 감동과 위로와 소망을 너에게 부어주실 것이다.”

 

(찬양) 성령하나님 나를 만지소서 상하고 깨어져 지친 나를

새롭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시들은 내 영혼 살리소서.

성령하나님 이 땅 고치소서 죄악의 어둠 속 헤매는 우리

태워 주소서 성령의 불로 세상 헛된 맘 태우소서.

임하소서 성령 하나님이시여 지금 이 곳에 임하소서.

바람처럼 불처럼 성령이여 임하소서.

 

(본문) 성령세례는 그렇게 각 사람에게 하나씩 하나씩 주관적인 체험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세례로 끝나버려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과 언약식을 맺고 곧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는 것과 같은 격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혼식을 치르는 것으로 행복한 결혼생활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격이죠.

 

하지만 성령님은 성령세례와 함께 성령충만을 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좇아 살도록 광야 40년의 훈련을 맞이한 것처럼 말이죠.

결혼식을 올린 부부가 행복한 부부생활,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 서로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하며 살 듯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 4절 말씀이 바로 그것을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원해) 120명의 성도들이 기도할 때 각 사람이 체험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각각 임재하셨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성령세례였죠.

 

그러나 성령세례와 더불어 더욱 중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 곧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의 충만함 속에 거하지 않으면, 그 은혜가 식어지고 냉냉해지고, 또 사단의 유혹에 쉽게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성령의 ‘충만’이라는 헬라어 단어 ‘플레쏘’(πλήθω)는 ‘채우다’(to fill), ‘가득하다’, ‘차다’는 뜻입니다.

이 ‘플레쏘’라는 단어가 성령과 관련하여 15회 사용되었는데, 인격적인 성령을 이해하기 쉽게 물질로 묘사한 것입니다.

 

(원성)성령충만은 오순절 이전 브사렐(출35:31)과 오홀리압(출35:34,35)에게 부어주셔서 성막을 완성케 했습니다.

성령충만은 세례 요한(눅1:15)에게 임하여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데 성실하게 감당케 했습니다.

성령충만은 예수님에게도(눅4:1) 임하여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는데 온전히 승리할 수 있었죠.

 

이와 같은 성령충만은 오늘 우리에게도 임재하시길 원하시고 또 부어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까닭에 에베소서 5장 18절에 이런 말씀으로 우리에게 격려하고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깨달음)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술에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왜요?

성령의 충만도 실은 술에 취한 것, 곧 술 충만과 비슷한데, 그 성격 자체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죠.

그래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과 존 스토트 목사님도 성령충만을 술취한 것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술이 술을 마시게 해서 술이 이끄는 대로 끌려간다는 것입니다.

성령에 취한 사람도 얼굴이 곱게 달아오르고, 성령이 성령을 마시도록 더욱 충만케 하고, 성령이 이끄시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에 취한 사람과 술에 취한 사람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둘의 다른 점도 있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몽롱해서 자기 통제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성과 감정과 의지가 통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해력, 자제력, 판단력, 균형감각, 조절능력, 그 모든 기능이 마비돼 운전도 할 수가 없죠.

 

하지만 성령에 취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령은 인격의 영이기 때문에, 우리의 감각이 마비되는 게 아니고 절제력이 강화됩니다.

우리의 감정과 지성과 생각을 각성시키고 내외적인 모든 영역들이 활성화되어 우리 삶에 집중력이 생기는 것이죠.

 

그래서 술에 취하면 술에 점점 빠져들지만, 성령에 취하면 취할수록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죠.

 

(원성) 그렇다면 저 사람이 성령에 취했는지, 악령에 취했는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악령은 그 본성상 성령의 열매를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깨달음)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성령에 충만한 사람인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악한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거죠.

방언을 하지만 분노에 가득찬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령충만한 사람이 아니라 악령에 충만한 사람이겠죠.

병을 고치지만 이기적이고 교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령충만한 사람이 아니라 악한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겠죠.

예언을 하지만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 영에 사로잡힌 사람임에 틀림 없겠죠.

괴력을 발휘하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할지라도, 형제를 미워하고 부모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도 거짓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겠죠.

성령에 속한 사람이 교만하거나 이기적이이거나 시기하고 질투하고 분노할 수는 없기 때문이죠.

더욱이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부모 형제를 미워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적용)오늘 본문 4절 후반부에 나타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 부분은 다음주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부의 삶이 결혼했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 서로의 뜻에 맞춰나가는 삶에 있다는 거죠.

오순절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맞게 그 백성도 순종하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하나님의 자녀들, 성령세례를 통해 그런 고백을 한 성도들도, 그 단계에서 끝나지 않기를 주님은 바라신다는 점입니다

성령세례 이후에 성령의 충만함 속에 살기를 원하시는 것 말입니다.

 

(내음성)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주님께서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에게도 성령세례 이후에 성령의 충만함 속에 살게 해 주세요.”

결혼한 부부가 저절로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서로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충실해야 행복한 것처럼, 그런 삶을 살게 해 주세요.”

성령충만은 저절로 부어주시는 게 아니라 주님의 뜻을 좇아 주님의 기쁨이 되고자 할 때 충만하게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아무리 방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괴력을 발휘하고 예언을 할지라도 분노와 교만과 시기심과 질투심에 가득차 있다면 성령의 충만이 아닌 거짓 영에 사로잡힌 자인 줄 믿습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해도 서로를 배려하며 이해하고 사랑한다면 그것으로 행복한 가정생활이 될 줄 믿어요.

주님, 제가 비록 방언도 못하고 병도 못고치고 괴력도 예언도 못해도 성도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사랑하며 살게 해 주세요.”

그것보다 더 확실한 성령충만함이 없는 줄 믿사오니, 오직 성령의 열매 특히 사랑의 열매를 맺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술에 취하면 술에 이끌려 분별력을 상실하지만 성령에 취하면 모든 영역이 활성화되어 집중력이 더 강화되는 줄 믿습니다.”

주님, 오직 성령에 취하고 성령의 충만함 속에 살게 하셔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이끌어주시옵소서.”

 

(찬양) 허무한 시절 지날때 깊은 한숨내쉴 때 그런 풍경 보시며 탄식하는 분 있네

고아같이 너희를 버려두지 않으리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하리라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내 주의 보내신 성령이 오셨네

우리 인생 가운데 친히 찾아 오셔서 그 나라 꿈 꾸게 하시네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 하나님은 진리와 생명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진리와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보혜사 성령님의 성령세례를 부어주시고 성령충만함을 부어주시길 원하신 분이죠.

남남이던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 것으로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서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행복하죠.

하나님의 자녀들도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좇아 순종할 때 행복한 신앙생활을 누리게 해 주실 것입니다.

 

술 취하면 술이 술을 먹고 술이 이끄는 대로 분별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성령에 취하면 성령의 이끄심 속에 놀라운 분별력을 얻고 삶의 활력을 되찾게 됩니다.

부부가 좀 연약해도 이해하고 포용하면 행복한 결혼생활이 가능해 집니다.

내가 기도와 찬양을 잘 못해도, 예언과 대단한 능력이 없을지라도, 성도를 이해하고 포용하며 사랑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성령충만한 삶인 줄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와 같은 성령세례,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주시길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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