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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욥35

지음 받았구나(욥41:1~34 ) 욥과 세 명의 친구 간에 나눈 대화 이후에, 엘리후가 등장해 반론을 제기했었죠. 그것이 32장에서부터 37장까지 이어졌는데, 그 후에 곧장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죠. 그것이 38장부터 41장까지 이어지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살펴보면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었죠. 자연의 이치조차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이 어찌 오묘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냐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돌이켜보면, 비록 욥이 세 친구들로부터 과도한 책망을 받아 고통스럽긴 했지만, 그도 연약.. 2022. 2. 23.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욥39:1~30) 나니아 연대기를 쓴 소설가이자 20세기 기독교계의 대변증가로 알려진 C.S. 루이스가 〈고통의 문제〉(2002, 홍성사)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는 그 책의 서두에서 고통의 문제를 그렇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하다면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에게 완벽한 행복을 주고 싶어 할 것이며,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그 소원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피조물은 행복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하지 않은 존재이거나 능력이 없는 존재, 또는 선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존재일 것이다”(39) 고통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직면했을 때, 이러한 의문은 누구라도 한번쯤은 들지 않겠습니까? 몇 해 전에 일어난 중국의 쓰촨성 지진 현장이나, 미국의 올랜도 테러 현장을 접하면, 그들의 처참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 2022. 2. 21.
폭풍가운데서(욥38:1~41) 우리가 처한 극한 상황에서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 묻곤 합니다. ‘하나님은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왜 내게 이런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까?’하고 말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어려움과 고통을 당한 욥도 어쩌면 그런 질문을 하나님께 던졌을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잠시 잠깐 나를 시험코자 하실 수 있고, 나를 믿기 때문에 이런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점차 그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짙어질 수 있죠. 더욱이 고난당한 욥을 위로하러 왔던 세 친구가 위로와 격려는커녕 자신을 향해 인과응보식으로 정죄하고 비난하고 나섰는데, 욥도 이유 없이 고난당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그들이 말할 때마다.. 2022. 2. 19.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욥37:1~24) 오늘 본문은 엘리후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그는 여태껏 이야기해 왔듯이, 고난 속에 있던 욥에게 그의 세 친구처럼 단순한 ‘인과응보의 차원’으로 이야기한 게 아니었죠. 그는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교육차원’이 있다고 이야기한 인물이었죠. 그러면서도 엘리후는 욥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중재자 역할을 했죠. 하나님께서 영적인 유익을 위해 욥을 고난 속에 있게 하셨는데, 욥은 그것을 믿고 기다리지 못한 채, 오히려 자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의로우신 하나님을 부당하다고 정죄한 점을 일깨워준 것이죠. 그런 점에서 볼 때 엘리후가 이야기한 것은 올바른 관점이었죠. 욥의 예기치 못한 고난은 그를 ‘겸손과 회개의 자리’로 이끌어 가기 위한 유익한 고난이라는 것이었죠. 그런 상황에서 욥은 자신의 무죄함.. 2022. 2. 18.
곤고에서 구원하시고(욥36:1~33) 누군가 이유도 없이 뒤통수를 맞았다면 그 기억은 오래도록 가지 않겠습니까? 이를테면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친구들과 문제를 맞추는데, 찍은 문제가 정답이 된 경우, ‘기쁘다’고 하면서 소리를 치는데, 담임선생님이 평소 그 친구가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데 맞췄다면서, ‘맞으니까 좋냐’하면서 뒤통수를 친다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아는 목사님은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는데, 그때 기분이 너무 상해서 지금까지도 그 아픈 상처를 기억한다고 말이죠. 아마도 꼬마의 마음에 그때의 억울함과 분함이 큰 상처로 남아 있기에 지금까지도 기억되지 않나 싶습니다. 하물며 욥의 억울함과 분함이야 우리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일평생 온전하고 정직하게 살았던 욥이었습니다. 악에서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던 욥이었습니다. 그 기개와 .. 2022. 2. 17.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욥35:1~16) 엘리후가 욥에게 지적할 때 욥이 잠잠했던 것, 그것은 엘리후의 지적이 타당성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른바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고통을 권선징악 차원에서, 인과응보격의 차원으로 욥을 몰아세우고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마다 욥도 그런 게 아니라고 자기 의로움을 호소했고, 그것을 세 차례에 걸쳐 대화하고 토론하고 항변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그들의 항변을 깊이 듣고 있던 엘리후가 나서서 말하는데, 욥도 그렇고 그 세 친구들조차 이전과는 달리 자기주장을 펼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욥의 의로움 앞에 그 세 친구들이 정당한 논리로 욥을 공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엘리후는 어떻게 욥의 의로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까? 엘리후가 지적한 부분은 그것이었습니다. 비록 욥이 자기 의로움.. 2022. 2. 16.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욥34:1~37) 계속해서 우리는 엘리후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그는 욥의 세 친구보다도 훨씬 나이가 어린 사람이었죠. 그러나 그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거나, 그 세 명의 친구들처럼 욥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입장의 말을 하는 게 아니었죠. 오히려 욥에게 소망과 격려를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었죠. 사실 이전에 등장했던 욥의 세 친구는 현재 욥이 겪고 있는 처참한 상황을 보면서 대경실색했습니다. 그들은 욥에게 숨겨둔 악행이 없다면 그런 고통이 뒤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욥의 고통이 무서운 죄악의 결과임을 확신했던 것이죠. 그리고 그 단죄, 그 정죄를 31장까지 이어나갔습니다. 물론 욥도 그에 뒤질새라 자기 의로움을 그 친구들에게 계속 항변했죠.. 2022. 2. 15.
그 사람의 중보자로 함께 있어서(욥33:1~33) 오늘 본문은 어제 새롭게 등장한 엘리후가 하는 말을 잇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후, “그는 나의 하나님”이란 뜻의 이름을 지닌 엘리후는 아버지 바라겔, 곧 “하나님이 복 주신다” 또는 “하나님이여 복을 주소서”하는 이름의 뜻을 지닌 아버지 바라겔의 아들인데, 그는 아브라함과 친척 관계요, 또 유다 지파의 후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욥과 같은 동족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성찰도 깊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욥과 세 친구들 사이에 중재자로 나선 사람이고, 이 후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신 것을 보아 그는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예비한 사자로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말을 통해 중요하게 깨닫게 되는 게 무엇일까요? 그의.. 2022.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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