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전개) 신앙생활은 결혼생활과 같다고 했습니다.
서로 남남이던 두 사람이 중매든 서로 아는 사이든, 사귐의 과정을 통해 결혼식을 올릴 때, 정식 부부가 되는 법이죠.
그러나 결혼식을 올렸다고 해서 저절로 행복한 부부생활, 행복한 가정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결혼식을 올린 이후부터 서로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며 살아갈 때 행복한 결혼생활이 가능하다고 했죠.
결혼전에 서로 다른 종교를 갖고 살아왔어도, 결혼 후에는 배우자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가 그것이죠.
결혼전에 야근을 밥 먹듯하며 살아왔어도, 결혼 후엔 배우자를 위해 야근을 줄이는 삶을 사는 이유가 그것이죠.
결혼전에 친구집에 자주 놀러가서 그 집에서 자고 돌아왔다면, 결혼후엔 그런 삶을 끊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결혼전에 친구들과 금요일 오후여행을 떠났다가 주일밤 늦게 돌아왔던 삶도 중단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죠.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결혼 전에 자기 독단적인 경제관대로 살아왔다면 결혼 후에는 배우자와 상의하는 경제관을 세워야 하는 것이죠.
1만원이든 10만원이든 자기 맘대로 지출하던 경제패턴도 결혼 후엔 1만원부터 상의하며 지출하며 사는 것이죠.
그래야 서로를 신뢰하게 되고 더욱더 행복한 가정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 그렇듯 결혼생활은 서로가 영적으로 의식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연합하는 삶의 과정입니다.
바로 그런 모습이 신앙생활도 똑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이 친구나 지인의 손을 잡고 교회 예배당 문턱을 넘을 수 있습니다.
그 전에는 다른 종교를 믿든, 무교든지간에,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아온 사람 말입니다.
그런 그가 예배당 문턱을 넘으면서 점차 예배와 기도와 삶의 환경에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3개월간 갖가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듯 말이죠.
그때 홍해를 건너고, 수르협곡을 거쳐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시는 기적을 체험했죠.
또한 신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받았고, 르비딤 전투에서 승리의 역사도 체험했죠.
그리고 3개월때,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오순절 날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언약식을 맺었죠.
그 언약식이, 우리식으로 말하면, 배우자와 혼인식을 맺는 의식의 장면과 같은 격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식을 맺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 곧 말씀을 주셨죠.
그러나 그 언약식 자체로, 그 율법자체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혼식을 했다고 저절로 배우자가 행복한 결혼생활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듯 말입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했던 것이죠.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언약식을 맺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었죠.
바로 그것을 확인코자 하나님께서는 40년간 당신의 백성들을 광야길로 인도해내셨던 것이었죠.
그 속에서 애굽에서 탐욕이라는 우상을 좇던 삶에서 벗어나 이제는 하나님만 예배하는 자들로 인도한 것이었죠.
이전에 애굽의 타락한 의식을 모두 벗어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의식을 갖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자신이 물질의 주인이 되어 살던 애굽의 물질관을 버리고 이제부터 하나님의 청지기다운 물질관을 세우며 살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참된 신앙생활의 비결이요, 영적으로 의식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하나님께 복을 받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그런데 그 모습은 신앙생활의 성령세례와 성령충만도 그와 같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령세례란 일생일대에 유일회적인 사건으로, 하나님을 영적인 아버지로 고백하는 믿음을 우리에게 불어넣어주시는 단계죠.
그것은 곧 예수님을 믿게 되면 구원의 은혜를 받게 해 주시는 1단계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2단계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성령세례를 받는 단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살아계심을 체험케 하고, 점차 믿음을 불어넣어주시는 단계죠.
이스라엘 백성이 3개월을 거쳐 시내광야에서 언약식을 맺는 그 단계가, 성령세례의 단계죠.
그것은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내 죄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믿게 하시는 단계입니다.
그와 같은 성령세례가 임할 때 여러 현상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몸이 진동하고, 뜨겁거나, 아픈 부위가 고침받거나, 기도하는데 방언이 터지거나, 빛의 환상을 보는 것 말이죠.
물론 그런 현상없이, 마음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적인 평강과 기쁨이 샘솟을 수 있죠.
내 삶은 다람쥐 쳇바퀴처럼 늘 같지만, 어제와는 전혀 다른 영적인 소망을 안겨주시는 것 말이죠.
바로 이것이 제 2단계 곧 성령세례의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 들어서면 성령님이 내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 단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제3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삶의 단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삶의 영적인 원동력은 은사나 체험으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영적인 원동력은 은사나 체험을 베푸시는 성령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나오기 때문이죠.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예화) 이 말은 조태성 목사의 〈성령님의 임재를 연습하라〉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새생명교회를 개척한 그분은, 본래 보수적인 장로교단에서 15년 신앙생활한 분입니다.
그런 그가 순복음신학교에 들어갔는데, 시끄럽게 소리치고 울면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조용히 기도해도 하나님은 들으실텐데, 왜 자꾸 저럴까?”하면서 “아-졸려, 나는 뭐하지”했던 그였죠.
그렇게 그는 그 사람들처럼 오래 기도할 필요도 못 느꼈고, 말씀에 무지해 교만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의 심령 속에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사모하기 시작했고, 신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혼자 방에서 기도했죠.
그러다 3일째 되던 날에, 성령님께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신앙생활과 태도와 마음 자세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부르짖는 기도가 전혀 부끄럽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방언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2주 뒤, 신학생들이 지방에 있는 개척교회 전도대회에 가게 돼, 따라갔죠.
그런데 그 교회 목사님께서 “전도에 자신이 없으면 남아서 기도해 주세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남아서 주위 사람 눈치를 보는데, 자신처럼 한 명이 더 남아 있었죠.
“아마, 나처럼 성령 세례를 받지 못했나 보다. 정말 다행인 걸.”
그렇게 위로를 받는가 싶었는데, 그 한 명이 갑자기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낙심이 되었는데, 곧바로 간절함이 솟아났고, 성령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긍휼히 여겨 주세요. 불쌍히 여겨 주세요.”
“하나님, 제게도 성령 세례를 주옵소서. 방언을 허락해 주세요.”
그렇게 부르짖어 기도하는데, 갑자기 한 마디의 방언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한마디가 계속 반복이 되었고, 그때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탁’하고 풀린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방언으로 한 참을 기도하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뭔 기도를 혼자 그렇게 오래 하고 있어?”
“우리, 전도대회 다 끝났어.”
여태껏 기도해 봤자, 5분도 못했는데, 그날은 2시간이나 넘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그가 궁금한 게 있었습니다.
자신이 받은 방언이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인지, 여쭤보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오늘 주신 이 방언이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이라면 한 번만 방언이 바뀌게 해 주세요.”
그랬더니, 놀랍게도 방언이 바뀌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이죠.
(깨달음) 어떻습니까?
신학교 1학년 시절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처음으로 성령셰례를 부어주신 유일회적인 놀라운 사건 아닙니까?
그 전까지 그토록 소리처셔 방언으로 2시간에 걸쳐 기도해 본적이 없던 그였지 않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하고, 얼마나 영적으로 뿌듯함을 느꼈겠습니까?
그런데 그로부터 6개월간 그는 신학교수업을 마치면 방에서 1시간 반씩 기도하며 성령님의 임재를 사모했죠.
그때부터는 소리치며 방언으로 기도하게 하시는 것보다는 묵상기도로 바꾸시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때 그가 성령님께 기도하는 방법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성령님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옳은 건가요? 제게 원하시는 기도 방법은 무엇인가요?”
그러자 성령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태성아. 아직 너에게는 균형 집힌 기도의 훈련이 필요하단다.”
“부르짖는 기도도 중요하고, 나의 임재를 기다리며 잠잠하게 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도 중요하단다.”
“앞으로 네 집에서 나의 특별한 지시가 없는 한 지금처럼 나와 교제하며 내 인도를 따라 하나님께 기도하거라.”
“그러나 학교에서나 어디서나 거기에는 내가 세운 사람의 인도를 따라 부르짖어 기도하며 인도자를 따르거라.”
“하지만 그때에도 특별한 경우에는 내가 너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결코 많지 않단다.”
“나는 내가 너보다 먼저 세운 권위자들을 통해 일을 할 것이다. 네가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순종하거라.”
“그것이 네가 나를 따르는 것이다.”
(적용) 무엇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것입니까?
성령세례를 통해 나타나는 은사나 체험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을 일깨워주시는 것이죠.
우리에게 적용토록 하시는 것은 성령의 은사나 체험을 베풀어주시는 성령님과의 친밀한 관계죠.
바로 그것이 성령세례 이후에 제 3의 단계로 나아가는 성령충만한 삶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40일간 이 땅에 지내시다가 감람산에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제자들은 주님의 약속하신 말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그로부터 10일째 되는 날,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오순절에 하늘로부터 성령님이 마가 다락방에 강림했죠.
그때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령님께서 친히 임재하셨습니다.
이른바 일생일대에 유일회적인 성령세례를 그들이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임한 성령세례의 체험, 성령세례의 현상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났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보였죠.
뭔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뭔가 눈에 보이는 것 같기도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각 개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이라, -같은, -처럼, 이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마치 몸에 진동이 일거나 뜨겁거나, 영적인 기쁨이 소망이 솟거나, 빛의 환상을 보는 체험처럼 말이죠.
(본문)그런데 그것은 신앙생활의 제 2단계 성령세례로서,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이른바 성령충만으로 나아가는 것 말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4절에서 이렇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원어)그들은 모두 성령의 충만을 받았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을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령의 ‘충만’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플레쏘’(πλήθω)로 ‘채우다’(to fill), ‘넘치다’(to be fulfilled)는 뜻이죠.
임금이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벌여놓고 길거리에서 손님들을 다 불러모아 ‘가득찬 상태’(마22:10)가 그 경우죠.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다 찬 상태’(눅2:6),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가득 찬 상태’(눅5:7)죠.1)
(깨달음)성령의 충만함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사람들에게 충만했던 것이죠.
주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8) 하심처럼 말이죠.
(원어2)그런데 그와 같은 성령의 충만함이 그들을 어떻게 이끌어가셨습니까?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을 말하기 시작한 것’이죠.
다른 ‘언어들’이란 헬라어 ‘글로싸’(γλῶσσα)로, 영어론 ‘toungue’, ‘other langugae’입니다.2)
이 말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천상의 말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본문 8-11절에 나오는, 중동지역 16개 국에서 온 사람들이 알아들은 자기네 말이었죠.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깨달음) 이때 주신 방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부어 주신 방언과 다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에 주신 방언, 사도 바울이 누구보다도 많이했다던 방언은, 인간의 언어로 알아듣지 못한 천상의 방언입니다.
조태성 목사가 기도할 때 받았다던 그 방언이죠.
그 방언으로 기도할 때, 예전엔 5분도 힘들었지만, 2시간 넘게 기도했던 그 방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방언은 개인에게 유익되지만, 교회 공동체에게 통역이 필요하다고 했죠.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방언은 통역이 필요치 않는 방언입니다.
중동지역 16개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자기 말로 알아듣는 인간의 언어였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그때부터 계속 그런 방언을 주셨겠습니까?
아니죠. 그렇기에 이때 주신 방언의 목적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세계 16개 국에서 온 사람들과 소통하도록 방언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적용) 그래서 바울은 천사의 방언을 받았다 자랑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권면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9)
(깨달음) 무슨 뜻입니까?
자신이 기도하면서 받은 방언은 홀로 기도하거나 통송으로 기도할 때 너무나도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 공동체 안에 사람들과 교제하고 소통할 때 낯모르는 방언보다 인간의 언어가 훨씬 낫다는 뜻이죠.
왜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입술을 통해 그런 권면을 하도록 했겠습니까?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각자 받은 은사와 방언이 최고라 하면서 대표로 기도할 때도 방언으로 해버리기 때문이죠.
그렇게 무질서하게 자신이 받은 은사와 체험을 최고로 여기기보다, 질서있게 소통하며 교제하는 걸 원하시는 성령님이라는 뜻입니다.
성령님께서는 그만큼 성령의 은사나 체험적인 것보다도 성령님 안에서 서로가 소통하고 교제하는 걸 최상으로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주문) 그렇다면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부어주셔서 성령님과도 소통하고 성도들과도 부부사이에도 소통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란 사실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지금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세례를 부어주고, 성령의 충만함 속에 16개국에서 온 사람들과 소통한 일이 있지 않았더냐?”
“너에게도 성령세례를 부어주길 원하고., 너도 성령충만 속에 살았으면 좋겠구나.”
“결혼식 올린 부부라고 저절로 행복해 지는 게 아니라 일평생 서로의 의무와 책임이 더욱 필요하지 않더냐?”
“너도 성령세례 통해 몸이 진동하고 뜨겁고, 아픈 부위가 치료되고, 기도할 때 방언이 터지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나 그것은 제2의 단계요, 너는 성령충만의 단계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120명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 속에서 16개국 사람들과 그들의 언어로 소통한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구나.”
“그때 그들이 얼마나 말을 유창하게 했는지, 얼마나 세련되게 했는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았느냐?”
“120명은 16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주님의 부활하심을 말하는 정도로 소통할 수 있다면 족하지 않았겠느냐?”
“그러나 그들이 중요하게 여긴 소통은 어쩌면 말보다 그들의 변화된 삶, 진실된 삶을 보라고 하지 않았겠느냐?”
“오늘 너도 그런 삶의 소통이 일어났으면 너무 너무 좋겠구나.”
(찬양) 성령하나님 나를 만지소서 상하고 깨어져 지친 나를
새롭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시들은 내 영혼 살리소서.
성령하나님 이 땅 고치소서 죄악의 어둠 속 헤매는 우리
태워 주소서 성령의 불로 세상 헛된 맘 태우소서.
임하소서 성령 하나님이시여 지금 이 곳에 임하소서.
바람처럼 불처럼 성령이여 임하소서.
(예화)그래서 지난 시간 말씀을 드렸지만, 그런 성도의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거짓 영에 사로잡힌 경우라 했죠.
우리 교단 총회장인 지형은 목사님이 우리 지방회에서 와서 설교를 하면서 간증한 그 경우가 그것이죠.
그는 교회에서 누구보다도 뜨겁게 기도하지만 한 동네에서 누구보다도 잘 싸우는 싸움닭 같은 분이라고 말이죠.
그런 분은 홀로 백만 마디 방언으로 기도할지라도, 오히려 타인과 있을 때는 타인의 말을 더 경청하며 소통하려 애쓰는 게 진정한 성령충만의 삶인 줄 믿습니다.
(예화)결혼한 아내가 아침저녁으로 방언기도를 하는데, 집안이 어지렵혀 있고 남편의 무능력함을 탓하며 산다면, 어떻겠습니까?
방언기도로 뜨겁게 기도할지라도, 집안 정리도 잘하고, 남편이 부족해도 자족하며, 남편 기를 살려주는 아내야말로 진정으로 성령충만한 아내이지 않겠습니까?
(예화) 서울에서 안정적인 목회를 하던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교회에서 훌륭한 분으로 알려져 있었고 성도들도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당신은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종이라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죠.
또 목회자로서 밖에서는 존경받지만, 집에서는 끓어오르는 혈기를 잘 참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로서 자신의 모습 자체가 너무나도 안타까워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임하고 지방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작은 상가를 얻어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목회를 위함도, 성도를 모으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주님의 음성,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강대상에 담요 하나 가지고 올라가 라면을 끼니를 때우며 지냈습니다.
말을 많이 하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강대상에서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자, 성령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작정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세 달이 지나도, 6개월이 지나도 주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9개월을 그렇게 기다렸습니다.
그래도 주님의 음성, 성령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때부터 그곳에 주님이 계시고, 그 안에 성령님께서 계심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누가 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성도들이 하나 둘 모이기를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성도들이 와도 그 목사님은 특별한 양육을 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만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점점 더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그것이 신기해서 주님께 여쭤보았습니다.
“주님, 도대체 왜 이렇게 사람들을 보내주시나요?”
“교회는 내가 성장시키겠다. 너는 나와 교제 나누는데 더욱 집중하거라.”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깨달음) 이것은 비단 목회만 그렇겠습니까?
부부생활도, 부모자식간에도, 직장생활도, 그리고 모든 인간관계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내 속에서 원하는 바를 내 마음대로 다 내뱉고 산다면, 어느 배우자가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다 내뱉고 싶어도 절제하며 입을 다물고 살아야, 그 여백 속에서 성령님께서 임하는 역사가 있는 것이죠.
부모자식간에 서운한 감정과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거침없이 쏟아붓는다면, 누가 받아줄 수 있겠습니까?
부모와 자식이 다 쏟아붓고 싶어도, 스스로 재갈 물려야, 그 여백에 성령님께서 소통의 장을 열어주시는 법이죠.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13:1-2)
(내음성) 그래서 오늘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할 때 어떤 기도를 주님께서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은사로만 생각하고 대단한 능력으로만 생각하며 살아온 저를 용서해주세요.”“주님, 성령세례를 통해 몸이 진동하고 뜨겁고, 치유받고, 빛의 환상을 보고, 천사의 방언을 한다면 너무나 좋겠어요.”
“그러나 그런 현상이 내게 임하지 않더라도, 세상이 줄 수 없는 절대적인 평강과 기쁨속에 살게 해 주세요.”
“그것이 더욱 풍성한 성령세례인 줄 아오니, 그런 역사와 함께 성령충만함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주세요.”
“성령충만함 속에서 다른 언어로 소통한 120명의 제자들처럼, 저도 뭔가를 제가 다 하려고 하기보다 성령님께 삶의 여백을 내어맡기며 살게 해 주세요..”
“너무 성급해 앞서지 말고, 내가 아둔해 늦게 깨닫지 않도록, 매일매일 성령님께 의탁하며 살게 해 주세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에 눈을 감는 그 순간순간마다 ‘성령님, 어떻게 하길 원하세요?’ 더욱 친밀하게 묻고 대화하며 살게 해 주세요.”
“100번이면 100번 다 묻고, 성령의 임재를 기다려 살아갈 때, 1번이라도 직접 응답해주신다면, 2번은 더 쉬울 줄 믿어요.”
(찬양)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그때 주님 하신 말씀 내 샘에 와서 생수를 마셔라
오 주님 채우소서 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
하늘 양식 내게 채워 주소서 넘치도록 채워주소서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성령세례의 은혜와 성령충만의 은혜를 부어주길 원하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세례를 통해 몸이 진동하고 뜨겁고 아픈 부위를 고쳐주시고, 빛의 환상도 보고, 방언의 은사도 부어주시길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설령 그런 현상이 없어도, 세상이 줄 수 없는 절대적인 평강과 기쁨을 마음 속에 불어넣어주는 것도 성령세례를 부어주시는 일종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신앙생활의 종착역이 아니라 제2의 단계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제3의 단계로 나아가길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2시간 넘게 방언기도를 못한다 할지라도, 주님안에서 타인과 소통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성령충만함 삶 말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를 속시원하게 아내와 자식들과 인간관계 속에서 다 퍼붓고 싶어도,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여백을 맡기며 입을 다물며 묵묵히 살아가는 성령충만한 삶 말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매 순간순간 ‘성령님,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세요?’하면서 성령님과 친밀한 교제를 원하는 성령충만한 삶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와 같은 성령충만함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이끌어주시고,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의 주인공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https://www.studylight.org/lexicons/eng/greek/4130.html
2)https://www.blueletterbible.org/lexicon/g1100/kjv/tr/0-1/
'주일설교SundaySerm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1-4) (0) | 2021.06.18 |
---|---|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행:4-8) (1) | 2021.06.11 |
하나씩 임하여,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행2:1-4) (0) | 2021.05.28 |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행2:1-8)_성령강림절 (0) | 2021.05.21 |
하나가 되게 하려(요17:20-22)_부부주일 (0) | 2021.05.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