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논지) 기도란 하나님과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홀로 계실 때 하나님 아버지께 수시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겠습니까?
기도하는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듣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어걸 수 있기 때문이었죠.
그만큼 기도란 내 생각과 내 뜻을 관철시키고자 하나님께 아뢰는 시간이 아닙니다.
기도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음성을 듣는 시간이요, 그 뜻과 음성을 좇아 내가 바르게 걷고자 하는 시간이죠.
그렇기에 기도하는 시간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하나님과의 관계도 더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요즘 저도 수시로 성령님의 뜻을 묻고 있고,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고,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시간이 많고, 기도하는 깊이가 깊어질수록 영적인 외골수에 빠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엮어나갈수록, 하나님께서는 사람과의 관계도 더 넓고 더 깊게 엮길 원하시는 주님이시죠.
그렇지 않았다면 갈릴리 출신 제자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 하지는 않으셨겠죠.
기도하는 사람, 성령받은 사람들은,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사람과의 관계도 더 넓고 더 깊어지길 원하신 것이죠.
(발췌)전옥표의 〈모세처럼 기도하고 여호수아처럼 실행하라〉는 책에 나온 내용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레드랜즈 대학에서 기도응답에 대한 실험을 실시한 적이 있습니다.
실험에 응한 사람들은 22세에서 60세까지로, 총 45명이 지원을 했습니다.
그들 중에 3분의 1은 대학생, 3분의 2는 그 지역의 주부와 교사와 사업가와 그 밖의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죠.
그들 지원자들은 그 연구에 참여했을 때 모두가 우울증의 문제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들 중 절반이상은 신체적으로 아무 이상이 없을 때도 의학적으로 치료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었죠.
모두가 우울증을 앓고 있던 그들을, 이제 15명씩 세 개의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A 그룹은 평범한 심리 요법을 받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치료받는 동안 어떤 기독교적인 언급도 하지 말며, 오직 일반 심리 치료만 받고자 할 뿐이었습니다.
B 그룹도 15명의 사람들을 모았는데, 그들은 평범하게 기도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9개월에 걸친 실험 내내 매일 밤바다 자신만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충실하게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었으며, 기도에 대한 한없는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심리학적 상담은 거부한 채, 오로지 지금 가지고 있는 문제를 없애는 것만 바라며 기도했습니다.
C그룹도 15명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심리적인 검사를 제공받았고, 매주 2시간 동안 기도하는 모임을 통해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로부터 9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때 그들은 다른 중립적인 심리학자들에 의해 다시 한번 검사를 받았습니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어느 그룹의 사람들이 이전과 달리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줬을까요?
어느 그룹의 사람들이 이전과 달라진 점이 없이 그저 똑같은 모습을 보여줬을까요?
어느 그룹에서 제일 좋은 변화의 모습을 보여줬을까요?
A.B.C. 그 그룹 중에서 여러분은 어느 그룹이 제일 좋아졌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시나요?
9개월 뒤에 연구한 결과, 세상의 심리요법을 받은 A그룹은 65%의 향상을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심리요법을 거부한 채 기도만 했던 B그룹 어떤 향상도 보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다만 C그룹, 심리검사도 받고 매주 2시간씩 모여서 기도하던 C그룹은 무려 72%의 향상을 보여줬다고 하죠.
특별히 C그룹 참가자들은 검사초기 편두통 말더듬 궤양증상 간질증상이 있었는데, 9개월간 획기적인 효과를 본 것이죠.
(깨달음)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기도하는 사람일수록, 성령의 사람일수록, 세상 방법도 수용하며 기도하는 걸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걸 알 수 있죠.
그만큼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명분으로 세상을 등한시 한 채 영적인 외괼수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과 교제하는 사람일수록, 세상과 소통하고 더 많은 사람과 교제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적용)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의 시간을 더 많이 늘려가고 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갖듯이 세상 사람들과의 소통도 더 넓게 더 깊게 엮어나가고 있습니까?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그렇게 하나님과도, 또 세상과도 더 깊고 넓게 관계를 엮어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이후 10일째 되던 날, 곧 오순절날에 하늘로부터 성령님께서 강림하셨습니다.
그날 마가의 다락방에 기도하던 120명의 사람들에게, 성령세례를 베풀어주셨고,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셨습니다.
성령세례의 특징에 대해서는 2주전의 말씀을 통해 나눴고, 성령충만에 대해서는 지난 주일 말씀을 통해 나눴습니다.
성령세례의 특징은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이 믿어지고 몸이 떨거나 뜨거워지거나 환상을 보거나 방언이 임한다고 했죠.
본문 속 120명의 제자에게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들리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보이는 것이 그것이죠.
그것은 성령세례의 주관적인 체험으로서, 120명 모두에게 동일하게 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령세례가 임하면 무엇보다도 내가 죄인임을 알게 되고,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고백하게 되죠.
그때 눈물 콧물 다 쏟고, 감사가 넘쳐나고, 몸에 진동이 일고 환상을 보고,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도 받게 되죠.
그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지만 그것은 신앙생활에서 걸음마 단계를 뗀 제 2 단계의 신앙생활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분명코 제 3단계 곧 성령충만한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와 같은 성령충만의 모습을, 지난 시간에 살펴 본 방언을 통해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본문)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사람들, 120명의 주님의 제자들이 그날 하게 된 방언은 인간의 언어라고 했죠.
그것도 세계 16개국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 말로, 그것도 자기 본국에서 태어날 때부터 들은 말로, 알아들었죠.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6)
그만큼 그날 그들이 받게 된 방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받은 방언과는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인간의 언어로 알아듣지 못한 천사의 방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령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로 알아듣지 못한 방언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부어주셨겠습니까?
그것은 서로들 잘난 체 하고 그 방언으로 으스대며 살라는 게 아니라, 더 깊이 하나님과 소통하고 교제하라는 뜻이었죠.
하지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 방언으로 서로 으스대며 자기 자랑의 수단으로 삼았기에 교회에 불통이 생기고 말았죠.
그 때문에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그런 방언을 많이 한 바울은, 개인의 경건을 위해 방언으로 기도하지만, 공동체 유익을 위해서는 통역을 하라고 강조했죠.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일만마디 방언보다 다섯마디 격려와 덕담의 말이 훨씬 더 값어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그만큼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부어주신 방언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혼자 하나님과 깊이 기도하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성도들간에 더 넓고 더 깊이 소통하라는 차원으로 주신 것이었죠.
그것은 본문의 120명 제자들에게 세계 16개국 사람들이 알아듣는 인간의 말을 주신 목적도 그와 똑같지 않겠습니까?
낯선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무엇보다 언어가 통해야 했고, 언어가 통하면 모든 부분에 소통이 일어나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그날 120명의 제자들이 외국어를 얼마나 잘 구사했는지, 얼마나 세련된 말을 사용했는지, 그게 중요할까요?
그들이 서툰 외국어를 할지라도, 세계 16개국에서 온 사람들과 더 넓게 더 깊게 소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던 것이죠.
그만큼 그날 성령님께서 성령충만 가운데 그들에게 주신 방언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외국말을 세련되게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 영어소통 능력이 A급이냐 C급이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우물안 개구리와 같은 의식을 떨쳐버리고 세계 16개국의 사람들을 수용하고 섬기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죠.
바로 거기에 성령충만을 부어주신 목적, 거기에 외국어 방언을 주신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적용)그것은 캘리포니아 레드랜즈 대학에서 기도응답을 받고자 실험에 참여한 45명의 사람들도 똑같지 않겠습니까?
그 중에 세상 심리도움을 차단한 채 기도에만 열중하던 영적 외골수와 같은 사람들에겐 어떤 효과도 없었죠.
세상의 심리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좀더 나은 효과를 봤지만, 가장 좋은 효과를 본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세상의 심리도움을 받은 사람들, 그러면서도 정기적으로 다른 사람과 교제하며 소통의 장을 넓혀간 사람들 아니었습니까?
본문 속의 120명의 사람들, 120명의 제자들에게 부어주신 성령충만도, 그 방언도 그와 동일하다는 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부어주시고자 하시는 성령충만도, 우리에게 부어주시고자 하시는 방언이 있다면, 그 목적도 똑같지 않겠습니까?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 주님은 우리가 주님과 더 기도하며 교제하듯, 타인과 더 넓고 깊게 소통하며 사는 은혜를 베풀어주시길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주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 성령님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나는 너에게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부어주길 원하고, 그를 통해 너와 함께 더 깊이 교제하고 소통하길 원한다.”
“네가 내 앞에 기도하는 그 시간을 가장 귀히 여기고 더욱 친밀한 관계를 엮어나갔으면 좋겠구나.”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존귀하게 섬기는 길이요, 그 하나님께 의지하는 길이지 않겠느냐?”
“그리고 하나님께 더 깊이 기도하고 교제하듯이, 너와 함께 신앙생활하고 너와 함께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과도 더 넓게 더 깊이 소통의 장을 열어나갔으면 좋겠구나.”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성령세례를 넘어서서 성령충만한 삶을 갈망하며 하나님 앞에 간구하며 나아갔으면 좋겠구나.”
“매사에 너의 뜻과 너의 의지대로 살아왔던 삶에서 이제는 성령님께 묻고, 성령님의 뜻을 듣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구나.”
“성령님께서는 성령님을 존귀하게 환영하고 영접하며 모시는 자들의 심령속에 친히 역사하시는 영이시니 말이다.”
“다만 그렇게 성령님과 깊이 소통할 때 영적인 외골수에 빠지지 말고, 너의 주변 사람들을 수용하고 섬기는 소통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
“성령충만한 삶은 바로 그런 삶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찬양)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그때 주님 하신 말씀 내샘에 와서 생수를 마셔라
오 주님 채우소서 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
하늘 양식 내게 채워 주소서 넘치도록 채워주소서
(전개)그런데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사람들이 그런 방언을 할 때, 세계 16개국에서 온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나요?
본문 7-8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원해)120명의 사람들, 120명의 제자들이 세계 16개국의 언어를 하자, 모두가 놀라게 됐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놀라다’는 헬라어 원형 ‘타우마’(θαῦμα)는 영어로 ‘마블’(a marvel), ‘원더플’(a wonderful thing)입니다.
그만큼 마블 영화처럼, 신기한 능력에 사로잡혀서 지금 저들이 16개국 언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깨달음)그렇기에 때문에 본문의 의미를 재해석해서 이야기하면 어떤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까?
도대체 무슨 마블에 사로잡혔길래, 우물안 개구리 같은 갈릴리 사람들이, 우리 말을 할 수 있는 것인지, 하는 상황이죠.
그것은 그야말로 경이로움 속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 12절에서도 또다시 한 번 더 놀라는 상황을 증언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본문2)그런데 그런 경이로움과 달리, 16개국에서 온 사람들 중에는 그들을 조롱하듯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는 점입니다.본문 13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깨달음)무슨 뜻입니까?
세계 16개국에서 온 사람들 중에, 120명의 사람들이 자기네 말을 할 때, 다들 경이로움으로만 받아들인 건 아니었던 거죠.
오히려 120명의 사람들, 그 우물안 개구리 같은 그들을 향해, 술에 취해서 저렇게 하고 있다고 조롱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과 성령에 충만한 사람의 차이를 말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술이 술을 마시게 해서 술이 이끄는 대로 끌려간다는 것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도 얼굴이 달아오르고 성령에 충만한 사람도 얼굴이 곱게 달아오르긴 하죠.
술에 취한 사람은 술이 그 사람을 더 취하게 만들고, 성령에 취한 사람도 성령이 더욱 충만하게 부어주시죠.
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술에 취한 사람은 몽롱함 속에 자기 통제를 잃어버리고, 이성과 감정과 의지까지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죠.
그로인해 이해력도, 자제력도, 판단력도, 균형감각도, 모든 조절능력까지 마비가 돼서 운전도 못하게 되죠.
하지만 성령에 취하면, 성령에 충만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성령은 인격의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에 충만하면 할수록 우리의 지성이나 감성이나 의지가 더욱 각성하게 되죠.
그로 인해 우리의 내외적인 모든 영역이 활성화되고, 또한 절제력이 생기고, 그로 인해 집중력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니 술에 취하면 취할수록 사람들에게 싫어하는 소리만 해 대지만, 성령에 충만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위로 하나님과 더 깊어지고, 아래로 사람들을 이해하고 섬기는 사랑의 삶 기쁨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적용)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기초가 언어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말에서 비롯되듯, 성령충만한 사람도 그 말로 사람을 기쁘게 하고 이롭게 한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방언을 통해 소통이 장벽이 넓어지고 깊어진다면, 그 방언과 같은 말을 지혜롭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죠.
(발췌)앞서 말한 전옥표의 〈모세처럼 기도하고 여호수아처럼 실행하라〉에 나온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도에서 선교사로 일생을 바친 스탠리 존스라는 분은 89세 때 중풍으로 쓰러졌습니다.
수개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자기를 간병하는 간호사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간호사님, 내 온 몸이 마비되고 또 말을 잘 할 수 없으니, 아침에 내가 잠에서 깨어나면 이렇게 말해주세요.”
“어떤 말을 해 드리길 원하시는데요?”
“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한니 일어나라’, 바로 그렇게 말씀해주세요.”
그래서 그 간호사는 매일아침 존스 선교사의 병실에 들어오면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하고 말이죠.
존스 선교사는 그때마다 “아멘, 아멘”하고 대답을 했다고 하죠.
그렇게 한 지 얼마 후 기적처럼 스탠리 존스 선교사는 중풍에서 완전히 낫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성) 이것은 로마서 10장 9-10절의 말씀대로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일과 같습니다.
“네가 만을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을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깨달음)성령충만한 사람들은 그 말에 권세가 있음을 믿고,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며 찬양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죠.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그 말에 권세가 있음을 믿고, 오직 타인을 향해 존중하고 배려하고 칭찬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령님께서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입술을 친히 사용하셔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남이 좋은 일을 맞이했을 때에는 “집사님, 너무너무 축하해요.”하고 말하는 사람이 성령충만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남이 어려운 일을 겪을 때에는 “집사님, 힘내세요. 부족하지만 저도 기도할께요.”하고 말하는 사람이 성령충만한 사람이죠.
(예화)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렇게 결심하고 그렇게 다짐해도, 점점 영적인 민감성보다 영적인 불감증에 빠져들 때가 많죠.
그래서 영적인 불감증에서 깨어나도록 더욱더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을 모셔들이는 충만한 삶을 살아가야 하죠.
미국의 럿거스대 인류학자인 헬렌 피셔 교수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서로 만나 2년 정도가 지나면 항체가 생긴다”하고 말이죠.
처음 만나서 호감을 갖게 되면 도파민이리는 호르몬이 생기고,
사랑에 빠지게 되면 페닐에텔아민이라는 호르몬이 나오고,
껴안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엔도르핀이 분비돼 몸과 마음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다고 하죠.
그런데 어떻습니까?
2년만 지나면 도파민이든 옥시토신이든 다 날아가버리고 항체가 생겨 싫증난 남자와 싫증난 여자만 남는다고 하죠.
이것이 바로 불감증이 생기는 때로서, 어떤 호르몬의 분비도 약해진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깨달음)이것이 우리의 연약한 불감증일 텐데, 이것을 다시 회복케 하는 일이 바로 성령충만의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어떻게 다시금 타오르게 하시길 원하시는 것이겠습니까?
대부분의 운동선수가 슬럼프에 빠질 때가 있가 있는데, 그때 슬럼프를 탈출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전 세계 해비급 복싱 챔피언 조 프레이저도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싸움이 벌어지면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계획이 아니라 반사적인 움직임이다.”
“매일 새벽 로드워크 곧 체력과 다리 힘을 기르는 훈련을 성실했는가가, 그때 드러나는 것이다.”
(적용) 우리 주님은 그와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하길 원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성령충만하여 타인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 그것도 반사적인 움직임이 될 때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매번 성도들을 만날 때, 아는 분을 만날 때, 전도대상자를 만날 때, 그렇게 칭찬과 격려의 말을 서슴없이 하는 습관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것 없이 기도할때만 되뇌인다면,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평상시의 삶 속에 반사적인 움직임으로 나타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음성) 그러니 우리가 본문 말씀을 통해 깨달은 대로, 주님께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주님은 기뻗 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도 입술을 벌려 성도님들을 칭찬하고 격려하는게 입에 달라 붙지 않았어요.”
“그래도 본문 속의 120명의 사람들이 성령충만함 가운데 말을 하고 사람들을 수용하며 섬기는 모습으로 나갔어요.”
“스탠리 존스 선교사도 89세때 중풍으로 쓰러졌지만, 간호사의 말을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성령님을 의지했어요.”
“오늘 저도 다른 사람의 음성을 주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도록, 그 속에서 새 힘을 얻도록 성령님 제게 역사해 주세요.”
“오늘 저도 해비급 프레이져 선수처럼 반사적인 움직임이 제 심령과 입술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감사와 격려의 말을 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세요.”
“아무리 호감이 가고 사랑에 빠지는 호르몬이 분비돼도 2년이만 끝난다고 하니, 주님 영적인 불감증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성령님밖에 업습니다.”
“성령님, 매일매일 영적으로 민감하게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님의 감동감화 속에 순종하며 살 수 있도록, 저의 영적 불감증을 흔들어 깨워주시옵소서.”
(찬양) 성령하나님 나를 만지소서 상하고 깨어져 지친 나를
새롭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시들은 내 영혼 살리소서.
성령하나님 이 땅 고치소서 죄악의 어둠 속 헤매는 우리
태워 주소서 성령의 불로 세상 헛된 맘 태우소서.
임하소서 성령 하나님이시여 지금 이 곳에 임하소서.
바람처럼 불처럼 성령이여 임하소서.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성령충만 속에서 주님과 더 소통하고, 사람과도 더 넓고 깊게 소통킬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성령충만함 속에서 언어의 장벽이 해소되고, 우물안 개구리를 벗어나 타인을 품고 수용하며 섬기길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아무리 좋은 감정과 호르몬도 2년이면 끝난다고 하니,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불감증을 흔들어 깨우길 원하시는 분이죠.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반사신경을 깨워 더욱더 성령님과 깊이 소통하길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런 소통의 장을, 성령 하나님과 더 깊이 엮어나가듯이, 우리교회 성도들, 우리 주변 사람들과도 더 넓고 더 깊이 엮어나가길 원하는 성령님이십니다.
그때 우리의 삶에 치유의 언어가 살아날 것이고, 회복의 역사를 성령님께서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의 주인공들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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