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발췌)우병선 목사님의 〈다윗도 그랬다〉란 책에 나온 내용입니다.
투수 마리아노 리베라는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 뉴욕앙키즈를 대표하는 투수입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현역시절 그는 마흔이 넘는 나이까지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로 대우받았습니다.
미국 사람 중에 리베라를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야구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선수였습니다.
그런 리베라가 현역 시절에 뛰고 있을 때, 한국의 어느 스포츠 언론 기자가 직접 인터뷰하러 미국으로 간 적이 있습니다.
그 기자가 리베라를 만나려고 라커룸에 갔는데, 곧장 인터뷰를 하지 못했죠.
왜냐하면 그가 성경을 읽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서야 인터뷰를 하게 됐는데, 그 내용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좀전까지도 성경을 읽고 있던 리베라를 본 그 한국기자가 매 경기 시작전마다 그렇게 성경을 읽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리베라는 경기가 있는 날이면 매 시작 전에 읽는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루에 몇 번이나 읽냐고 묻자, 리베라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읽는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어지는 본격적인 질문에도 리베라의 대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경기의 위기때마다 마운드에 올라 타자들과 상대를 해서 대부분 승리를 거두는데, 어떤 마음으로 던지냐고 물었죠.
그때 리베라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내 힘으로 타자들을 상대한 적이 없어요.”
“마운드 위에서 공을 던질 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마음으로 던집니다.”
“나는 단지 매일 기도하며 성경을 읽을 뿐이예요.”
우리가 같으면 “와우, 대단하네요”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한국의 스포츠 기자가 리베라를 인터뷰한 것은 뭔가 야구의 기술적인 면을 취재하고자 한 것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리베라는 종교적인 대답만 할 뿐이라, 실망감에 휩싸였죠.
그래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다시 물었습니다.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은 당신을 양키즈의 ‘수호신’이라고 부르는데, 본인은 그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리베라는 아주 분명하고 단호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신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저의 신은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 분입니다.”
색다른 대답을 기대했던 그 한국 스포츠 기자는 더이상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어서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신앙심이 매우 깊은 것 같은데, 언제부터 종교생활을 했습니까?”
그러자 리베라는 20살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대답을 했는데, 그 다음 대답이 너무나 멋집니다.
“당시에는 어린 나이였지만 야구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때부터 깨달았습니다.”
(깨달음) 어떻습니까?
우리나라 스포츠 기자가 미국까지 날아가 리베라를 인터뷰하고자 했다면, 뭔가 의미심장한 걸 듣고자 하지 않았겠습니까?
공을 던질 때 투구자세라든지? 스트라이나 변화구는 어떻게 던지는지? 또 웨이트 트레이닝은 평소 어떻게 하는지?
그런데 난데없이 성경을 읽는다고, 기도를 한다고, 하는 대답을 들었으니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죠.
리베라 선수가 수많은 시합의 중압감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공을 잘 던져서 가능한 게 아니라는 걸 말이죠.
매일 그가 말씀묵상을 통해 만나고자 하는 그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 주신다는 걸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밖에 할 수 없는 것, 그 분을 의지하면서 공을 던진다는 것을, 공개한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리베라 선수는 마무리 투수가 보직입니다.
매 경기 막판에 등장해 그 스코어를 방어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공 하나 잘못 던지면 완전히 판세가 뒤집히고, 모든 책임을 홀로 뒤집어써야 하는 위치죠.
마무리 투수는 매 경기마다 마운드에 오를 수도 있고, 이틀이나 삼일에 한 번 오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경기가 어떻게 흘러가냐에 따라 5분대기조처럼 항상 대기해야 하는 선수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마운드에 매번 올랐을 때, 그가 어떻게 기도을 했을지 우리는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이제 제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승패를 떠나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 공을 던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해 주시옵소서.”
“전능하신 하나님, 저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면서 마무리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져, 끝내 승리했을 때 그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 모든 영광과 감사를 하나님 아버지께 돌리지 않았겠습니까?
매 순간순간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면 자신은 공을 던질 수도, 이길 수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때문이죠.
(적용)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의 내가 존재하기까지, 내 인생의 뒤안길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게 없다고 했죠.
똑같이 저수지에 수영을 하는데 왜 그는 데려감을 당하고 나는 살아남게 되었는가?
똑같이 동기동창생으로 공부를 했는데 왜 그는 벌써 저 세상으로 떠났고 나는 살아남게 되었는가?
똑같이 사고의 현장 속에 있었는데 왜 그는 데려감을 당하고 나만 홀로 살아남게 되었는가?
똑같이 그 일을 풀어나가는데 왜 그는 그 절벽 앞에서 포기하고 나만 홀로 그 절벽을 넘어서게 되었는가?
그것은 내가 잘 나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데려감을 당할 수도 있었는데 그 친구가 나를 대신해 데려감을 당했기에 나는 살아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동기동창생인 그 친구가 나를 대신해 대려감을 당했기에 나는 그를 대신해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거대한 태산과도 같은 그 일 앞에서 그가 포기했기에 내가 그를 대신해 그 태산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내 인생의 뒤안길을 돌이켜볼 때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게 하나도 없다는 고백할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입니다.
그런 은혜를 떠올릴 때마다 어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와 감격의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맥추감사주일인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에서 40년 넘게 종살이하며 고된 노역 속에 살았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며 전능하신 하나님께 통곡하며 간구했죠.
이를테면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던 2천년 전에도 모든 유대 백성들이 그들을 해방시켜줄 메시아를 고대한 것처럼 말이죠.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애굽에서 해방시켜 줄 것을 고대했죠.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아 그들을 해방시켜주고자 했죠.
모세는 애굽의 궁중에서 40년 제왕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교만을 꺾기 위해 40년간 미디안 광야의 양치기로 빚으셨죠.
그래서 나이 80살이 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준비를 하셨죠.
하나님께서는 그 모세로 하여금 아론과 함께 애굽의 파라오에게 맞서 나아가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이 땅에서 내 보내 광야에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도록 내 보내길 원하신다고 말이죠.
그러나 파라오는 그 하나님이 누구관대, 내가 너희를 보낸단 말이야, 하면서 콧방귀도 꾸지 않았죠.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파라오에게 10가지 재앙을 언급하셨죠.
최초 나일강물이 피로 변하는 피 재앙부터, 개구리, 이, 파리,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장자의 죽음에 이르는 10가지 재앙을 보내셨죠.
그때마다 애굽의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겠다고 했지만, 그 재앙이 멈추기만 하면 마음이 돌연 바뀌어버렸죠.
유대문헌 ‘미슈나’에서는 그 재앙이 적어도 1년 가까이 계속됐다고 하지만, 제가 조사한 바에는 6개월 정도 걸렸습니다.
그런데 그 6개월간도 길지 않습니까?
그 6개월은 재앙을 각종 전염병을 당하는 애굽의 백성들 입장에서도 죽을 맛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속히 애굽을 빠져나가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도 기다리기 쉽지 않는 기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기간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섭리의 기간이었습니다.
6개월이 되던 어느 날 마지막 10번째 재앙이 임하기 시작했죠.
애굽 전역의 모든 장자를 그날 밤 하나님께서 치셨고, 모든 짐승의 초태생도 그날 밤 죽음으로 치셨습니다.
그러자 애굽 전역에 통곡과 슬픔이 온 땅을 지배했죠.
하지만 애굽의 고센 땅 곧 가나안 땅과 가까운 그 근방지역에는 그 어떤 죽음의 재앙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날 고센 땅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좌우인방에 바르게 하셨죠.
그 피를 볼 때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심판을 넘어가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죠.
3,50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잡았던 그 양의 피, 그 피를 문설주와 좌우인방에 발랐던 그 피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피입니다.
그 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음으로부터 대속을 받았고, 날이 새자마자 파라오는 당장 애굽을 떠나라고 말했죠.
그때 모세는 남자 장정만 60만명, 여자와 아이들까지 250만명이 넘는 그들을 데리고 애굽을 빠져나가 홍해앞에 다다랐죠.
그런데 또 마음이 바뀐 파라오는 최정예부대를 동원해 도망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해 붙잡도록 했죠.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이가 2,000km가 넘고 폭이 300km가 넘는 홍해 바다 앞에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 누구보다도 괴로워할 사람이 누구였겠습니까?
250만명을 이끌고 애굽에서 빠져나온 모세였죠.
영화 〈엑소더스:신들과 왕들〉에서도 모세가 모래 바닥에 주저앉아 이러지도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죠.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를 향해 또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하죠.
“괜히 애굽에 잘 살고 있는 우리를 이곳에 끌어내서, 이 홍해 바다 앞에서 죽게 만드는 구나.”
그러자 모세는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시오.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위해 싸울 것이니 여러분은 가만히 있으시오.”
그렇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옥신각신하는데, 모세는 그래도 더 답답하여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했죠.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출14:15-18)
그 말씀과 더불어 모세가 홍해바다를 향해 회초리와 같은 지팡이를 내밀었을 때, 홍해가 갈라졌죠.
그리고 바다가 좌우의 벽이 되고, 모든 물이 말라 마른 땅처럼 변했을 때, 그때 250만 명이 넘는 그 백성들이 건너갔죠.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는 그 곳에는 환한 빛이 비추고 있었지만, 뒤쫓아 오는 애굽 병사들은 어둠 때문에 갈수가 없었죠.
이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홍해를 건넜을 때, 드디어 그 좌우의 물벽이 하나로 합쳐져 애굽 병사가 물에 몰살되었죠.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본문) 오늘 읽은 본문은 바로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하나님의 그 인자하심 앞에 감사의 고백을 드리는 시입니다.
본문 10-15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을 그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깨달음)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400년간 애굽에 종살이하다가 유월절을 맞이해 애굽에서 빠져나도록 애굽 전역의 장자를 치신 그 일을 말하는 것이죠.
또 이스라엘을 애굽백성중에서 인도해내신 이,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선포하죠.
그 뿐만이 아닙니다.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이스라엘을 그 홍해 가운데로 통과하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다 건넜을 때, 드디어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몰살시킨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선포하죠.
(원해) 그런데 홍해를 ‘가르다’는 히브리어 ‘가자르’(גָּזַר)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자르’는 우리말로 ‘자르다’(to cut), ‘나누다’(divide), ‘멸절시키다’(to be destroyed)는 뜻입니다.
솔로몬이 살아 있는 아이를 놓고 두 엄마가 자기 아이라 할 때 둘로 쪼개라고 할 때(왕상3:25), 사용된 단어죠.
엘리사가 선지자의 생도들이 머물 신학교를 짓고자 나무를 벨 때(왕하6:3), 바로 그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또한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우리의 양과 외양간에 소가 없을 때(합3:17)도 그 단어가 사용됐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단어입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이 세상 일을 권위자인 하나님만이 쪼개고, 베고, 멸절시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홍해의 폭이 넓은 곳은 300km요 아무리 좁아도 32km가 달하는데, 그 모든 생물을 집어삼킬만한 홍해라도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가르시고 좌우의 벽이 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얼마나 경이로운 장관이겠습니까?
그것은, 저도 한 번 가봤지만, 진도군 고군면 금계리에 있는 ‘신비의 바닷길’은 자연현상이 빚어지는 바닷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갔던 그 홍해의 바닷길은 하나님께서 만들어내신 초자연적인 길입니다.
그것은 마치 미국 메이저리그 양키즈의 전설적인 투수 리베라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역사와 동일한 것 아니겠습니까?
매번 마무리투수로 마운드에 오르지만, 자기 힘으로는 이길수 없기에 오직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도록 기도하며 나아가는 그를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 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문)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 주님은 우리 인생에 놓인 홍해 바다의 상황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점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친히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낸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여 경배받고자 하시는 분도 하나님아니시겠느냐?”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유월절의 은혜를 맛보게 해주셨다면, 홍해앞에서도 놀라운 은혜를 베풀지 않겠느냐?”
“뉴욕 양키즈의 리베라 선수에게도 매 경기때마다 하나님을 붙잡고 나가는 그에게 승리를 안겨준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지금 너의 인생 앞길에도 커다한 홍해바다가 가로막고 있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더욱 큰 장애물이 너를 가로막고 있을지라도, 이전에 승리하게 해 주신 그 하나님을 붙잡고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
“애굽에서 꺼내주신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경배받고자 하신다면 그들에게 새 길을 열어주지 않겠느냐?”
“리베라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맡길때마다 승리의 길을 열어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너의 홍해 앞길도 친히 열어주고자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바라보며, 잠잠히 그 분의 뜻을 구하며, 그 분만을 의지하며 나아갔으면 좋겠구나.”
(찬양)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란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됨 알찌어다 열방과 세계 가운데 주가 높임을 받으리라
사랑합니다 내 아버지 찬양합니다 내 온맘 다하여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전개)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그 위대하심 앞에 ‘감사하라’고 선포합니다.
오늘 읽은 10절에서 15절까지 반복적으로 나온 단어가 바로 ‘감사하라’입니다.
왜냐하면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그들을 건져내신 그 일이 한 번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그들을 홍해에서 건져내 주신 그 역사가 한 번으로 그치는 게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도 없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들은 우리 인생에도, 수도 없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우리 자신이 의식할 수 있고,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에 수도 없이 그런 역사를 베풀어주신 분이시죠.
그러니 우리 자신들도 그 인자하심, 곧 그 헤쎄드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사는 것은 당연한 거죠.
자식이 부모에게 적은 일에 감사를 하면, 그 부모는 더욱 큰 것을 베풀고 싶어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죠.
부모와 자식만 그런 아니라 직장도, 일터도, 이 세상 모든 사회적인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치 아니겠습니까?
우리와 하나님 사이는 거래의 관계가 아니라 신뢰의 관계 곧 인격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것은 큰 일을 베푸실 때만 아니라 인생의 고비나 황혼 때도 감사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예화)세계적인 MD 앤더슨 암센터 암 전문의인 김의신 박사는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똑같이 암에 걸려도 암을 대하는 태도는 환자마다 천지 차이라고 말이죠.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그때부터 초상집에 빠지는 듯한 환자가 있는가 하면,
반면에 삶과 죽음은 하나님께서 결정한다고 믿는 환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자보다 후자는 암을 생각보다 초연하게 받아들이고, 하던 일도 묵묵히 해 낸다고 합니다.
더욱이 후자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어떤 상황도 담대하게 극복해가면서 천국을 소망한다고 하죠.
그러니 그의 인생 앞에 어떤 일이 펼쳐져도, 어떤 암울한 상황이 펼쳐져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2018년 2월 99세로 소천한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개신교계의 교황으로 불릴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펼친 분입니다. 1973년 5월에는 여의도광장에서 110만 명의 대한민국 사람들 앞에서 천국복음을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그분이 1998년 캘리포니아 몬터레이에서 열린 TED의 강연자로 나선 적이 있었습니다.
TED란 Technology(기술), Entertainment(오락), Design(디자인) 의 약자로 뛰어난 연사들을 초청해 개최하는 국제규모의 강연회죠.
바로 그 강연회에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강연자로 나선 것이었습니다.
그때가 그의 나이 80세 때 일이었습니다.
그는 강연 중에 자신의 양다리에 정맥염이 있고, 누군가 부축해 주지 않으면 일어서기 힘든 파킨슨병을 앓고 있고,
그리고 차마 말할 수 없는 몇가지의 질병도 안고 있다고 그 자리에서 고백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불편한 그런 육체를 안고 있어도 그 강연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천국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론 그때의 강연은 유명한 일반 강연자들이 큰 호응을 얻고 난 뒤라, 상당히 어색한 상황이 연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담담하게 27분 동안 그가 준비한 강연을 모두 풀어놓았습니다.
처음에는 초라해보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강연은 이전의 강연자들보다 더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이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저는 17세까지 노스캐롤라이나 농장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아침마다 소젖을 짰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매일 저녁 똑같은 소의 젖을 짜야 했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있는 소는 20마리였고, 농장에서 일하면서도 공부를 계속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고등학교 성적이 좋지 못했습니다.
대학에서도 어떤 일이 제 마음에 일어나기 전까지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마주했습니다.
그 분이 제게 찾아와 말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어떻습니까? 상상이 가십니까?
“나는 모든 진리의 화신이다”, 하는 그 분의 말씀 말입니다.
저는, 그분이 거짓말쟁이거나, 미쳤거나, 아니면 그 분이 주장하는 그대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짧은 시간이지만, 도대체 어느 쪽인지, 결정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저는 증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실험실로 가져가서, 그 분이 진리의 화신인지, 실험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네,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제 마음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분이 제 삶을 바꿔 놓았습니다.
이제는 그 분이 부르시면 언제라도 그 분이 계신 곳으로 갈 준비가 돼 있습니다.
(깨달음)어떻습니까?
기독교계의 교황으로 불릴 정도로 엄청난 그분도, 나이 80이 되니까 온갖 질병 앞에 무기력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분은 그때까지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고, 죽기 직전까지도 감사하며 살았던 분입니다.
왜요?
17살에 자기 인생에 찾아와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평생 자신과 동행해주시는 헤쎄드의 은혜를 다함없이 베풀어주셨음을 믿기 때문이었죠.
그렇기에 양다리에 정맥염을 앓고 있고, 누군가 부축해주지 않으면 설 수 없는 파킨슨병을 앓고 있고,
남에게 밝힐 수 없는 여러 가지 질병을 안고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죽음의 그 순간까지도 감사하며 살았던 것 아니겠습니까?
왜요?
이 세상에 크고 작은 일을 겪었어도, 때로는 기쁘고 즐거운 일을 맞았고, 때로는 힘에 겨운 일도 겪었지만,
가장 소중한 천국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 수 있게 해 주신 그 은혜 때문이죠.
(내음성)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실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도 감사하는 마음을 늘 잊지 않고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죽을 수밖에 없는 저에게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하나님 자녀로 삼아주신 것 감사해요.”
“이 땅에서 황홀한 일을 겪어도,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맞아도, 영원한 천국의 삶에 비길 수가 있을까요?”
“아무리 애굽에서 잘 먹고 잘 살아도 죄와 사망의 가득찬 그곳을 어찌 가나안땅과 비교할 수가 있겠어요?”
“아무리 이 땅에 좋아도 영원한 천국에 비길 수 없사오니, 저를 영생의 자녀로 삼아주심 주님께 더욱 감사하며 살게 해 주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홍해로 인도하시고, 광야 40년간 끊임없는 헤쎄드의 은혜로 품어주신 것을 제가 알아요.”
“제 인생의 뒤안길도 제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그 헤쎄드의 은혜로 저를 품어주신 것을 제가 알고 있어요.”
“주님. 2021년 전반부도 헤쎄드의 은혜를 품어주시고 세워주셨사오니, 2021년 남은 삶도 그 은혜로 이끌어주세요.”
“지금 당장 내 손에 잡힌 게 없고, 내 눈에 만족스러운 게 없어도, 살아 있는 것 자체에, 천국백성을 삼아주신 것 자체에 감사하며 살게 해 주세요..”
“사소한 것 하나 하나를 행복으로 여기며, 주님께 더욱더 감사하며 사는 남은 한 해가 되게 해주세요.”
(찬양)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눈물 날 일 많지만 기도할 수 있는 것 억울한 일 많으나 주를 위해 참는 것
비록 짧은 작은 삶 주 뜻대로 사는 것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이것이 행복 행복이라오 세상은 알 수 없는 하나님 선물
이것이 행복 행복이라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행복이라오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2021년 전반기 감사의 날, 맥추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이요, 우리 손에 뭔가 잡힌 게 없고 우리 눈에 만족스러운 게 없어도,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지 않습니까?
왜요?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그 무엇보다도 영원한 천국에서 눈을 뜰 수 있는 그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께서 나의 죄와 사망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말입니다.우리 인생 뒤안길에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품어주시고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고, 홍해를 갈라 통과케 하시고, 광야 40년간 인도하신 분이 그 하나님 아닙니까?
그 하나님께서 2021년 전반기 우리 인생을 품어주신 것처럼, 2021년 하반기에도 더 크신 은혜로 품어주시고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매 순간순간 감사가 넘쳐나는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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