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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아울러 ‘우리의 아버지’이시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언제나 미쁘신 분, 곧 신실하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어떤 절망적인 상황속에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에서 담대하게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이유가 있죠.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심 말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헬라어 원문에 ‘데’(δέ) 곧 ‘이제’라는 부사가 빠져 있습니다. ‘이제 내가 본론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인사말이었고, 이제 본론에 들어가는 것이죠. 그리고 내가 권한다는 헬라어 원어는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입니다. 그 단어가 맨 먼저 나와 있는데, 그 뜻은 ‘간청한다’ 곧 ‘호소한다’(appeal)는 의미죠.
사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이유는 고린도교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을 질책하기 위함 아닙니까? 그래서 서두에서 격조 높은 인사와 감사의 안부를 전했다면 이제 본론에 들어가서는 따끔하게 질책할 수 있었겠죠. 하지만 바울은 본론에 들어가서도 ‘호소한다’고 말을 합니다. 바울의 겸손함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개인의 인격으로 간청하고 호소한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과 인격으로 간청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간청 내용이 무엇입니까? “같은 말을 하고,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합하라.”하는 것이죠. ‘분쟁’이란 말은 ‘스키스마’(σχίσμα)인데 실은 ‘분열’(division)을 뜻하는 말입니다. ‘분쟁’은 말로 싸우는 것이고 ‘분열’은 나뉜 상태를 말하는 것이죠.
그렇게 분열하지 말고, 같은 마음으로 온전히 합하라는 뜻이 무엇일까요? 각 개인의 인격과 개성을 존중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합하라’하는 헬라어 단어 ‘카타르티죠’(καταρτίζω)는 여러 부품들을 잘 관리해서 제대로 작동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자동타의 보닛을 열면 여러 부품들이 나오죠. 그 모양과 기능이 다 다르지만, 그것들 모두가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죠. 주인이 원하는 대로 자동차가 잘 굴러가는 것 말입니다. 바로 그런 마음과 자세로 교인들의 개성과 인격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합하라’는 ‘카타르티죠’는 ‘수선하다’는 뜻입니다. 이른바 갈릴리의 제자들이 그물을 ‘수선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만큼 누군가의 약함을 보완해주고 함께 꿰매어줄 줄 아는 그런 마음과 자세로 합하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무엇을 수선하라고 간청하는 것이겠습니까? 신앙을 수선하라는 것이겠죠. 나 중심의 신앙관을 탈피하라는 것, ‘나의 아버지’를 뛰어넘어 ‘우리의 아버지’로 나아가라는 것이죠. 나라는 우물에서 탈피해서 세계를 품는 그릇으로 말이죠.
11절 말씀입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글로에의 집 편’이란 글로에라는 사람의 혈육인지 아니면 그 집의 종인지는 모르지만 그에게서 온 사람으로부터 바울이 에베소에서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들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고린도교회는 그리스에 있고 바울은 에베소에 앉아 있는데, 그 소식이 그 먼 곳까지 날라 온 것이죠. 그 소식이 무엇입니까?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입니다. ‘분쟁’이란 좀전에 말한 ‘스키스마’가 아니라 ‘에리스’(ἔρις)입니다. 이것이 바로 ‘싸움’(strife)입니다. 찢겨 질대로 찢겨진 다음에 서로 말다툼을 하는 상태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12절에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파당이 생긴 것이죠. 나는 ‘바울파다’, 어떤 사람은 ‘나는 아볼로 파다’하는 상황입니다. 아볼로는 사도행전 18장에 나오는 인물이죠. 바울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데리고 에베소에 데려가서 그곳에 놔두고 예루살렘에 왔죠. 그런데 그 부부에게서 복음을 들은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대학자가 바로 아볼로였고, 그가 두 부부에게 복음을 들은 뒤에 고린도로 가서 성경교사요 교회의 리더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아볼로를 추종하는 파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나는 게바파다’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게바는 베드로죠. 그러면 ‘나는 베드로파다’하면 되겠죠. 하지만 굳이 ‘게바’하는 이유가 뭡니까? 철저하게 유대인 의식과 관점을 강조한 이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네 번째는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때로 신앙 공동체 안에 여러 성경교사나 여러 지도자들이 있을 수 있죠. 그럴 때 개개인의 영적 수준과 배경에 따라 자기가 더 선호하는 선생과 지도자가 있을 수 있죠. 하지만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전부 ‘나는’ ‘나는’ ‘나는’, ‘나는’하고 분쟁을 일삼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세력 확장을 위해서 말이죠.
그래서 바울이 13절에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하는 말은 그리스도가 여러 조각으로 나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들이 내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적 있더냐, 하고 말하죠. 그러면서 14절에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바울은 그리스도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왜죠? 15절에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만약 바울한테 세례 받은 이들이 많았다면 그것이 의도치 않게 파당을 세우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리스보’는 누구일까요? 그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갔을 때 회당장으로 있던 사람입니다.그리고 ‘가이오’는 로마서 16장 23절에 나오는 사람으로, 바울이 로마에 갔을 때 그의 집에 머문 것이죠. 집주인이었습니다. 그 두 사람 외에는 세례를 주지 않은 게,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6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좀 전에는 그리스보와 가이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했는데, 또 한 사람 곧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게 구별할까요? 앞에 말한 두 사람은 고린도의 사람들이고, 스데바나는 고린도전서 16장 16절을 보면 “아가야의 첫 열매”라고 밝혀는데,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스데바나가 그 곁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 세 사람 외에 세례를 주지 않았음을 강조합니다. 왜요? 이때는 주님을 믿는 초기 시절로서 교회가 제도화되기 전이죠. 목사나 성직자가 세례를 준 것이 아니죠. 아무나 세례를 주던 시절이죠. 그래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면서 자기 제자와 자기 파당을 세우던 때였습니다. 세례를 통해 자기를 사유화하던 시대였던 것이죠. 바울이 지금 그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을 통해 바울이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나더러 세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바울이 세례를 폄하하거나 세례의 의미를 과소평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바울은 이 말을 통해서 세례의 본질을 강조하는 것이죠. 세례는 파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주님의 제자를 삼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본질이라고 말이죠. 그를 위해 바울도 베드로도 아볼로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주님의 도구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나는 바울파다, 아볼로파다, 게바파다, 그리스도파’다 하면서 말의 지혜에만 앞섰을 뿐 복음을 삶으로 살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복음으로 사는 게 무엇입니까? 나를 부인하고 주님을 쫓는 삶이죠. 그 삶을 살면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법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말의 지혜나 지식적으로만 정보를 습득하는 게 아니라 맛보아 아는 것, 다시 말해 삶으로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오늘도 그런 삶을 위해 저와 여러분들을 주님의 도구로 부르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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