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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읽은 3절 말씀이 이렇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린도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인사말에 해당하는 말씀이죠.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칭한 표현은 구약에 나와 있습니다. 시편 68편 5절에,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또 이사야 9장 6절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 왠지 친근감이 있고 더 다정다감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표현하면 어떨까요? ‘우리 하나님’이라고 호칭한 사람은 이사야 선지자가 처음입니다. 이사야 63장 16절에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찌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또 이사야 64장 8절에,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그렇게 ‘우리 아버지’라고 부른 이후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불렀죠. 주님께서 가르쳐 준 기도를 통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하고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그렇게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마태나 마가나 누가나 요한도 전혀 그렇게 부른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예수님 이후에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른 유일한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와 데살로니가전서를 비롯해 무려 12번에 걸쳐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1대 1일의 관계를 맺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죠. 하나님과 나와 일대일 관계가 맺지 않으면 우리 신앙은 추상적으로 흘러가 버립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이란 고백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이 나의 하나님으로만 흘러가면 그 신앙은 기복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런 경우 나의 하나님과 저 사람의 하나님이 다르게 되죠. 서로 이해가 상충하게 되면 하나님이란 이름으로 서로 싸우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이라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일깨워주셨던 것이죠. 바울은 바로 그런 의미를 깊이 터득한 사람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바울이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른 더 깊은 의도가 있는 것 아니었겠습니까?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고린도교회 내에 음행의 문제, 파벌의 문제, 은사 문제, 그리고 제사음식의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놓고 내가 옳다, 네가 옳다, 하나님은 내 편이다, 하나님은 네 편이 아니다, 하는 식의 다툼이 벌어졌기에, 더더욱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라고, 고린도교회 공동체 모두를 위한 하나님이라고 더 강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감사하다’고 인사말을 전합니다. 결코 쉬운 게 아니죠. 사실 고린도전서를 쓴 이유는 교회가 세속화되고, 여러 가지 다툼과 분열이 있어서 책망하려고 쓴 것이죠. 그런데 책망과 질책의 편지를 쓰는 첫 머리의 1-3절 다음으로 4절에서 ‘감사한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무슨 마음을 엿보게 됩니까? 사도 바울의 아버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죠. 만약 바울이 1-3절을 끝내고, 4절부터 야단을 치기 시작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자식과 같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더욱 감정만 상하게 되겠죠. 그래서 바울은 저들이 지금은 다투고 있지만, 어찌됐든 주님을 따라 살려고 애를 쓴 부분을 격려하면서 ‘감사하다’고 쓴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감사하다고 한 구체적인 내용이 그 다음부터 이어지고 있습니다. 5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고린도교인들에게 베푼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다고 하는데, 그 첫 번째가 ‘풍부하므로’입니다. 무엇에 풍족해졌다는 것입니까? 구변과 지식이죠. 여기에서 ‘구변’이란 ‘입심’이나 ‘말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고스’ 곧 하나님의 말씀에 부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바울이 감사한 이유가 6절에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그리스도의 증거란 복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그들 사이에 견고하게 된 것으로 인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저도 제가 전하는 복음 안에서 누군가의 신앙이 더 깊어지고 견고하게 되는 것을 볼 때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세 번째 감사하다고 한 이유는 7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은사에 부족함이 없어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은사’란 성령의 은사 곧 방언이나 예언 같은 은사가 아니라 구원과 관련된 모든 은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지금 은사 문제로 다투고 있지만 본질적인 구원의 은사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그래도 감사하다는 뜻입니다.
네 번째 감사의 이유가 7절 후반절에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이른바 주님의 재림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언젠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믿을 때에 그렇죠. 바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기다림’이라고 곧 현재형으로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의 감사 이유는 8절입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이 말씀은 미래형입니다. 처음에는 과거형, 그 다음에는 현재형, 그리고 이번에는 미래형입니다. 너희들이 잘 못하고 있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오시는 날, 그 심판의 날에는 하나님께서 견고하게 해 줄 것을 믿으면서 감사한 것입니다. 마찬가지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내 생각과 딴 길을 걷는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들이 있다면, 어떻게 그를 사랑하며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죠. 지금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그런 소망을 품고 감사한 것이죠.
이처럼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잘못하고 있음에도 하나님께서 세워 줄 것을 믿기 때문에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의 과대망상이겠습니까? 바울이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9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미쁘신 분이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미쁘시다’ 이 말은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을 바로 세워주신 그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기에 비록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하고 있을지라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언젠가 바로 세워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도 주님과 교제할 정도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교제’란 헬라어로 ‘코이노니아’인데 그것은 ‘코이노노스’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곧 ‘동역자’ 또는 ‘반려자’란 뜻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예수님의 동역자로 세워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나를 구원해 주신 ‘나의 아버지’이심과 함께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기억하며 살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지금 회복될 가능성이 없는 것 같고 다투고 있어서 실망감이 든다 해도,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우리 아버지’를 바라볼 때 신실하신 아버지를 바라볼 때 그 모든 상황속에서도 감사하며 살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미쁘신 은혜 곧 신실하신 은혜가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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