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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고린도전서

십자가의 도(고전1:18-31)

by 똑똑이채널 2024.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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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나는 바울파다, 아볼로파다, 게바파다, 그리스도파’다 하면서 말의 지혜에만 앞섰을 뿐, 복음을 삶으로 살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라고 했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주님의 도구로 부르신 이유는 복음을 삶으로 사는 증인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십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십자가의 도’에 대한 중요성을 언급하는 말씀입니다. 18절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여기에서 ‘십자가의 도’는 헬라어로 ‘로고스’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을 뜻하는 것이죠. 바울이 17절에서 ‘복음’이라 했는데, 그것을 18절에서 ‘십자가의 말씀’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해서 보이셨던 그 놀라운 복음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구원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이죠. 물론 지금도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은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걸로 생각하죠.

이것은 19절에서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폐하시고, 총명 있는 자들의 총명을 폐한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자기 지혜와 자기 총명만 의지한 채 하나님을 부정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폐하시고 멸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20-21절 말씀을 통해 묻고 답을 하죠.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우리말은 ‘어디 있느뇨?’가 뒤에 나오지만 헬라어 원문은 그게 맨 앞에 나오고 있습니다. “어디 있느뇨? 지혜가 대체, 어디 있느냐? 똑똑하다는 사람이, 어디 있느뇨? 똑똑한 논객이”하는 말이죠. 바꿔 말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제외하고 하나님과 맞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왜죠? 유한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과 맞설 수 없기 때문이죠. 인간은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 미련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21절에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세상의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길이 없기에,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을 얻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 새번역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리석은 선포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하고 번역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복음의 선포를 통해 주님을 믿게 하신다는 뜻이죠.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들도 복음을 선포하는 증인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게 증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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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2절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여기에서 ‘표적’을 칭하는 헬라어 ‘세메이온’(σημεῖον)은 ‘표적들’을 뜻하는 복수입니다. 그와 같은 표적들을 유대인들은 거듭거듭 간청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맛보아 아는 체험은 중요합니다. 내가 병들었을 때 병이 낫고, 기도했을 때 어떤 문제가 해결되는 체험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성경 속 전설이 아니라 내 삶 속에 오늘도 현존하시는 분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런 체험을 한 다음이 더 중요합니다. 표적이나 기적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형성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자꾸 표적이나 기적만을 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성숙한 신앙인으로 발돋움할 수가 없죠. 예수님께서도 도마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그만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르게 형성되면 보이지 않아도 다 믿을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헬라 사람들은 무엇을 찾는다고 말합니까? 지혜죠. 데’, 이게 ‘제테오’(ζητέω)인데 ‘발견하기 위해 끝가지 찾아낸다’(to seek in order to find)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란 인간의 이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이성과 자기 지혜가 모든 것을 대변한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지혜가 자리할 틈이 없는 것이죠. 그처럼 유대인들은 기적에 걸신이 들려 있고, 헬라인들은 자기 이성과 지혜만을 신봉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23-24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유대인들에게는 꺼리는 것이 되었습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라.”하고 여긴 까닭이죠. 율법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은 저주받은 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다들 예수님을 꺼려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 곧 헬라인들은 집요하게 이성적인 것을 찾았으니 그들이 보기에 십자가 사건은 미련하게 보인 것이었죠.

하지만 25절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바울은 지금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어리석게 보여도 사람보다는 지혜롭고, 사람보다는 훨씬 강하다고 말이죠. 왜죠? 바울은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저주 받으셨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죠. 이른바 우리 자신이 율법 아래에서 저주받아야 할 그 저주를 예수님께서 친히 대신 받아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고, 십자가의 도를 드러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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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바울은 인간에게 진정한 자랑거리가 무엇인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26절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바울은 육신의 눈으로 뭘 보라는 게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심사숙고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라고 하죠. 뭔가 잘 나서, 자격이 있거나 공로가 있어서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님을 말입니다. 여기에서 “육체를 따라”할 때 ‘육체’는 ‘싸르크스’(σάρξ)입니다. 몸을 뜻하는 말이지만 하나님과 대비되는 죄로 더렵혀진 인간 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하는 것은 세상의 자기 지혜나 학벌이나 유력과 권세가 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27-28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선택에 관한 한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속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은 자기에게 소망을 두지 않는 자를 세우신다는 것이죠. 자기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 자체가 모독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30-31절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내가 드러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과 인격과 지혜만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없는 죄인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속받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나의 지성이나 나의 직위나 가문이 아니라, 오직 주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이 주는 영적인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어떤 경우에도 자랑하거나 대립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것’이죠. 일차적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왜 그렇게 다투고 분열하냐? 너희들이 잘 나서 구원받은 것이냐? 너희들이 누리는 의나 거룩함이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것 아니냐? 하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그런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을 때에만 다툼이나 교만함 없이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십자가의 도를 베풀어주셔서 구원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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