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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비수처럼 찾아옵니다. 예고 없는 죽음 앞에 우리의 지성도, 소유도, 가문도, 그 어떤 것도 자랑할 게 없죠. 그날 그 죽음을 막아 낼 줄 방패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진 게 많으면 많을수록 죽음은 더 허무할 뿐이죠. 그날 죽음을 뛰어넘게 해 주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만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 내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2장 마지막 절을 통해 너희들이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하면서 세력을 과시하면서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진정으로 자랑하고 싶으면,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주님만 바라본다면, 주님을 자랑하려고 한다면, 결코 자기 자신들을 자랑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구원과 생명에 관한 한 주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자랑할 게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린도전서가 시작된 이래 네 번째 ‘형제들아’하고 부르고 있습니다. 파벌에 대해서 책망하지만, 한 번 큰 호흡으로 가다듬고자 그렇게 ‘형제들아’하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우리가 때로 화를 낼 수 있지만, 그 중간에 그리스도 앞에서 한 번 호흡을 가다듬어야 하죠. 그래야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지 않을 수 있게 되죠.
그렇게 ‘형제들아’하고 부르면서 무엇을 말합니까?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라고 말하죠. 과연 그때가 언제입니까? 2차 전도여행 때, 그때 1년 반 동안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했던, 바로 그때를 회상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때 ‘하나님의 증거를 전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증거’라는 헬라어 단어는 ‘마르튀리온’(μαρτύριον)인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은 하나님께 저주 받은 것이라고 기록돼 있고, 유대인들은 그 말씀 때문에 예수님을 저주받은 자라고 칭한다고 했죠. 또 헬라인들은 지식을 추구하는 자들이기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미련스럽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대속이 없었던들 어찌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었겠냐고 하면서, 바울은 그것이 비밀이요 놀라운 신비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 신비를 전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하지 아니했다’고 하죠. 그것은 바울이 거친 말로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보다 더 탁월한 수사학자가 없고 언변술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신비로운 주님의 구원을 전할 때 자기 말과 자기 지혜의 탁월함을 내세우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왜죠? 하나님의 신비와 비밀을 이용해 자기 자랑을 늘어놓으면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경우 본말이 전도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바울이 지금 그렇게 말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고린도 교인들은 주님을 만나고 신비로운 구원을 체험하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 주님은 뒷전에 밀려나 있고, 오히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이용해 자신들을 자랑하는데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죠. 내 도가 맞고, 내 파가 맞다고, 내세우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러니 너희들도 본말이 전도돼서는 안된다는 뜻이죠.
본문 2절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너희 중에서” 하는 말은 ‘너희와 함께 있을 때’라는 뜻입니다. 너희와 함께 고린도에 있을 그 때를 가리키는 것이죠. 바로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자기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하는 것이죠. 여기에서 ‘알다’는 단어는 ‘보다’는 의미로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말이 세상의 신문이나 뉴스도 쳐다보지 않는다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 되겠죠. 그 말은 내가 세상의 신문을 쳐다보고, 세상 돌아가는 상황도 파악하지만, 자기 삶의 1순위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는 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을 살리는 것은 인간의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죠. 한 인생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에 있기 때문이죠. 모순덩어리처럼 보이고 세상이 보기에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지만 십자가의 도외에는 사람을 구원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나라에 우선순위를 두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여기에서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하는 말은 ‘내가 너희에게 갈 때에’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갈 때를 말하는 것이죠. 그때 왜 심히 떨었겠습니까? 바울이 가기 전에 들렀던 아덴 곧 아테네에 갔을 때에, 그 아테네에서 복음전도에 실패했기 때문에 참담한 심정으로 떨리는 마음으로 고린도에 갔다고 해석하는 주석가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바울이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할 때 실패했다고 기록한 부분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이 그렇게 이해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도행전 17장 32-34절 때문입니다. 바울이 거기에서 전도를 한 다음에 결과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바울이 가서 말씀을 전했는데, 고작 믿은 사람이 남자 하나, 여자 몇 사람, 그렇게 밖에 안 되는 것이었죠. 그래서 실패했다고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물량주의를 우상으로 섬기는 숭배자와 같은 것이죠. 그런 관점이라면 실은 예수님도 3년 동안 12명의 제자밖에 못 얻었으니 실패자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실패자입니까? 그렇지 않죠. 바울은 그처럼 고린도의 시장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고, 또 아레오바고 언덕을 비롯해 파르테논 신전이 압도하는 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전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이 심히 떨었다는 것은 아테네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떤 게 아니라 연약한 미물에 지나지 않는 자기 자신을 주님의 손길로 붙잡아 주시는 그 복음의 은혜 앞에 떨릴 수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바울은 아무리 똑똑하고 수사학과 언변술에 능통한 자라해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언변이나 지식으로는 안 되는 걸 말입니다. 내가 약하기 때문에 성령님의 능력만 드러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가 25절에 있습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여기에서 ‘너희 믿음’에는 헬라어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정관사가 붙으면, 믿는 행위 자체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신앙적인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믿음의 삶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만’이란 말이 4절에도 있고 5절에도 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자기 능력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던 사람입니다. 자기 능력으로는 안 되기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령의 능력에 붙들리기를 원했던 바울입니다. 그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자기 지식이나 자기 능력을 의지할 게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님의 능력안에 붙잡혀 살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오늘 2장 초반부를 통해 성령님께서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그 분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 분의 주권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영이신 성령님께 내 모든 삶을 온전히 맡기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특정한 경험만 좋아하고 되풀이되게 바라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모든 삶 속에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손길에 붙들려 사는 삶에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에 붙들려 살 수 있는 하루요, 한 주간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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