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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에고 에이미’ 즉 “나는 세상의 빛이다”하고 자기 정체성을 밝혀주셨습니다.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스스로 자랑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본래부터 마귀에게 속한 아담의 후예임을, 영적인 빛으로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태어날때부터 의롭다고 여긴 채 주님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요한복음 9장으로 넘어갑니다. 이 본문의 말씀은 날때부터 소경된 이가 주님을 만나, 고침받은 사건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이 본문의 핵심적인 키워드 역시 소경에게 집ㄷ중돼 있는 것 같지만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주님,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진리와 생명의 빛이신 주님께서 육신적인 소경의 눈까지도 띄게 해 주시는 영생의 주님이심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게 초점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목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라면, 어떤 심정이었겠습니까? 자기 부모님에게 어린 시절부터 더 특별한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형제라도 있다면 늘 형제들에게 의존하며 살아야 하는 처지였지 않겠습니까? 또 성장해서는 동료나 동네 사람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겠죠. 어쩌다 한 두 번 그렇게 보살펴주면 그 보살핌을 펼쳐주는 그 당사자도 좋겠지만, 그것이 반복되는 일상이라면 그 도움을 베풀어주는 당사자들도 결코 기뻐할만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세월이 얼마나 되었을지 모르지만, 숱한 세월 동안 소경으로 살아왔다면, 그야말로 그 사람은 사회적으로 냉대를 받았을 것이고, 천덕구거리고 신세로 전락해 버렸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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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2절을 통해 보여주는 제자들의 시선을 통해서도 드러내 줍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출애굽기 20장 5절과 출애굽기 34장 7절을 보면 부모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행하면 그 죄과를 삼사대 자식에게까지 보응하게 될 것이란 율법의 말씀이 있죠. 하나님께서 그 계명을 주신 근본적인 이유는 그렇기 때문에 다른 신을 숭배하거나 사회적인 악을 행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린 율법 조항인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그 계명을 기어코 무시하고, 끝까지 어기려고 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살지 않는 백성들은 징계하시고, 그래도 순종하지 않을 경우엔 징벌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다는 것이죠. 왜죠? 그것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율법 조항 때문에, 오늘 본문의 제자들이 날때부터 소경된 사람에 대해 그런 관점을 보였던 것이죠. 저 사람이 저렇게 소경이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에 저렇게 된 것입니까? 하고 말입니다.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하고 질문한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제자들도 그렇지만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 그런 관점이 팽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 그들만 그렇습니까? 누군가 장애아를 낳기만 해도, 그 부모의 죄악으로 정죄하는 경향은 우리시대에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래서 장애아라는 진단을 뱃속에서부터 받게 되면 그 부모들이 다들 지워버리려고 하는 이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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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들은 과연 다른 생각을 갖고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크리스천들도,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그 관점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크리스천들은, 대부분 본문 속의 제자들과 같은 판단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과연 누구의 죄 때문에 저렇게 된 것인가?”하는 관점 말이죠. 그런데 우리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3-5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님은 그 사람의 죄도 아니고, 그 부모의 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란 무엇입니까? 곧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그가 만나게 되는 것, 그로 인해 성자 하나님께서 세상의 빛이심을 세상 모든 이들로 하여금 알게 하시는 것, 그것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영광을 받으시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육적인 고통에 처할 때에 비로소 자기 힘이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자기 처지를 절감하고, 그때 자기 자신을 구원해 줄 진정한 구원자를 사모하는 것, 바로 그 일을 위해 저가 지금 육적인 소경의 상태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해 주십니까? 본문 6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으로서 세상에 참된 생명과 진리의 빛이요, 그것이 곧 영생의 주님이심을 세상으로 알게 하시기 위함임을 천명하셨죠.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시고 곧장 그 소경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취하신 행동이 있었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바라는 모습입니다. 어떻습니까? 오늘날 이런 행동을 취한다면, 누가 감히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그 당사자의 침도 아니고, 낯선 예수님의 침을 그의 눈에 발라주신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모든 일에 순순히 응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의 남동쪽에 있는 실로암 못,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지만, 소경의 상태로 거기까지 가서 씻으라는 주님의 명령도, 그가 다 받아들입니다. 과연 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절박한 자기 자신의 처지, 자기 힘과 자기 방법으로는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는 ‘가난한 심령의 은혜’를 주님께서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교만속에 파묻힌 사람은 그 누가 그 어떤 말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반대로 깊은 자기 수치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도 그 어떤 권면에도 용기를 내지 않고 자기만의 방에 갇히게 되죠.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었다면 그와 같은 자기 수치심에 사로잡혀 자기만의 영적인 어둠의 방에 갇혀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그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그에게 순종할 있는 용기, 곧 가난한 심령의 은혜를 부어주셨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굳이 그 실로암 못 곧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번역해주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실로암 연못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을 알려주는 게 아닙니다. 마치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 연못 자체에 능력이 있다고 믿었던 미신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 알려주는 것과 똑같은 이치죠. 베데스다 연못이나 실로암 연못, 그 장소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 그곳에 임재하신 주님, 그곳으로 보내게 하신 주님의 능력이 창조주의 능력을 지니고 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해서 고침을 받은 그가 모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본문 11절에 “예수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라고 했고, 그 분이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해서 가서 씻었더니, 내가 지금 보게 된 것이다, 하고 말이죠. 결국 이 사건의 핵심은 우리 주님에게 있다는 것이죠. 그 분은 날때부터 소경이 된 이의 눈을 띄게 해 주시는 분으로서, 날 때부터 죄인된 육신적인 사람들의 영적인 눈을 참 생명으로 띄워주시는 분임을 알리기 위함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심령을 가난한 심령으로, 겸손한 심령으로 주님의 은혜를 모실만한 은혜를 베풀어주셔야 가능하다는 것이죠.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날 때부터 소경된 이에게 베푸신 그 은혜가 임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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