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을 통해 7가지 ‘에고 에이미’ 즉 ‘나는 –이다’는 표현으로 당신 자신의 정체성을 밝혀주셨습니다. 그 중에 첫 번째 “나는 생명의 떡이다”하신 말씀은 요한복음 6장에서 해 주셨죠.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갈릴리와 유대 군중들을 향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에고 에이미’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하셨는데,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의 탐욕과 자기 의와 율법의 명분만을 고집하는 영적인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에게 생명의 진리의 빛되신 주님을 보여주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세상의 빛이다”하신 그 말씀은 요한복음 8장에서 시작하고 있지만, 요한복음 9장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육신적인 눈을 예수님께서 띄워주게 해 주신 사건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어제 살펴봤습니다.
어떻게 그의 눈이 띄어졌습니까? 다들 그가 왜 저런 소경의 상태 속에서 태어났는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저의 죄 때문인지, 그 죄에 대한 원인규명에만 빠져 있었지만, 우리 주님은 그런 율법의 정죄나 비난차원이 아닌 당신의 사랑과 긍휼함으로 그에게 다가가셨죠. 그래서 그를 위해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발라주셨고, 실로암 못 곧 ‘보냄을 받았다’는 이름의 뜻인 실로암 못가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놀랍게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그가 두 눈을 뜨게 되어서 보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에게 주님께서 다가오지 않았다면, 다가오셨어도 사랑과 긍휼을 베풀지 않았다면, 만약 그런 사랑과 긍휼을 그가 받았음에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감동과 은혜를 받지 않았다면 결코 그가 눈을 뜨는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실로암 못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말씀 자체에 권위와 능력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심령과 우리 삶 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역사는 주님의 말씀의 권위와 능력 속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은혜의 역사가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7610049
오늘 읽은 본문은 그 이후의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을 때, 날 때부터 그를 알고 지낸 동네 사람들과 지인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죠. 그때 그들이 어떻게 합니까? 본문 13절입니다.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왜 그 동네 사람들과 알고 있던 지인들이 바리새인들에게 그를 데리고 왔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의 의견을 듣고자 함이었습니다. 과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고자 말입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합니까? 그들도 맹인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시작하죠. 그런데 그들은 그 사건이 발생한 날이 ‘안식일’이었음에 초점을 맞춥니다. 안식일에 의료행위라는 노동을 한 건 안식일에 쉬라는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것 말입니다. 그렇게 안식일법을 규정해 놓고, 그 틀에 따라 쉬는 것은 옳고 그 틀에 따라 쉬지 않는 것은 모두가 틀렸다고 부정해 버리는 그들이죠. 그러니 주님께서 맹인을 고쳐주신 일, 그것은 필시 부정한 죄인이 한 것이라고 그들은 잠정적인 결론까지 내리는 것이죠. 그야말로 그 동네 사람들과 지인들이 진정으로 알고자 했던 것,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바로 그 사실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견해를 청취하고자 왔는데, 바리새인들은 그 논점을 흐려버리고 안식일 논쟁법으로 옮겨가버리는 꼴입니다. 물론 같은 바리새인들 안에서도 그 문제는 첨예하게 대립을 해 왔죠. 과연 그것을 안식일법을 어긴 일로 봐야 하느냐, 아니면 어떻게 죄인이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행할 수가 있느냐, 하는 논쟁 말입니다. 본문 16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렇게 논쟁을 벌이던 그들이 그 맹인을 다시 불러 조사를 한 것이죠. 하지만 누가 봐도 그 사람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그 맹인이 맞고, 또 그가 갑자기 눈을 드게 된 것도 명백한 팩트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그에게 묻죠. 17절 하반절에 “너는 그를 어떤 사람이라 하느냐” 그러자 그는 “선지자니이다.” 나를 고쳐줄 수 있는 분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가 아니고는 이런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합니까? 그의 말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의 부모를 부르죠. 그래서 이 아들이 너희 아들이 맞는지, 지금 그가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 말해 보라는 것이죠. 그때 그 부모가 뭐라고 대답을 합니까? 21절에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부모가 그 대답을 선뜻 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왜죠? 이미 유대 당국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그리스도 곧 메시아로 시인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유대 사회에서 최고 형벌과도 같은 ‘출교’를 내린다고 명령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유대사회에서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몸만 같은 동족으로 사는 것뿐이지 상거래도 못하고 말도 섞지 못하고 공동체 생활을 전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부모는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대답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장성했으니 직접 확인해 보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7610049
그러자 그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합니까? 24절에 보니까 두 번째 그를 부르죠. 그러면서 네가 두 눈을 뜨게 된 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명령하죠. 물론 너의 눈을 뜨게 해 준 당사자인 예수님에 대해서는 ‘죄인’으로 규정을 하면서 말입니다.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그가 눈을 뜬 기적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지만, 그 눈을 뜨게 해준 예수님은 완전히 거부하는 그들의 모습이죠. 왜죠? 창조 이후에 안식하신 하나님, 그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 그 안식일에 생명을 온전케 해 주시고 진리와 생명의 빛을 깨닫게 해 주신 성자 하나님에 대해 그들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심령들이었기 때문이죠. 바꿔 말해 안식일을 제정해 주신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는 쫓는 것 같지만, 그 율례와 법도의 참된 생명의 정신을 지닌 예수님은 거부해버리는 것입니다. 본질보다 명분만 더 좋아하는 그들의 그릇된 모습인 셈입니다.
그러자 그가 보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기 눈을 뜨게 한 자, 아직 예수님의 실체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그는 자기 준을 뜨게 해 준 자가, 그저 위대한 선지자일 것이라고 계속 주장을 하는 것이죠. 그때 그 바리새인들은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34절) 한마디로 말해 더 이상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왜죠? 28절 하반절에 자기들은 율법을 수유밷은 모세의 제자라는 명분 때문이죠. 그만큼 율법의 명분보다 중요한 율법을 수여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율법을 수여해주신 율법의 본질과 정신을 그들은 완전히 놓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우리를 사랑하여 구원하기 위함이죠. 물론 무조건적인 은혜로 찾아오셨지만 그 속에는 심판의 측면도 내재돼 있습니다. 39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본질과 정신보다, 율법의 명분만 중요시하고 그것을 지킨다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영적인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은 끝내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아무리 두 눈을 뜨고 있어도 스스로 영적인 맹인임을 자처하는 자들은 주님의 그 사랑을 덧입게 된다는 뜻이죠.
오늘 우리도 새벽기도회가 끝나면 불이 꺼지고 눈을 감죠. 그때 우리는 모두 일시적인 맹인이 됩니다. 새벽기도시간은 맹인이 되는 시간 아닙니까? 물론 일시적인 맹인이 되는 그 시간을 통해 영적인 눈을 뜨는 시간이 되는 셈이죠. 주님의 말씀으로, 주님의 진리와 생명의 빛으로 말입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7610049
728x90
반응형
LIST
'새벽묵상DewSermon > 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요10:22-42) (1) | 2024.06.09 |
---|---|
나는 양의 문이요 나는 선한 목자라(요10:1-21) (0) | 2024.06.06 |
세상의 빛이로라(요9:1-12) (1) | 2024.06.04 |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요8:31-59) (0) | 2024.06.04 |
나는 세상의 빛이니(요8:12-30) (0) | 2024.06.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