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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장 14절에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라고 친히 밝히셨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답하신 것이었죠. 그런데 그 말씀을 신구약 중간기의 알렉산더 대왕이 72명의 성경학자들에게 번역시킨 ‘70인역성경’에는 ‘에고 에이미’(εγω ειμι)로 기록돼 있습니다. “나는 –이다.”는 뜻이죠. 중요한 것은 ‘에고 에이미’(나는 –이다)는 그 말을 예수님께서 직접 사용하셨다는 점이죠. 요한복음에 나오는 7가지 표현이 그것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6:35, 48),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9:5), “나는 양의 문이다”(10:7), “나는 선한 목자다”(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그리고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에고 에이미”(나는 –이다.)는 사실을 천명하신 것일까요? 여태껏 예수님은 나는 내 자의로 한 게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좇아 행했고, 내 자의로 말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해 왔고, 내 영광을 위해 산 게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살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이다.”하신 것은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성자 하나님이심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유대인들에게, 곧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그 군중들에게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41,48,50,51,58)라고 친히 말씀해 주셨고,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하신 말씀을 천명하신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것으로 인해 진리와 생명되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는 이들, 이 세상의 정치권력에 눈먼 자들, 이 세상에 주신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충분히 지킬 수 있고 그것으로 자기 의를 내세우려는 이들에게, 진리와 생명의 빛 곧 영적인 빛으로 깨어나길 바라셨던 것입니다.
어제 우리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살펴봤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필사하는 이들이요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잘 아는 자들입니다. 이른바 성경교사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죠. 그들과 함께 온 바리새인들은 누구입니까? 남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멸망당해 포로로 끌려갔을 때 우리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키지 않아서 패망하게 되었다면서 그 이후부터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잘 지키고자 하는 이들, 그래서 일반 백성들과 분리주의를 내세우면서 율법을 지키고자 했고 그것을 자기 의의 기준을 삼은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죠.
그만큼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만큼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잘 아는 이들도, 또 잘 지키는 이들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 스스로 완전한 의인으로 생각하는 자기 자아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었죠.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구약의 율례와 법도를 잘 알고 있고, 선지자들의 예언된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 곧 구원의 메시아가 올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바로 그 분이 예수님이신데도, 그들은 말씀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곧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과 동등되는 그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지 않았고 주님을 주님으로 모시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미치광이 취급하면서 죽이려드는 그들이었죠.
그래서 그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데리고 와서,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소? 하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의 음모와 계략을 잘 아셨죠. 만일 율법에 따라 돌로 치라고 한다면, 저들은 분명 자비도 긍휼도 없는 냉혈한이라고 비난할 것이고, 심지어 로마의 법을 초법하려고 한다면서 고발할 게 뻔했죠. 반대로 율법에는 돌로 치라고 나와 있지만, 너희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다면, 율법을 지키지 않으려는 유대인이냐, 하면서 또 조롱하고 비난할 게 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땅 위에 글씨를 쓰시고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죠. 그러자 자들 하나 둘 자리를 뜨고 말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녀와 단 둘이 남았고,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그와 같은 죄를 범하지 말라”하고 말입니다. 사람을 바르게 변화시키는 길, 사람의 인생이 진정으로 변화될 수 있는 길은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며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으로는 쉽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통해서만 그 인생이 새로운 삶을 결단하게 된다는 것 말입니다. 그것은 구약의 율례와 법도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목적에서도 드러납니다. 그것은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래서 다 멸망받아 마땅하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더욱더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율례와 법도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도 율법을 잘 지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간 것이요,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멸망을 당한 것도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해서요, 더욱이 70년이 지나 다시금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은 율법을 잘 지켜서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그 율례와 법도로는 끊임없는 인간의 연약함만 드러내고, 그 완벽하다던 제사마저도 되풀이해야 하는 마당인지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통해 온 인류의 구원을 베풀어주신 것이었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도 그렇게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쳤던 그들이 어떻게 새로운 결단을 하면서 순교자의 삶으로 마감을 했습니까? 율법의 잣대로 들이댔기 때문입니까? 아니죠. 오직 일흔번에 일곱 번씩 사랑하고 긍휼로 품으라는 그 말씀 그대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을 찾아와 격려하시고, 위로하시고, 긍휼을 품어주셨기 때문이요, 그 이후에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그들이 새로운 인생으로 변화된 것이었습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그 여인에게 주님께서 긍휼과 자비로 품으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고, 그러니 그녀가 이후에 어떤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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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두 번째로 “에고 에이미” 즉 “나는 –이다.”하신 그 말씀이 나옵니다. 본문 12절에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나는 세상의 빛이다”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본문 20절에서는 그 말씀을 “헌금함 앞에서 하셨다”하고 밝혀줍니다. 사두개인들, 더욱이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던 율법주의자들이었지만, 그러나 사람에 대한 정의와 긍휼과 신의는 저버리며 살았던 자들이었다고 마태복음 23장23절에 누가복음11장 42절에 증언해줍니다. 그렇기에 외식하는 자들처럼 각종 십일조는 사람 앞에 보이려고 드러내면서 드리지만 정작 사람에 대한 공의의 관점, 긍휼의 관점, 신의의 관점을 놓치면서 드리는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헌금은 그 두 가지 부분을 온전하게 하면서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헌금함 앞에서 말씀하셨던 것이죠. 그것이 진리와 생명의 빛 안에 거하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말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21-30절 말씀은 진리의 빛이신 예수님은 하늘에서 온 자라고, 곧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자임을 다시금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온통 이 세상의 것으로만 가려져 있는 어둠에 휩쌓여 있는 너희들이 어떻게 나의 가는 길을 알 수 있겠느냐? 하시는 것이죠. 더욱이 율법으로만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하려는 너희의 죄악된 심령의 눈으로 어찌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를 알아볼 수 있겠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나는 오직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일을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혼자 두시지 않고 있는데, 이 세상에서 자기 기쁨만을 위해 사는 너희들이 어찌 나의 일을 알 수 있겠느냐? 하신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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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그와 같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정죄할 수 있습니다. 왜 저렇게도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몰라보고 오히려 핍박하고 죽이려드는지 말입니다. 이유는 한 가지 아닙니까? 이 세상의 거짓과 탐욕 그리고 자기 자랑의 의라는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육신의 제약을 받고 있는 우리들도 그들처럼 연약한 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기도하실 때 오늘 하루도 저희들의 심령의 눈이 이 세상 어둠에 가리지 않도록, 이 세상 탐욕과 나의 율법주의적인 행위의 의로움의 눈으로 사로잡히지 않고, 나의 연약함을 주님 앞에 고백하면서, 오늘도 진리와 생명의 빛으로 나의 길을 비춰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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