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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1:2832절에 보면 두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일을 시키는데, 그 중 한 아들은 하겠다고 하면서 나중에 하지 않는 아들이 나오고, 다른 아들은 처음엔 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나중에 뉘우치고 하는 아들이죠.
우리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 성경에는 큰 아들이 하겠다고 해 놓고 나중에 하지 않는 아들로 번역이 돼 있고, 공동번역이나 새번역이나 KJV성경 등 다른 많은 성경번역본들은 우리 개역개정과 달리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의 경우가 다르게 돼 있습니다. 그 성경번역본들은 첫째가 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나중에 한 아들로 나오고, 둘째는 하겠다고 해 놓고 하지 않는 아들로 나오죠.
물론 어느 번역본이 더 정확하냐는 문제는 두 번째 부분, 곧 공동번역과 새번역과 KJV 그리고 많은 번역본들의 번역이 더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왜 그 첫째 아들이 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나중에 하게 되었냐는 것입니다. 그 본문에서 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한 첫째 아들로 나온 것은 그 문맥상 세리와 창녀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처음엔 하겠다고 했다가 하지 않는 둘째 아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입니까? 누가 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덧입을 수 있습니까? 자기 의로움과 자기 자아에 사로잡혀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아니라, 스스로 죄인임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다고 생각하는 세리와 창녀들이죠. 바로 그들이 주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더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본다면 사람이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누가 더 높습니까?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며 정죄하고 비난하는 경우에 더 옳게 될 확률이 높을까요? 아니면 율법의 잣대로 비난하고 정죄하기보다 자비와 긍휼로 품고 격려할 때 더 변화될 가능성이 높겠습니까? 자식이 계속 잘못하는데 더 계속 정죄하고 비난한다면 그 자식은 정말로 더 삐뚫어질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그 자식이 못마땅하고 늘 엉뚱한 일을 행할지라도 그 자식을 믿어주고 격려하고 자비로 품어주면 언젠가 부모에게 기쁨이 될 확률이 훨씬 더 높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바로 그와 같은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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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막절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셨는데, 그 말씀을 들은 많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죠. 물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 하속들을 시켜서 더 이상 백성들이 빠져들지 않도록 체포하도록 했죠. 하지만 그 하속들도 예수님을 만나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해 들었는데, 그들 스스로도 놀랐죠. 왜냐하면 그 분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가르침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왠지 그들과 다른 예수님만의 진실함과 정직함과 긍휼하심이 묻어나고 있었고, 가난하든 부하든 남자든 여자든 과부든 남녀노소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을 품고 사랑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진실로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죠. 그 까닭에 예수님을 체포하러 간 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하속들은 그냥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너희들도 그 꼬임에 넘어가버렸느냐, 하면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 하속들을 비난했죠. 그러면서 그 지도자 그룹들을 향해 “이 중에 그의 꾀임에 넘어간 자들이 과연 누가 있더냐?”하고 그들을 향해 더 큰 면박을 주고 있는데, 그때 유대 관원인 ‘니고데모’가 일어나서 그 하속들을 변호해 주었죠. “우리 율법에 사람의 말도 듣지 않고 또 그가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까?”하고 말입니다. 니고데모의 말은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란 분이 과연 어긋난 말들을 하고 있는지, 그 분이 그릇된 행동을 하는지, 깊이 살펴본 후에 바른 판결을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왜죠? 니고데모도 이미 한 밤 중에 예수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바가 있었고, 그 분이 보여준 삶의 행적들을 계속 주시하며 살펴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분을 보면 볼수록, 그 분을 알면 알수록 정말로 그 분이야말로 남다른 진실함과 자비함이 묻어나는, 우리 유대의 지도층과는 전혀 다른 생명과 사랑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니고데모가 그렇게 유대 지도자들의 그룹에 서서 자기 주장을 펼칠 때, 다른 지도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너도 갈릴리 출신인 것 아니냐, 어찌 갈릴리에서 온 예수란 자가 선지자가 될 수 있겠느냐, 하면서 정리를 해 버리죠. 그러자 그 지도자들이 하나 둘 씩 다 각각 자기 집으로 가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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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지는 본문 말씀이 오늘 읽은 요한복음 8장 1-2절입니다.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예수님께서 감람산으로 가신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9절에 “습관을 따라 감람산으로 가셨다”고 전해줍니다. 그만큼 일을 행하신 이후에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다시 말해 기도하는 습관을 좇아 감람산을 찾으셨던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듣고 새겼다면 다시금 당신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그 산을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셨죠. 그것이 바로 성전에 들어가 다시금 백성들을 향해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본문 3-6a절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유대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 그룹에 속한 이들이죠. 어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한통속이 되어 예수님을 체포하고 또 죽이려드는 고위급 무리들이죠. 그 하속들을 보내서 체포하려고 했지만 그 하속들마저 심상치 않음을 알고, 직접 그들이 나선 것이었죠. 어떻게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예수님께 나온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20장 10절과 신명기 22장 22절의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일이 드러나거든 둘 다 돌로 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법을 적용하여 지금 간음한 현장에 있던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 온 것이죠. 왜죠? 모세의 율법에는 돌로 치라고 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냐는 것이죠. 이른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를 율법에 기록된 대로 돌로 치라고 한다면 평소 긍휼과 자비로 사람들을 품었던 그의 인격과 도덕성에 치명타가 될 것이고, 더 나아가 지금은 유대법이 아닌 로마법의 지배를 받고 있는 마당에 함부로 돌로 칠 수 없는 판국이고 그래서 돌로 치게 한다면 로마법 위에 군림하려 든다면서 고소할 게 뻔했습니다. 반대로 그녀를 돌로 치지 말라고 명령한다면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고 짓밟는 자인가? 하고 정죄 당할게 뻔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본문 6절 후반부에 보면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무언가를 쓰셨습니다. 과연 무엇을 쓰셨을까요? 어떤 주석을 보니 어떤 분은 예레미야 17장 13절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는 말씀을 쓰셨을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출애굽기 23장 1절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를 쓰셨을 것이다, 하고 추측을 하죠. 물론 추측일뿐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보다 정확한 의미는 ‘땅에 쓰신 그 모습 자체’에 있다는 점이죠. 그 모습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 곧 모세의 돌판에 친수로 쓰신 그 모습을 연상시켜주신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땅에 쓰신 이후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셨습니다. 그때 “앞에, 다들 양심의 가책을 받고 젊은이들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들 그 자리를 떠났고”, 그때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던지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중요한 것은 바로 이점입니다. 예수님의 위로와 격려를 통해 그녀가 새로운 삶을 삶을 결단하게 된다는 것 말입니다. 만약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관점처럼 그녀를 더욱 옥죄고 정죄하고 비난했다면, 한순간은 그것을 면하려고 죄를 범하지 않을지 몰라도, 보다 근본적인 새 삶의 전환은 주님을 만난 위로와 격려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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