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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얼마 전에 어떤 집사님과 성경 속 식물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겨자씨도 나오고 들에 핀 백합화도 나오고 또 로뎀나무도 나오죠.
겨자씨에 관해서는 마태복음 13장 31-32절에 이렇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아주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공중의 새들이 찾아와 깃들일 정도로 큰 나무가 된다고 생각할 수 있죠.
하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에 자라고 있는 겨자씨는 우리나라의 유채꽃 씨입니다.
봄철에 노랗게 피니는 유채꽃 그 씨가 바로 겨자씨에 해당되는 것이죠.
그 작은 겨자씨 한 알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유채꽃처럼 피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겨자씨처럼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여도 하나님께서 친히 꽃을 피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백합화와 관련해서는 누가복음 12장 27-28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백합화 꽃 하나를 이스라엘의 왕인 솔로몬의 영광으로 빗대서 말씀한 것입니다.
그 백합화가 꽃 하나가 어떤 꽃이길래 솔로몬의 영광으로 비길 수 있다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땅의 백합화는 우리나라의 백합이 아니라 꽃양귀비와 비슷한 꽃입니다.
삼학도 공원을 지나가면 꽃양귀비가 활짝 피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꽃씨를 따거나 인터넷에 주문해서 내년에 교회 화단에 심어볼까 합니다.
꽃양귀비를 가까이 들여다보면 온통 붉은 색인데 그 안이 멋지게 장식이 돼 있습니다.
그와 같은 꽃양귀비의 영화로운 모습이 솔로몬의 영화로운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의 관룡포가 붉은색이기 때문이죠.
솔로몬도 왕의 곤룡포를 입을 자격이 없는 다윗의 배다른 19명의 아들들 가운데 10번째 아들이었죠.
더욱이 밧세바의 둘째 아들이라 왕실 내에서 얼마나 서러움을 받았겠습니까?
그만큼 왕위 계승을 노리는 아들들도 많았고 쿠데타를 일으킬 정도로 왕위 쟁탈전에 심했는데 솔로몬이 왕의 곤룡포를 입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들판에 핀 그 멋진 붉은 꽃양귀비의 화려함도 하나님께서 돌봐주시고 먹이고 입히신다는 뜻이죠.
그렇듯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 자신들도 아무리 작고 연약할지라도 친히 돌보시고 먹이고 입히신다는 것입니다.
로뎀나무는 어떨까요?
엘리야가 갈멜산 언덕빼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0명과 대결을 벌여 하나님의 불로 응답을 받았죠.
그때 그 850명의 선지자들을 기손 시냇가로 끌고 가서 모조리 죽이도록 하죠.
그러자 아합과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혈안이 돼자 엘리야는 브엘세바 광야로 도망치는데 그때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 죽기를 바라면서 잠이 든 적이 있죠.
그러니 그 로뎀나무는 우리나라로 치면 큰 소나무 기둥처럼 생각하기가 쉽죠.
하지만 로뎀나무는 우리나라의 싸리나무빗자루를 만들 때 사용하는 싸리나무거나 삼엽초 세 개의 이파리가 있는 야관문에 속한 나무죠.
결코 소나무나 큰 기둥에 기댈 수 있는 나무가 아니라 작은 회초리를 만들 수 있는 게 로뎀나무입니다.
모세의 지팡이도 실은 거대한 지팡이가 아니라 회초리에 불과한 것이었으니 어쩌면 로뎀나무로 만든 회초리였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작고 형편없는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바라며 잠을 자고 있는 엘리야를 친히 지켜주셨던 것입니다.
(깨달음)이상과 같은 식물들을 통해 깨닫게 되는 바가 무엇입니까?
광야 40년을 통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일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일부만 포도와 무화과와 종려나무를 심을 수 있는 땅이요 나머지는 양을 치면서 살아야 하는 땅이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땅 자체가 비옥하고 풍부한 식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 척박한 땅에서 양의 젖을 짜내서 먹을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일부 지역에서 종려나무에 기름을 짜내 먹고 살아가는 것을 꿀로 해석한 것이죠.
그런데도 그 땅을 일컬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척박한 땅에 사는 이스라엘 민족을 눈여겨보시고 보살펴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11장 12절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그 척박하고 식물이 희귀한 땅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말씀을 좇아 순종하여 살면 하나님의 눈동자가 한 시도 떠나지 않고 돌봐주시고 먹이고 입혀주신다는 뜻입니다.
(적용)실은 우리의 인생 자체가 그와 같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의 육신을 들여다볼 때 겨자씨 같고 백합화같고 그리고 로뎀나무 같지 않습니까?
어디 한 군데가 따끔거리고 욱신 거리면 다른 모든 부분이 함께 아파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최근에 소변이 잘 나오지 않고 밤에 야갼뇨가 있어서 전립선 검사를 했습니다.
PSA수치가 2로 나와서 4정도 되면 전립선 암 검사를 위해 전립선 조직을 떼내서 검사를 해봐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만 염증이 있으니 약을 1주일 정도 먹고 난 후에 다시 보자고 했는데, 그 약을 다 먹을 즈음 유튜브를 통해 좋은 치료법을 알게 되었죠.
일명 혀뿌리 운동인데 코골이나 무호흡증 환자들을 치료하는 목적으로 하는 혀뿌리 운동을 했더니 야갼뇨가 사라졌고 새벽에 일어나도 개운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는 소변만 잘 안 나와도 몸의 전체가 기능이 약해진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저 혼자만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어느 부분에 몸에 이상이 생기면 저처럼 연약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다가 그 부분이 치료가 되고 또 좋아졌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죠.
그것이 실은 우리 인생이 겨자씨 같고 백합화 같고 로뎀나무 같은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실은 이스라엘의 척박한 그 땅에서도 양의 젖을 짜고 감람나무 기름과 같은 꿀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는 은혜로 사는 인생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0527332
(역배)요한복음은 A.D.90년경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로서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자임을 천명하고자 말입니다.
그를 위해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 예수님의 ‘7가지 기적’과 ‘7가지 존재증명’에 대해서 밝혀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요2:1-12)이 첫 번째 기적입니다.
두 번째로 왕의 신하가 앓고 있는 병을 예수님께서 직접 가지 않고 원격으로 고치신 기적(요4:46-54)이죠.
셋째로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친 기적(요5:1-9)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넷째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인 기적(요6:1-14)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섯째로 물 위로 걸어간 기적(요6:16-21)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섯째로 소경을 고친 기적(요9:1-7)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일곱번째 죽은 지 나흘 돼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나사로를 살려낸 능력(요11:1-44)입니다.
예수님은 그처럼 사물의 질도, 양도, 공간도, 시간도, 자연법칙도, 타고난 운명도, 심지어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분임을 일깨워주고자 하신 기적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기적들을 행하시면서, 중간중간에 ‘예수님의 7가지 존재증명’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εἰμι〜 ἐγὼ’요 영어로는 ‘I am that I am’(나는 –이다.)하는 말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41,48,50,51,58)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9:5,12:46)
“나는 양의 문이다”(10:7,9)
“나는 선한 목자다”(10:11,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5)
그리고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나는 왕이다”(18:37) 하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에고 에이미’는 예수님이 처음 쓰신 말이 아니라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말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부르셨습니다.
그때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간 종살이하고 있는데 너를 통해 그 백성들을 해방시키겠다고 말씀하셨죠.
그러자 모세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소개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הָיָה הָיָה하야 하야, I am that I am-나는 나다)”(출3:14)하고 대답해주셨죠.
바로 그 히브리어를 70인역에서 “에고 에이미(εἰμι〜 ἐγὼ)”로 번역했는데, 예수님께서 똑같이 사용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셔서 3년간 훈련을 거친 뒤에 최후의 만찬을 나누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일명 제자강화의 시간을 가진 것이죠.
마가의 다락방에서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긴 후에 떡을 떼고 잔을 나누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당부하셨죠.
그 일이 끝났을 때 가롯 유다는 다락방 문을 열고 대제사장들의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죽일 계략을 짰죠.
예수님은 제자강화의 시간을 가진 다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를 하셨습니다.
(본문)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강화의 시간을 가지면서 하신 말씀 중 하나가 오늘 본문인데 1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원해)여기에 ‘포도나무’로 번역된 헬라어 ‘암펠로스’(ἄμπελος)는 말 그대로 ‘포도나무’(a vine)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케렘’(כֶּרֶם)으로 번역되는데 노아의 홍수 이후에 포도나무를 심은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당신을 향해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사실 포도나무는 구약에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하는 표현이었습니다.
노아가 홍수 이후에 방주 밖으로 나와 농사를 지었는데 그것이 포도농사였죠.
그 이후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됐는데 그 모습을 포도나무에 빗대기 시작했죠.
이방 땅에 있는 포도나무를 약속의 땅에 심어 하나님의 자녀로 기르듯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에 심기 시작했다는 거죠.
그런데 순전한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그들이 이방 족속들과 어울려 살면서 이방 포도나무가 됐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사5:1-7)나 예레미야서(렘2:21)에서 극상품 포도가 되길 바랐지만 들포도로 변해버렸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했고 우상숭배에 빠져 살았다는 것이죠.
에스겔 선지자는 그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운명이 땔감처럼 던져질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바벨론의 침략 앞에 처참하게 무너지고 포로로 질질 끌려갈 것을 예언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모습과 관련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가리켜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이스라엘 민족이 참 포도나무이길 바랐는데 그들이 타락해 이방종교에 취하고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죠.
그런 죄악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기에 직접 이 땅에 오셨고 참포도나무임을 말씀한 것이죠.
그래서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접붙여 사는 자만이 예수님의 수액을 공급받아 살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성)그런데 포도나무를 생각하면 아주 튼실한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그런 포도나무를 떠올리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겨울철의 포도나무는 어떻습니까?
이파리는 하나도 없고 거의 죽은 듯한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는 게 포도나무입니다.
이사야 53장 2-3절 말씀에서도 그런 모습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깨달음)겨울철의 포도나무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죽은 나무와 다를 다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모습이 십자가에서 갈기갈리 찢기신 예수님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버림 받은 모습, 채찍에 맞고 침뱉음을 당한 모습, 멸시를 받은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앙상한 포도나무에서 봄철에 새 싹이 나오고 여름철엔 풍성한 열매를 맺지 않습니까?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 때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는 예수님께서 물로된 포도주를 만들어 혼인잔치의 흥을 이어가게 하셨죠.
물론 그때의 포도주란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으로 영적인 신부되신 예수님과 혼인잔치할 날을 연상케 하는 사건이죠.
(적용)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도 참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돌보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척박한 이스라엘 땅에 포도나무 열매가 열리면 얼마나 크고 튼실한 열매가 열리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고운 모양이나 풍채가 없는 앙상한 포도나무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누구 하나 원하거나 갈망하지 않고 그야말로 버림받은 존재셨죠.
볼품없고 깡마른 앙상한 포도나무처럼 말입니다.
그럴지라도 농부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보살핌과 돌봄 속에서 봄철에 싹이 나고 여름엔 풍성한 열매를 내 놓게 된 것이죠.
지금 예수님께서 참포도나무임을 밝히신 것도 바로 그런 맥락 아니겠습니까?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모두에게 버림받은 존재이지 않더냐?’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존재로 모두에게 소외된 존재이지 않더냐?’
‘하지만 그 연약한 나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붙드시고 지켜주시기에 죽음 속에서 부활하게 된 것 아니더냐?’
‘그만큼 하나님 아버지의 돌보심과 보살핌이 있어야만 나 또한 부활의 역사를 써내려갈 수 있는 것처럼 너희들도 마찬가지 아니겠느냐’하는 뜻입니다.
마치 유채꽃 한 알과 같은 겨자씨 한 알처럼, 꽃양귀비과에 속한 들에 핀 백합화처럼, 싸릿나무빗자루와 같은 로뎀나무처럼 말입니다.
그 연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겨자씨도 백합화도 로뎀나무도 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살핌 속에서 존재가치를 증명해내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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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은혜)하나님께서 볼품 없고 앙상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을 붙드시듯 연약한 우리를 친히 돌보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거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유채꽃과 같은 겨자씨 한알이 작고 볼품 없지만 주님은 그런 겨자씨 한 알도 소중히 여기시는 분 아니더냐?”
“솔로몬이 입은 곤룡포 붉은 옷과 들에 핀 백합화 꽃양귀비가 똑같다고 하는데 주님은 그런 백합화도 귀하게 품으시는 분 아니더냐?”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하며 잠을 잤는데 싸릿나무에 불과한 그 나무도 주님께서 아끼신 분 아니더냐?”
“예수님은 스스로 참포도나무라고 말씀하셨는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주님의 모습이 그토록 앙상하고 마른 뼈와 같은 모습이지 않았더냐?”
“주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릴 때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돌보시고 품고 계셨기에 부활의 열매를 거둘 수 있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몸에 한 부위가 이상하면 모든 몸이 아픈 걸 느끼듯 너도 겨자씨처럼 백합화처럼 로뎀나무처럼 연약한 존재이지 않더냐?”
“겨울철 포도나무가 앙상하고 볼품없고 죽은 나무처럼 보이듯 너도 죽으면 너의 육신이 화장으로 불타 없어질 존재이지 않더냐?”
“하지만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품고 붙들어 주실 때 부활의 열매를 거두지 않았더냐?”
“주님 앞에 약함을 고백하며 주님을 의지하는 자녀들에게 지금도 그런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겠느냐?”
(찬양)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것
주 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것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십자가 죄 사하셨네 주님의 이름 찬양해 주 나의 모든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것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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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잠자리 한 마리가 가만히 풀 위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아이가 슬금슬금 다가와 잠자리채를 힘껏 휘둘렀죠.
‘윙’하고 바람 갈라지는 소리에 잠자리를 날개를 펼쳤습니다.
가까스레 죽음을 모면한 잠자리가 그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날개가 없었다면 어린 너에게 잡힐 뻔 했구나.”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잠자리는 온 몸을 비틀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아이에게 말을 하다가 그만 거미줄에 걸리고 만 것이었습니다.
파르르 날개를 떨고 있는 잠자리에게 거미가 말했습니다.
“너에게 날개가 없었다면 이렇게 거미줄에 걸리지 않았을텐데.”
그러면서 거미는 재빠르게 잠자리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산 새 한 마리가 허공을 가르며 총알처럼 날아왔습니다.
그리고서는 표적처럼 박혀 있는 거미를 낚아채듯 물고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신음하는 거미에게 산새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거미야 미안해 네가 몸을 그렇게 빨리 움직이지만 않았어도 나는 너를 보지 못했을 거야.”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입니까?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이 오히려 은혜가 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적용)골프공도 처음에는 홈이 없이 매끈하게 만들어졌다고 하죠.
그랬더니 비거리가 130야드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후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공 표면에 홈을 만들어 놓으니까 배 이상은 날아가더라는 것이죠.
겉에서 보면 그 홈이 흠처럼 보이지만 그 흠이 골프공의 생명과 같다는 것입니다.
(깨달음)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도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모두 한 가지 흠은 다 있지 않습니까?
저처럼 방광이 약하든지, 갑상선이 약하든지, 폐 기능이 약하든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선천적인 연약함도 한 두 가지는 다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흠결을 생명처럼 귀하게 품어주지 않겠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다말도 기생 라합도 룻도 바셋바도 실은 다 연약함과 허물투성이였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께 자기 인생을 내어맡길 때 하나님께서는 그 흠결조차 생명의 역사로 품어주시고 열매맺게 해 주셨습니다.
(적용)유채꽃과 같은 겨자씨 한 알도 볼품없고 연약한 존재이지 않습니까?
붉으스럼한 꽃양귀비꽃도 매혹적이긴 하지만 그 역시 들풀과 같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엘리야가 기대며 잠을 잔 싸릿나무에 불과한 로뎀나무도 그렇고 겨우내 죽은 가지처럼 비치는 앙상한 포도나무도 그렇죠.
예수님께서도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이 십자가에 버림받은 존재로 연약함 가운데서 죽으셨지만 하나님의 돌보심 속에서 부활의 열매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강함이 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넉넉함이 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병약함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치유하심이 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인생을 살다보면 나의 연약함과 허물이 하나님의 은혜가 되게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매끈매끈한 골프공보다 홈이 있는 그 흠결과 같아 보이는 골프공이 두 배는 더 멀리간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다말도 라합도 룻도 밧세바도 다 흠결이 있는 연약한 이들이지만 주님의 은혜로 놀라운 열매를 거뒀어요.”
“겨자씨 한 알도 백합화도 로뎀나무도 다 작고 연약하고 볼품없는 것들이지만 주님의 은혜로 생명의 역사를 써 나가는 것들이예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신 예수님은 겨울철 앙상한 포도나무와 같았지만 하나님의 돌보심 속에 부활의 열매를 거두셨어요.”
“주님. 오늘 저에게도 육신의 연약함이 있고 제 자녀에게도 흠결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현약함과 흠결이 주님의 은혜 안에서 강함이 되게 하시고 주님 은혜 안에서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은혜로 채워주시옵소서.”
“내 능력이나 힘이나 내 자랑거리를 좇아 살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님 앞에 무릎꿇는 은혜안에 살게 해 주세요.”
(찬양)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호흡마저도 다 주의 것이니
세상 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크신 계획 다 볼 수도 없고 작은 고난에 지쳐도
주께 묶인 나의 모든 삶 버티고 견디게 하시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나의 모든 것 다 주께 맡기니
참된 평안과 위로 내게 주신 주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8679122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와 보살핌이 없이는 우리는 한 순간도 온전하게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 아닙니까?
유채꽃과 같은 작은 겨자씨 한 알도 꽃양귀비꽃과 같은 들에 핀 백합화도 싸릿나무에 불과한 로뎀나무도 모두 연약한 것들 아닙니까?
마른 가지처럼 앙상하고 볼품없는 포도나무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 작고 연약한 존재들조차도 하나님의 품으로 품어주시고 돌봐주실 때 새 생명의 역사와 부활의 역사를 써내려갔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주님 안에서 볼 때 한 가지 이상씩은 다 연약함과 허물과 부족함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조차도 주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할 때 나의 약함을 주님의 강함으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총을 갈망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도록 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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