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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마귀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녀들이죠.
하나님께 속한 자녀들이 하는 기도는 내 뜻을 관철시키고자 기도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자 기도하는 것이죠.
징을 치고 방울을 흔들고 부채춤과 칼춤을 추듯이 무당이 귀신에게 기도하듯 요란을 떠는 기도가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결단할 때 그 진액이 이미 다 빠지기 때문이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기도하는 모습을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 살펴볼 수 있죠.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심부름을 받아 베들레헴 촌구석의 마리아를 찾았죠.
그때 마리아는 요셉과 결혼하기로 약정을 했지만 신혼밤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런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사자 가브리엘이 찾아와 말하죠.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1)
그때 마리아는 저는 남자를 알지 못했는데, 남자와 관계를 갖지 않았는데, 어떻게 제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냐고 말했죠.
그러자 천사 가브리엘은 그렇게 말해줬죠.
‘성령의 능력이 너를 감싸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요 너의 친족 엘리사벳이 임신한 것도 그런 일이니라’
그때서야 마리아가 그렇게 대답을 하죠.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마리아가 하나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주님의 여종이라고 고백을 한 것이죠.
그리고는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처녀가 아이를 낳으면 율법에 따라 돌팔매질을 당해 죽임을 당해야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죽음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뜻이 자신에게 임하기를 그대로 바란다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깨달음)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속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담겨 있어야 할 모습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들려올 때 내 마음에 부딪히고 세상의 관점과 맞지 않을 때도 말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내게 다가올 때 나의 자아를 부인하고 세상의 편견을 내려놓는 것 말입니다.
마리아처럼 죽음을 무릎쓰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진다면 기꺼이 복종하겠다는 종의 자세가 필요한 것 말이죠.
(적용)이런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께 드릴 때 무당이 굿을 하고 부채춤과 칼춤을 벌이듯이 하나님 앞에 요란을 떨 필요가 있겠습니까?
다만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충돌할 때, 하나님의 말씀과 내 자아가 충돌할 때, 내 뜻을 꺽고 복종하는데 진액이 빠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치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그때 주님께서 하신 기도는 핏방울 같이 떨어지는 땀방울의 기도였죠.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자아를 꺾는 기도에는 진액을 쏟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화)예전에 전도사 시절에 전주 태평교회에서 토요일 밤이 되면 다락방과 같은 곳에 올라가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만 홀로 올라간 게 아니라 신학교 후배되는 강훈 전도사와 함께 올라갔죠.
그런데 그 전도사님의 모습이 꼭 그런 기도였습니다.
한 시간 동안 기도를 하면 그야말로 땀방울이 흔건히 젖는 것이었죠.
그렇다고 고레고레 소리를 치거나 길길이 날뛰거나 바닥을 치거나 하는 듯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침묵 가운데서 온 진액을 쏟는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였죠.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 전도사님의 기도를 기뻐받으셨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죠.
내 자아를 강화하기 위해서, 내 소원성취를 위해서, 이 세상에 자아실현을 위해서 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말입니다.
오직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고,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니 말이죠.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도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기뻐받으실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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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북왕국 이스라엘의 7대 왕 아합은 지중해 해안가 도시인 두로의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단순한 정략결혼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 바알과 아세라 신이라는 두로의 신을 들여오는 일이기도 했죠.
그녀는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온 천지에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세웠고 백성들이 그 신을 섬기도록 조장했죠.
북이스라엘 나라도 바알과 아세라 신을 숭배하면 우리 두로처럼 부국강병한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시퍼렇게 살아계신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보여주시고자 엘리야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나 여호와의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아니하리라”(왕상17:1)
그때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을 두려워하여 요단강 앞 그릿 시냇가에 숨어 들어 갔습니다.
그런 엘리야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를 통해 먹이셨죠.
또 시돈 지역의 사르밧 과부에게 가서 먹을 것을 공궤받도록 했습니다.
그때 그녀의 집에는 밀가루 통과 기름 통이 다 떨어진 마당이요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과 함께 한 끼를 먹고 죽으려던 때였죠.
그런데 그녀는 자기 자이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엘리야를 대접할 때 가뭄이 끝날 때까지 떡반죽 그릇과 기름 통이 마르지 않는 복을 받게 되었죠.
더욱이 그의 아들이 머리가 아파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 그 아들의 생명을 살려내는 통로로 삼게 하셨죠.
(깨달음)하나님께서는 왜 그와 같은 일을 엘리야를 통해 주도하도록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엘리야가 아합과 이세벨 앞에 서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으로 보여주신 것이었죠.
아합과 이세벨 때문에 먹을 게 없어 굶주림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먹이실 것을 알려준 거죠.
심지어 아합와 이세벨 앞에서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엘리야의 생명을 책임져주시겠다는 뜻이었죠.
(전개)이제 하나님께서 정하신 3년 6개월의 기간이 지나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아합 왕과 이세벨에게 보냈죠.
그때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말하기를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갈멜산으로 보내도록 했습니다.
누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신인지, 하나님께서 참 신이신지, 바알과 아세라가 참 신인지 대결을 벌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함께 엘리야 선지자는 해발 450m의 갈멜산에 올라갔습니다.
해발 450m는 목포 유달산의 두 배 높이지만 팔레스타인의 지형상 갈멜산은 언덕빼기의 산과 같은 곳이죠.
그런데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 엘리야 선지자만 갈멜산 언덕빼기에 오른 게 아니었죠.
북이스라엘 땅에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던 수 많은 백성들도 그 대결을 보고자 구경꾼처럼 올라갔겠죠.
이를테면 구경꾼으로 올라간 수많은 백성들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편임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야의 편에는 한 사람도 없었겠습니까?
궁중 선지자 오바댜가 100명이 되는 무명의 선지자들을(왕상18:4) 굴 속에 숨겨 마실 물과 먹을 것을 공궤하며 섬겼죠.
그가 바로 구약의 오바댜서를 쓴 선지자로 알려져 있는데 ‘오바댜’란 ‘여호와의 종’이란 뜻입니다.
오바댜는 궁중에서 먹고 살았지만 아합 왕과 이세벨의 뜻을 따르기보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산 것이었죠.
그 오바댜와 100명이나 되는 무명의 선지자들도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 무명의 사람들이 엘리야를 따라 갈멜산 언덕에 올라간 것이었습니다.
그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은 제단을 쌓고 나무를 올려놓고 각을 뜬 송아지를 번제물로 올려놨죠.
아침부터 정오까지 ‘바알이여 바알이여’하고 그들의 신을 부르며 불로 응답해주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응답이 없자 이번에는 그 신을 향해 뛰면서 기도했고 그래도 응답이 없자 칼로 몸을 자해하면서 기도했죠.
그토록 요란한 부채춤과 방울춤과 칼춤을 추듯 바알을 향해 야단법썩을 떨지라도 하늘로부터 불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나섰죠.
엘리야는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도록 했는데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 돌을 취해 쌓도록 했습니다.
그것은 온통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제단을 쌓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번제단 위에 나무를 올려놓고 각을 뜬 송아지를 잡아 번제물로 올려 놓은 다음에 번제단 주변에 도랑을 파도록 했죠.
그 도랑의 폭이 곡식 종자 두 세 스아를 둘만한 도랑인데 쇼핑백 8ℓ짜리 크기 만큼의 도랑을 쭉 팠던 것이죠.
(깨달음)그런데 그렇게 판 도랑과 번제단과 번제물 위에 물을 가득히 부어서 도랑에도 넘쳐날 정도로 물을 부었죠.
그 물은 어디서 났는지, 왜 그 물을 붓게 했는지, 지난 시간에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그 물은 엘리야와 함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바라는 오바다야 100명의 무명의 선지자들이 마시려고 가져온 물이었습니다.
그 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하나님의 번제물을 부어드리는 헌신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죠.
특별히 ‘종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제라아’(זֶרַע)는 ‘씨앗’(seed)과 ‘후손’(offspring)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바알과 아세라를 쫓고 있는 이스라엘의 후손들까지도 온전히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제단에 그 후손을 드리는 헌신을 원하시는 것이었죠.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로 낳은 이삭을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 기꺼이 헌신의 제물로 모리아 산에 바친 모습처럼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제단에 전심으로 헌신하는 후손을 통해 놀라운 역사로 응답해주시는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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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인데 36-38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깨달음)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처럼 야단법석을 떨면서 기도한 게 아니었습니다.
춤을 추거나 부채춤을 추거나 칼춤을 추면서 기도한 게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가 기도한 내용은 먼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하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조상과 함께 하신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한 것이었죠.
그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임을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이신 것과 자신이 주의 종인 것과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는 것임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그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하는 것 말입니다.
그만큼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갈멜산에 불러 대결을 벌인 것도 실은 엘리야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 또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저 순종한 것이라는 뜻이죠.
왜 그렇습니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함께 대결을 벌이는 것 자체가 실은 엘리야가 위축되고 두려워할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 대결을 벌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엘리야가 두려움을 무릎쓰고 지금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나선 것이죠.
마치 마리아가 아이를 낳게 되면 돌에 맞아 죽을 게 뻔한데도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길 원하나이다”한 것처럼 말이죠.
(적용)그렇기에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다시금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게 무엇입니까?
기도란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기 위해 진액을 쏟는 것이죠.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께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기도란 내게 두려움이 몰려오고 내게 손해가 닥쳐와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종의 자세로 받드는 것이란 사실입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말씀을 받드는 게 죽음이 밀려오는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면 기꺼이 순종하는 것이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종의 기도를 드리길 원하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시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기도할 때 어떤 모습과 어떤 태도로 기도하는지 너 스스로를 돌아봐야 하지 않겠느냐?”
“바알와 아세라 선지자들의 기도처럼 무당이 기도하듯 야단법썩을 떨면서 기도하고 있지는 않느냐?”
“네가 기도할 때 부채춤을 추고 칼춤을 추듯이 자신을 강화하며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만 기도하는 것은 아니더냐?”
“하나님께서 불의 응답을 베푸신 엘리야의 기도는 언약의 하나님을 고백한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기도였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마리아가 돌팔매질을 당해 죽는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드러나는 아기 예수를 잉태하는 일에 기꺼이 순종하지 않었더냐?”
“엘리야도 지금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을 벌이러 갈멜산에 올라가는 일이 죽음을 무릎쓴 일이지 않더냐?”
“설령 그곳에서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영광이 세상에 드러난다면 그것으로 엘리야가 족한 것 아니더냐?”
“그만큼 너의 기도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종의 기도인지 살피면서 기도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주인행세하는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순종하려는 종의 기도를 기뻐받지 않겠느냐?”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주시를 갈망하며 진액을 쏟을 때 하나님께서 어찌 응답해주지 않겠느냐?”
(찬양)기도를 멈추지 마라 눈앞의 상황이 마음을 눌러도
원망치 마라 너의 입을 지켜라 저들은 너의 입을 보고 있다
마음을 뺏기지 마라 내가 널 도우지 않는단 소리에
너의 모든게 모든게 불리해도 너는 기도를 계속해라
너 기도를 멈추지 마라 내가 너의 그 모든 상황을 바로 역전시키리니
너 기도를 멈추지 마라 내가 잠시도 쉬지 않고 모든 걸 지켜보고 있으니
바로 역전되리라 저들의 힘이 너를 압도해도 저들의 힘이 네 숨을 조여도
너는 보리라 기도의 능력을 내가 역전시키리라
너 기도를 멈추지 마라 내가 너의 그 모든 상황을 바로 역전시키리니
너 기도를 멈추지 마라 내가 잠시도 쉬지 않고 모든 걸 지켜보고 있으니 바로 역전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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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직접 작사 작곡한 찬송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과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95개 조 반박문을 붙였습니다.
그 일로 루터는 1521년 10월 교황 레오(Leo) 10세에 의해 파문되고 출교 조치를 당하고 말죠.
더 이상 루터는 사제도 아니요 교수직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독일의 영주들이 루터에게 소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가 주재하는 보름스(Worms) 의회에 출석할 것을 통보하죠.
그때 루터의 친구들과 그를 아는 주위 사람들은 자칫 체포돼 감옥에 갇힐 수도 있으니 출석하지 말라고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그 소환장에 응하기로 하고 의회 일정 하루 전날인 4월 16일 보름스에 도착을 했습니다.
비텐베르크에서 보름스까지 700km인데 목포에서 서울까지 왕복이 넘는 길로 중세시대 한달은 걸렸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그 회의장을 향해 나아간 것이었습니다.
보름스에 도착한 이후 내일이면 의회에 나가 카를 5세 황제와 트리에르 대주교 앞에 심문을 받아야 하죠.
그날 밤 루터는 깊은 고뇌에 빠져 몸부림하듯 진액을 쏟는 기도를 했습니다.
누구보다도 고독했고, 그 어떤 일보다도 두려웠고, 자꾸만 마음이 약해지며 흔들리는 듯 신음하며 기도했습니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문득 그의 뇌리에 스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시편 46편 1절의 말씀이었죠.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 말씀이 루터의 뇌리와 심령에 떠오를 때 그때까지 가득찼던 고독과 두려움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지는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말씀이 루터의 심령에 계시처럼 다가와 큰 위로와 확신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었죠.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영감을 얻어 가사를 쓰고 곡을 붙여 만든 찬송이 <내 주는 강한 성이요>입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내 힘 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 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를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 아멘
루터는 밤새도록 그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에 의지해 다음과 같은 다짐을 했습니다.
“보름스 의회 지붕의 기왓장이 다 마귀라 해도 나는 그곳에 나가 당당히 진리를 밝히리라”
그러면서 루터는 다음날 아침 의회의 청문회장으로 나아갔습니다.
거기서 황제가 물었죠.
“그대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반한 모든 주장과 사상을 철회할 용의가 있는가?”
그러자 루터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나는 성서의 증거와 이성에 비추어 교황과 가톨릭의 가르침, 권위 등을 결코 인정할 수 없음을 말씀드립니다.”
“저의 신앙 양심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제 신앙 양심에 반한 그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아멘!”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로마 황제가 참석하는 제국의 회의장에 루터가 나가는 걸 모두가 만류했는데도 왜 루터는 그 뜻을 꺽지 않은 것입니까?
비텐베르크에서 보름스까지 한 달 걸려 도착했는데 정작 다음날 아침 회의장에 나가려는데 온갖 고독과 두려움이 밀려들었는데도 그가 죽음의 사지와도 같은 그곳을 향해 나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 앞에 진액을 쏟아내는 기도를 드렸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루터도 할 수만 있으면 그 고독과 두려움의 잔을 마시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분명하게 들려왔기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너의 자아를 드러내고 너의 자랑거리로 삼고자 하는 길이라면 내가 막아설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기에 네가 결단하고 나갔으면 좋겠구나’
그래서 루터가 진액을 쏟아내는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시편 46편 1절의 말씀으로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담대한 마음을 불어넣은 것이었죠.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적용)루터를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루터 역시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기까지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강화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는 주님의 종으로서 나선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일에 몸담고 있든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영광이 드러내는 종의 기도를 드린다면 그곳에 주님께서 친히 응답해주신다는 것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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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도)그러니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들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경우도 종의 기도를 잊지 않게 해 주세요.”
“기도할 때 내 뜻을 관철시키고자 진액을 쏟거나 내 자아를 강화하기 위해 통보하는 수준의 기도를 하지 않게 해 주세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기도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를 위해 진액을 쏟으며 기도하게 해 주세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을 부인하고자 진액을 쏟듯이, 마리아가 그 두려움 속에서도 말씀을 받들고자 기도하듯이 말예요.”
“엘리야가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 맞서는 게 고독이요 두려움이었지만 말씀을 좇아 복종하는 종의 기도를 드렸듯이 말예요.”
“루터가 한 달이나 걸려 보름스 제국의 회의장에 도착했지만 다음날 황제 앞에 서는 게 온갖 고독과 두려움에 밀려들었지만 시편의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듯이 말예요.”
“주님 저도 엘리야처럼 하나님 아버지 앞에 종의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해 주시고 어떤 말씀이든지 아멘으로 순종할 수 있는 기도를 드리게 해 주세요.”
“그때 엘리야의 기도에 불로 응답해주신 것처럼 제 삶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역전시켜주시는 응답을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찬양)기도를 멈추지 마라 눈앞의 상황이 마음을 눌러도
원망치 마라 너의 입을 지켜라 저들은 너의 입을 보고 있다
마음을 뺏기지 마라 내가 널 도우지 않는단 소리에
너의 모든게 모든게 불리해도 너는 기도를 계속해라
너 기도를 멈추지 마라 내가 너의 그 모든 상황을 바로 역전시키리니
너 기도를 멈추지 마라 내가 잠시도 쉬지 않고 모든 걸 지켜보고 있으니
바로 역전되리라 저들의 힘이 너를 압도해도 저들의 힘이 네 숨을 조여도
너는 보리라 기도의 능력을 내가 역전시키리라
너 기도를 멈추지 마라 내가 너의 그 모든 상황을 바로 역전시키리니
너 기도를 멈추지 마라 내가 잠시도 쉬지 않고 모든 걸 지켜보고 있으니 바로 역전되리라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속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엘리야처럼 종의 기도를 드리는 자세를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내 소원성취나 내 자아실현을 위한 기도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기도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자 하는 종의 기도 말입니다.
마리아처럼 예수님처럼 엘리야처럼 그리고 루터처럼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종의 기도를 드릴 때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놀라운 응답을 베풀어주실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종의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삶을 역전시키는 놀라운 역사의 현장으로 인도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축복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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