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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논지)신혼부부에게 자식이 생기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큰 기쁨일 것입니다.
그 아이가 자라면서 뒤집기를 하고 ‘엄마’ ‘아빠’하고 부를 때면 그 기쁨은 말로 설명할 수 없겠죠.
그런데 장성하면서 ‘엄마 아빠’라고 불러도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고 제 멋대로 산다면 어떨까요?
부모의 의견은 무시하고 자기 좋은 것만 좇아 산다면 부모와 무관한 자식이 될 수밖에 없겠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한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할 때 하나님은 너무나 기뻐하시겠죠.
그런데 아버지라고 고백은 하는데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산다면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지 않겠죠.
(깨달음)로마서 10장 10절은 그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시인할 때 참된 구원이 임한다는 뜻입니다.
영접기도는 그만큼 중요한 것이죠.
세상과 마귀에게 속한 자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데 어찌 천국에서 잔치를 열면서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마태복음 7장 21절은 이렇게 또 말씀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단계를 넘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자를 천국에 들이신다는 겁니다.
(적용)그렇기에 믿음은 입술의 고백에서부터 시작하지만 참된 믿음은 행함에 있다는 것이죠.
‘엄마 아빠’하고 고백은 하지만 부모님의 가르침에 무관하게 산다면 실은 남남과 다를 바 없죠.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한 이후에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산다면 그런 자녀를 하나님께서는 가장 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나오듯이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고 했는데 둘의 고백과 행동이 다른 것처럼 말이죠.
첫째는 입술로 대답했지만 행동하지 않았고 둘째는 입술로 고백하지 않았지만 뒤늦게 순종했을 때 둘째를 더 기뻐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성화)하나님은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도록 했고 그 피를 보시고 죽음의 심판을 넘어가셨죠.
어린양의 피가 없는 애굽 전역의 집엔 장자와 초태생이 모두 죽는 죽음의 재앙이 임했죠.
그날 여자와 어린 아이들을 뺀 남자 장정 60만명, 여자와 아이들까지 300만명에 달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빠져나와 홍해 앞에 다다랐죠.
6개월이 넘는 10가지 재앙이 지속됐고 또 마지막 장자의 죽음이 임할 때만 해도 더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 같은 파라오였죠.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빠져나간 지 1주일도 되지 않아 파라오는 최정예기마병 600대와 모든 군대를 동원해 추격토록 했죠.
이스라엘 백성이 당도한 곳이 홍해 앞 비하히롯이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물에 빠진 생쥐꼴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홍해를 갈라 좌우의 벽이 되게 하셨고 마른 땅처럼 그 길을 통과하게 해 주셨습니다.
새벽에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건너온 걸 알고 모세의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 홍해 바다 속에 애굽 군대가 몰살하도록 하셨습니다.
그와 같은 놀라운 모습을 바라본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소리치며 찬양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15:2)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빠져나오기 전에도 10가지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맛보았죠.
지금은 폭 32km나 되는 그 거대한 바다를 가르시고 마른 땅처럼 통과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 백성이 모두 건넌 후에는 그 바다 속에서 애굽 군대를 모두 전멸시켰으니 그 백성들이 놀랄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하나님은 지존자시다’ ‘하나님은 전능자시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 자신을 알아주는 그들의 고백을 너무나도 기뻐받으셨겠죠.
그런데 그 고백 이후에 그 백성이 어떻게 했습니까?
마라에 쓴물을 만났을 때 르비딤에서 물이 없을 때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정복할 수 없다고 보고할 때, 그들은 그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모습이었죠.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와 기도 응답을 받았어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은 입술로 끝나버렸다는 것입니다.
(적용)그만큼 믿음은 입술의 고백에서부터 시작되지만 참된 믿음은 그 후의 행함에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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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북왕국 이스라엘 7대왕 아합은 지중해 도시 두로의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았죠.
단순한 정략결혼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 바알과 아세라 신이라는 두로의 신을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북이스라엘 나라가 바알과 아세라 신을 숭배하면 두로처럼 부국할수 있다고 유혹한 거죠.
그러나 하나님은 시퍼렇게 살아계신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보여주고자 엘리야를 통해 말씀하셨죠.
“나 여호와의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아니하리라”(왕상17:1)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이스라엘 땅에 가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아합과 이세벨을 두려워해 요단강앞 그릿 시냇가에 숨었는데 까마귀를 통해 먹이셨죠.
기름과 밀가루가 떨어진 사르밧 과부에게 가서 먹을 달라고 했는데 그녀는 하나님을 섬기듯 엘리야를 대접했는데 가뭄이 끝날 때까지 기름통과 밀가루통이 떨어지지 않는 복을 받았죠.
그 아들의 머리가 아파 죽었을 때에는 엘리야를 통해 다시금 하나님께서 살려주셨죠.
그 모든 일은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자 하신 일이었습니다.
설령 아합과 이세벨 앞에 서는 일이 두려워도 두려워하지 말고 굶어 죽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을 보여주신 일이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는 주님의 말씀을 이루시는 모습이었죠.
이제 3년 6개월이 지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아합과 이세벨 앞에 보내셨죠.
그때 엘리야는 왕실의 보호를 받고 있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갈멜산 언덕빼기로 보내도록 했죠.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주시는 신이 누구인지, 여호와이신지 바알인지 대결토록 하자는 뜻이었죠.
그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뿐만 아니라 바알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구경하고자 함께 올라갔죠.
물론 엘리야와 함께 올라간 자들도 있었습니다.
오바댜 선지자가 100명에 달하는 무명의 선지자들을 동굴에 숨겨 먹이고 입혔는데 그들이 함께 동행한 것이었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오전부터 정오까지 제단을 쌓고 나무를 올려놓고 소를 잡아 번제물로 올렸죠.
이제 ‘바알이여 응답하소서’ 고레고레 소리를 질렀는데 응답이 없자 제단 앞에서 춤을 췄죠.
그래도 응답이 없자 칼로 몸을 자해하듯 칼춤을 췄는데 그토록 야단법썩을 떨어도 응답은 없었죠.
저녁 무렵 엘리야는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도록 했는데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돌 12개를 취해 제단을 쌓도록 했죠.
이제 소를 잡아 각을 뜨고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번제단 주변에 쇼핑백 8ℓ만큼 도랑을 파게 했죠.
그리고는 함께 한 100명의 선지자들이 마시려고 가져온 물병의 물을 번제단과 도랑에 마지막 한방울까지 다 쏟아붓게 했죠.
그리고는 엘리야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진액을 쏟듯이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첫 번째 운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였습니다.
하나님은 조상적부터 자기 백성을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신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한 것이죠.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지금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대결을 벌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하는 일이라는 고백이죠.
그만큼 엘리야는 자신을 과시하거나 드러내고자 대결을 벌인 게 게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손종하여 행하는 ‘종의 기도’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기도하는 내용은 그것입니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나타내 주시도록, 바알에게 향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도록 응답해 달라고 간구하는 모습이죠.
(원해)그러자 본문 38절의 말씀처럼 놀라운 일이 일어났죠.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여기에 ‘핥은지라’는 히브리어 ‘아갈’(אָכַל)은 ‘삼키다’ ‘먹어치우다’ ‘소비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 번제물과 번제단과 심지어 도랑의 물까지도 홍해바다를 마른땅처럼 만들 듯이 한순간 다 사라지게 하셨다는 것이죠.
(깨달음)그러니 우리가 기도하는 수준이 어떤 기도여야 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것이죠.
기도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처럼 고레고레 소리치거나 칼춤추듯 야단법석을 떨지 않고 하나님께 정조준하는 고백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란 나를 과시하거나 나를 드러내거나 자아실현을 위해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따르는 기도임을 알 수 있죠.
기도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것이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종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것보다 더 감격스럽고 더 놀라운 역사가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인 반응인데 본문 39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깨달음)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태워버릴 때 백성들이 보인 반응이죠.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어떤 의미가 담긴 고백입니까?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주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시구나, 하는 고백이죠.
하나님만이 이스라엘 온 땅에 살아계신 분이구나, 그 분만이 참 신이구나, 하는 고백이죠.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뒤 애굽군대를 몰살 시킨 장면을 보고서 고백한 것과 똑같은 고백의 찬양이죠.
(원성)이런 고백은 시편 100편 3절에도 나와 있는 고백과 찬양입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깨달음)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신 분이고, 우리는 그분의 것이자 소유된 백성이요 그분이 기르시는 양이라고 말이죠.
그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그런데 홍해를 건넜을 때 홍해바다에 애굽 군대를 몰살시켰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양한 이후에 어떻게 했습니까?
그 백성들의 고백과 찬양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어찌 기뻐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자식이 부모의 존재감을 알아줄 때 부모가 기뻐하듯이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을 알아주는 고백을 할 때 그 기쁨은 말로 할 수 없겠죠.
문제는 그 고백을 한 이후의 모습이라는 점입니다.
입술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고 찬양한 그들이 그 후에 다시금 하나님을 등지는 모습으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홍해를 건너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장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고백하고 찬양했지만 그 후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모습으로 전락한 것처럼 말이죠.
이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왕으로 옹립하려던 신약시대의 군중도 마찬가지였죠.
그들도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 때 메시아로 삼고자 했죠.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그들이 소리치며 고백한 것도 그것이었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21:9)
예수님을 따른 그 많은 군중들은 그 즉시 예수님을 왕으로 메시아로 모시려고 야단법썩을 떨었죠.
하지만 불과 닷새 뒤에 예수님께서 힘없이 체포돼 빌라도 법정을 비롯해 다섯 번의 법정에 끌려갈때는 어떻게 변질됩니까?
그 어떤 능력도 보여주지 않는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도 돌변하는 그들이었죠.
(적용)그렇기에 믿음은 입술의 고백에서부터 시작되지만 참된 믿음은 끝까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믿고 응답해드리는 삶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내 삶에 기적이 일어나고 기도응답을 받는 것은 너무나도 소중한 일이요 그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백을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고백과 찬양 이후의 믿음은 신실한 삶의 응답, 변함없는 삶의 응답에 달려 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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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죠?
(은혜)주님께서는 입술의 고백에서 시작된 우리 믿음이 삶의 신실함으로 응답해드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하나님께서 홍해바다를 건너게 하셨고 그 바다에 애굽군대를 몰살시켰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고백했었느냐?”
“갈멜산 언덕빼기에 불을 내려 번제물과 번제단과 도랑의 물까지 완전히 태워버렸을 때 그와 같은 대역사 앞에 이스라엘의 구경꾼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찬양하고 고백했었느냐?”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오병이의 기적을 베풀고 죽은 자를 살려낼 때 그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메시아라고 얼마나 찬양하고 떠들어댔느냐?”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다’ ‘여호와는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구주시다’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입술의 고백에서 끝나버렸을 뿐 그들의 삶 속에서는 주님과 무관한 자들로 변하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믿음은 입술의 고백에서부터 시작될지라도 참된 믿음은 그의 삶 속에 하나님되심을 신실하게 믿고 따르는데 있지 않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기도 응답을 받을 때 입술의 고백을 넘어 너의 삶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걸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겠느냐?”
“믿음이 입술의 고백에서 시작될지 몰라도 참된 믿음은 그 후로도 변함없는 신실한 삶의 응답에 있지 않더냐?”
(찬양)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믿음 흔들리고 사람들 주를 떠나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나라는 영원히 쇠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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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엊그제 어떤 목사님이 보신탕을 산다고 해서 중등포 보신탕 집을 처음 찾아갔습니다.
4명의 목사님이 보신탕을 먹었는데, 그중에는 몇 년 안에 은퇴하시는 목사님도 계셨죠.
보신탕을 산 목사님은 다른 두분에게 신세를 져서 산 것이고 저는 동생분의 책을 교정해줘서 사셨습니다.
밥을 먹고 이제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면서 저희 교회 상황에 대해 묻길래 저는 원로 격인 그 목사님께 그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희 교회 옆에 현대힐스테이 아파트가 들어온다는데 아파트를 짓기 전에 교회 외벽을 라인메탈 판넬로 붙였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도 아니라면 교회 인근에 주보를 들고 전도를 해도 잘 오지 않는데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도 좋겠구요.”
“그도 아니라면 은퇴하시는 목사님의 교회와 합병해서 그분의 은퇴 예후를 해 드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유지재단에 등록돼 있는 교회 재산을 저희 교회에 내 줄 수 있을까요?”
그랬더니 유지재단 이사로 섬긴 그 목사님이 그렇게 대답을 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둘 다 가능해요.”
“지금은 합병하는 추세라 합병할 수 있으면 합병하는 것도 좋을 거고요.”하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더 깊이 기도해봐야겠다’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곧바로 다른 지방회에 소속된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나이가 60대 중반을 향해 가고 있는데도 전도지를 들고 목포 시내 아파트를 다 돌았다는 것입니다.
그때 제 얼굴이 괜히 빨게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속으로 다짐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교회예배당 외벽을 라인메탈판넬로 덮어주시든, 옮겨주시든지, 합병해주시든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길로 열어주세요.”
“다만 그 전에 주보에 설교를 잘 담아 매주 두 세 번은 아파트 계단을 오르며 집집마다 꽂아놓고 기도하겠습니다”
“목포 시내 아파트 전체를 돌면 좋겠지만 그렇게는 못해도 반경 3km 안쪽 아파트는 다 돌겠습니다.”
(깨달음)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인지 아시겠죠?
교회 부흥을 위해 입술로 고백하는 것은 쉽지만 그 이상으로 신실한 삶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교회 부흥을 꿈꾸지 않는 분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꿈꾼다고, 소리쳐 외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가족이라도 형제라도 친인척이라도 함께 모셔서 예배할 때 부흥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로다”
내가 만난 하나님, 기적을 베푸신 그 하나님을 내 가족과 형제와 친인척에게 소개해서 함께 예배할 때 부흥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입술로 고백하는 단계를 넘어 삶으로 보여주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니 말입니다.
그를 위해 제가 해보지 못한 일, 목포에 있는 반경 3km 아파트 계단을 운동삼아 오르면서 주보를 꽂아놓고 기도하려고 하는 것이죠.
제가 할 수 있는 삶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내기도)오늘 저와 여러분이 본문을 통해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실까요?
“그래요. 주님.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해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이스라엘 백성이 보고 소리쳤습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의 능력 앞에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렸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푼 예수님을 향해 메시아라고 다윗의 후손이요 만왕의 왕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입술의 고백 이후에 그 백성들의 삶은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입술의 고백을 넘아 삶으로 입증되는 것이오니, 저도 제 믿음을 삶으로 입증하며 살게 해 주세요.”
“우리교회를 새롭게 하시는 게 주님의 주권일진데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삶으로 순종하는 도구가 되게 해 주세요.”
“교회 부흥을 진정으로 갈망하오니 제 가족과 형제와 친척을 데려와 함께 예배하고 함께 찬양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입술로 하는 고백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사오니 부족하지만 한 계단 한 계단 아파트를 오르듯 삶으로 살아내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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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마음 만져 주소서 하나님 나의 영혼 새롭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기도 들어주소서 하나님 주의 길로 인도하소서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가 없는 법이죠.
하지만 우리 주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애가 아빠 엄마하고 부를 때 얼마나 기쁨이 넘치겠습니까?
하지만 장성한 이후에는 엄마 아빠의 가르침과 교훈을 따라 참되게 살아가는 자식을 그 부모가 더더욱 기뻐하며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자녀의 믿음도 바로 거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기도 응답을 받은 이후에 ‘여호와 그는 우리 하나님이로다’하는 고백으로 끝나지 않고 삶의 신실함으로 순종하여 사는 것 말입니다 .
우리의 삶의 중심을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되 입술로 고백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삶으로 응답하여 드리는 믿음의 삶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교회를 새롭게 하시는 게 하나님의 주권일진데 그를 위해 입술의 고백을 넘어 내가 순종하여 행할 수 있는 것으로 응답해 드리는 복된 주역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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