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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이번주 수요일부터 고린도전서를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이전까지 살펴본 사도행전을 끝냈고 고린도전서를 통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함입니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를 향해 쓴 바울의 편지입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유럽의 마게도냐로 건너가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테네 고린도로 내려갔죠.
당시 고린도는 성 외곽이 10km에 달했고 60만명이 살았고 동쪽과 서쪽에 무역항이 있었죠.
더욱이 아크로폴리스 성채가 있었고 그 위에 비너스 신전을 비롯해 여러 신전이 우뚝 서 있었죠.
그 신전에서 섬기는 여사제가 1천명이었는데 밤에는 고린도 시내 내려와 매음을 하던 창녀였죠.
2천년 전 고린도는 로마제국 내에서 네 번째 큰 도시였으니 가히 황제의 도시라 할 수 있었죠.
바로 그 성읍에 바울이 들어가 브리스길리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텐트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고 안식일엔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죠.
하지만 대다수의 유대인이 복음을 거부하고 핍박했는데 바울은 유스도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죠.
고린도교회는 유스도의 집에서 모인 10명 안팎의 사람들로부터 태동이 된 교회였습니다.
그곳에서 1년 6개월을 섬겼는데 이후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 머물 때 고린도교회의 좋지 못한 소식을 들었죠.
그래서 네 개의 편지를 써 보냈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게 고린도전후서입니다.
(깨달음)인구 60만명이 사는 고린도시의 유스도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누가 관심을 가졌을까요?
유스도의 식구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모인 그곳에 말이죠.
높은 성채에 여러 신전이 우뚝 서 있고 그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 반해 유스도의 집에는 10명밖에 모이지 않는 모임인데 말이죠.
그때 그 작고 초라한 모임에 누구 하나 눈길을 줬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3절을 통해 고린도교회에 대해 이렇게 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고린도 시내의 유스도 집에 모여든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켜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릅니다.
로마제국에서 네 번째 큰 도시요 인구 60만명이 살고 있는 그곳에 유스도의 집은 점에 불과한데 말이죠.
그 도시에 비너스 신전이 있고 천명의 여사제가 제사드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모임을 갖고 있어도 말이죠.
하나님께서 마음을 쏟아부으시고 눈길을 두시는 곳은 수의 많고 적음 크고 화려함에 달려있지 않다는 거죠.
하나님께서는 오직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주님을 찬양하는 성도들의 모임에 마음과 눈길을 쏟아붓는다는 것입니다.
(적용)지금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말씀을 나누는 교회는 모두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가 크든 작든 대도시에 있든 시골에 있든 유럽이든 중국의 지하 교회든 모두 ‘하나님의 교회’라는 거죠.
이단과 사이비를 제외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좇는 교회는 우주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지구 반대편에 있어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있어도,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물론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78억명 가운데 기독교인은 25억명에 달합니다.
주일이면 각 나라 각 지역에서 각 환경의 처소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예배를 드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리스도인들보다 이 세상과 사탄의 세력에 사로잡힌 이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과 눈길이 어디에 쏠려 있겠습니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듯이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듯이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모임에 온 마음과 눈길을 쏟아붓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 교회가 천명을 이루든 백명을 이루든 열명을 이루든 하나님은 모든 교회를 하나님의교회로 존귀하게 품는 분이시죠.
그 교회 모임에 다섯 달란트 받은 이나 두 달란트 받은 이나 한 달란트 받은 이가 있을지라도 말이죠.
그 교회 모임에 이 세상에 크고 작은 영향력을 펼치는 이가 있거나 설령 없을지라도 말이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교회든지간에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분이기 때문이죠.
(나예)엊그제 수원에 있는 하나요양병원에 다녀 왔습니다.
몸이 급작스레 좋지 않아 죽음을 앞에 둔 형님을 찾아뵙고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돕고자 함이었죠.
불과 한 두 달 전만 해도 강퍅하게 자기밖에 모르는 다른 사람은 안하무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요일날 오전 10시 반에 찾아뵈었을 땐 정말로 순한 양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예수님의 예자도 꺼내지 말라고 하던 그 분이 그 날은 주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했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는 영접기도까지 따라 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게 있었습니다.
아무리 강퍅한 사람이라 해도, 자기주장이 완고하다해도, 죽음 앞에 직면하면 모든 걸 내려놓는구나, 하고 말이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영혼이 돌아오도록 얼마나 많이 기다렸을지 알 수 있었습니다.
(깨달음)그만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때를 바라보고 기다리며 묵묵히 일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죠.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할 때까지”(합2:14)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당신이 영광받는 길을 택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과정에서 한 영혼이라도 주님의 품에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그런 영혼이 주님 품 안에 돌아올 때 어찌 천국에서 큰 잔치를 벌이지 않겠습니까?
집나간 탕자가 아버지 품에 돌아올 때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살진 고기를 잡아 잔치하듯 말이죠.
(적용)그날 영접기도를 하고 면회를 마친 후이 그분을 간호하는 식구들과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랬더니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걸, 손은 안으로 굽는다는 걸, 또다시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 분은 가족과 형제들 사이에 이기적이고 완고할지라도 서로들 끌어안고 기도를 해오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것이 실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실은 이기적이고 고집스런 내가 변화되기를 바라며 묵묵히 기다리며 일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0899457
(역배)요한복음은 A.D.90년경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로서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쓴 편지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임을 천명코자 말이죠.
그를 위해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7가지 기적’과 ‘7가지 존재증명’에 대해서 밝혀줬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요2:1-12)이이었죠.
둘째는 왕의 신하가 앓고 있는 병을 예수님께서 직접 가지 않고 원격으로 고친 기적(요4:46-54)이죠.
셋째는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친 기적(요5:1-9)이었습니다.
넷째는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인 기적(요6:1-14)이었죠.
다섯째는 물 위로 걸어간 예수님의 기적(요6:16-21)입니다.
여섯째는 소경을 고쳐 눈을 뜨게 한 기적(요9:1-7)이었죠.
마지막 일곱번째 죽은 지 나흘 돼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나사로를 살린 기적(요11:1-44)이었죠.
예수님은 사물의 질과 양과 공간과 시간과 자연법칙과 타고난 운명과 죽음까지 초월하는 분임을 알린 것입니다.
그런 기적을 행하면서 중간중간에 예수님께서 ‘7가지 존재증명’에 대해 밝힌 말씀도 언급했습니다.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εἰμι〜 ἐγὼ’ 영어로는 ‘I am that I am’(나는 –이다.)이라고 한 말씀이죠.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41,48,50,51,58)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9:5,12:46)
“나는 양의 문이다”(10:7,9)
“나는 선한 목자다”(10:11,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5)
그리고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빌라도가 물을 때 예수님께서 “나는 왕이다”(18:37) 하신 말씀이 그거죠.
물론 ‘에고 에이미’는 예수님이 처음 사용한 말씀이 아니라 구약의 출애굽기에 나온 하나님의 말씀이셨죠.
모세가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소개할까요,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הָיָה הָיָה하야 하야, I am that I am)”(출3:14)하고 대답해주셨죠.
그것이 70인역에서 “에고 에이미(εἰμι〜 ἐγὼ)”로 번역됐고 예수님께서 동일하게 사용하신 말씀이죠.
오늘 읽은 요한복음 15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해서 3년간 훈련을 거친 뒤 최후의 만찬을 나누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 밤이 지나 빌라도의 법정을 비롯해 다섯 번의 법정을 거쳐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죽으셨죠.
그를 위해서 제자들을 모아 제자강화의 시간을 따로 가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대야에 물을 떠 제자들의 발을 씻긴 후 떡을 떼고 잔을 나누면서 서로 사랑하라 당부하셨죠.
그 일이 끝났을 때 가롯 유다는 문을 열고 대제사장들의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죽일 계략을 짰죠.
예수님은 그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십자가 잔을 놓고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도록 진액을 쏟으며 기도를 하셨고요.
(본문)본문은 십자가 죽음을 앞에 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본문 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원해)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 ‘참포도나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참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래 포도나무였지만 가나안 땅에 옮겨 심은 후에 이방 종교과 우상에 심취하며 들포도만 맺는 것이었죠.
그래서 이사야와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은 자들을 보내서 그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와 극상품 포도열매를 맺길 바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지만 가망이 없다는 걸 아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 민족을 모두 구원할 방도를 찾으셨죠.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길이고 모든 인류를 구원코자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참포도나무라고 밝히면서 주님께 접붙여 있는 자들은 누구나 구원받게 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신 것이었습니다.
지금 마가의 다락방에 있는 제자들도,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도 참포도나무이신 주님께 접붙여 사는 자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태껏 자기 밖에 모른 채 강포하기 그지 없는 사람이라도 마지막에 돌아오면 주님의 포도원에 들어오는 구원받는 자녀로 삼아주듯이 말이죠.
예수님께서 그렇게 첫 운을 떼신 다음에 곧바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말씀하는 게 있습니다.
“내 아버지는 농부라”
‘농부’로 번역된 헬라어 ‘게오르고스’(γεωργός) ‘땅’을 뜻하는 ‘게’(γῆ)와 ‘일하다’는 ‘에르곤’(ἔργον)의 합성어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 ‘포도원을 가꾸는 농부’(a vine dresser)로 번역이 돼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과 마가복음 12장 그리고 누가복음 20장에 모두 ‘농부’로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디모데후서 2장 6절도 마찬가지죠.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런가 하면 야고보서 5장 7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깨달음)주님께서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말씀하신 바를 통해 깨닫는 게 무엇입니까?
농부란 포도원의 농사를 짓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밝혀주듯 포도원 농부는 마른 가지는 도려내고 열매 맺는 가지를 깨끗이 손질합니다.
그러니 무척이나 바쁠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포도원 농부는 마른 가지는 자르고 싱싱한 가지만 잘 손질해주는 것입니다.
제가 예배당 옆 텃밭 모서리에다 포도나무를 세 그루 심었습니다.
해마다 포도송이 열매를 따 먹는데 몇 해 전엔 한 그루가 죽었습니다.
그 포도나무는 뿌리채 뽑아버렸죠.
이제 두 그루 남았는데 그중에서도 메마른 가지는 잘라주고 좋은 가지는 더 좋게 손질을 해주죠.
그런 다음에 제가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묵묵히 지켜보면서 기다리는 것이죠.
마치 야고보서 5장 7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적용)그만큼 포도나무의 결실은 농부의 기다림의 결실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포도원의 농부는 피는 물보다 진하듯 팔은 안으로 굽듯이 자기 포도원의 포도나무에게 온 마음과 눈길이 쏠려 있습니다.
내가 돌보는 포도나무 가지가 말라버리진 않았는지, 열매를 맺는데 어려움은 없는지 말이죠.
그러면서 이른 비가 오기를 기다리고 또 늦은 비가 오기를 기다리며 포도나무를 묵묵히 바라보는 것이죠.
물론 어느 해는 많이 열매를 맺기도 하고 또 다른 해에는 훨씬 적게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그래도 뽑아버리지 않고 다음 해를 기약하면서 묵묵히 기다리게 됩니다.
그렇듯 포도나무의 결실은 기다림의 결실입니다.
농부되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심정으로 우리를 향해 바라보시고 세상의 강퍅한 자들도 그런 마음으로 기다려주고 계시는 것이죠.
(적용)이것은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성읍 둘레가 10km가 넘고 인구 60만명이 넘는 고린도 시민들에게 하나님의 마음과 눈길이 쏠려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과 눈길은 유스도의 집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10명 안팎의 성도들에게 온 마음과 눈길을 쏟아붓는 분이시죠.
요양병원에 입원해 죽음을 앞둔 그 형님을 위해 기도하던 식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가족들이 그분의 구원을 위해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며 기다려왔겠습니까?
그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묵묵히 기다려오셨고 드디어 죽음 앞에 온순한 양이 되도록 그를 꺾어 주님을 영접토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농부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자 하나님 아버지의 일하심이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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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주님께서는 하나님의 포도원에 속한 포도나무인 우리를 향한 기다림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거죠.
(주음성)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인구 60만의 거대한 고린도의 성채와 신전에 모여드는 수많은 무리에 비해 10명이 모이는 교회를 누가 눈여겨봤겠느냐?”
“세상 모든 이들이 황제의 논리대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좇아 살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도 피는 물보다 진하고 팔은 안으로 굽듯이 하나님께서도 고린교회 성도들을 향해 온 마음과 눈길을 쏟아붓지 않았겠느냐?”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 주님 품에 돌아오는 열매를 맺기까지 농부의 심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다려주지 않았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교회가 유럽이든 미국이든 중국의 지하든 그 수가 많든 적든 모두 하나님의교회로 소중히 품으시는 분 아니겠느냐?”
“유스도 집에 모인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초라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물보다 진한 피처럼 안으로 굽는 팔처럼 그 누구보다도 귀하게 보지 않았겠느냐?”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때까지 농부되신 아버지께서도 묵묵히 기다리며 일하시지 않겠느냐?”
“그 강퍅한 형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따라 일하며 묵묵히 기도할 때 완고한 고집을 꺾고 순전한 양처럼 주님을 영접하도록 하셨으니 말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자유로교회에 속한 너를 하나님의교회로 여기며 네가 열매를 맺기까지 묵묵히 기다리며 일하시는 분 아니겠느냐?”
(찬양)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예화)중국의 어떤 농부가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재산의 반을 처분해 말 한 필을 구입해줬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순식간에 도망쳐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동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 농부를 위로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불행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 늙은 농부는 아주 태연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글쎄요. 이 일이 불행한 일인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로부터 얼마 뒤에 도망간 말이 값비싼 종마를 데리고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 몰려와서 그렇게 소리쳤습니다.
“이야. 복이 넝쿨째 굴러들어 왔구려.”
그런데 그 늙은 농부는 이번에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이 복이라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 후에 종마를 길들이던 아들이 말의 뒷발에 차여 그만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이웃 사람들은 또다시 몰려들어 그 농부를 위로했습니다.
그런데 이때도 그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일이 불행이라는 것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로부터 얼마 후 전쟁이 터졌고 그 마을에 건강한 젊은이들은 모두 전쟁터로 끌려나갔습니다.
하지만 불구가 된 그 아들은 그 마을에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 같습니까?
모든 걸 성급하게 결론짓지 말라는 것 아닙니까?
그 늙은 농부처럼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기도 하고 화가 변하여 복이 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만사의 때를 하나님께 내어 맡기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따라 묵묵히 기다리며 사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그토록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부모의 속을 썩이는 자식이 있을지라도 부모보다 먼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하며 살 때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일으켜주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완강하고 고집이 쎄서 주님을 거부할지라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따라 기도하며 살 때 하나님의 때에 온순한 양으로 그 고집을 꺾어 주님을 주님으로 모셔들이게 하듯이 말입니다.
함께 사는 부부라도 함께 일하는 동료라도 함께 신앙생활하는 성도라 해도 목사라 해도 누가 다 마음에 들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농부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따라 묵묵히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놀라운 열매를 맺게 하실 줄 믿습니다.
(적용)그래서 전도서 9장 11절은 그렇게 말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우리 인생의 모든 시기와 때는 농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따라 일하며 하나님의 기다리심을 따라 기다리며 사는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열매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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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화가 변하여 복이 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아들에게 말 한 필 사줬는데 그 말이 불러들인 종로 아들의 다리가 부러졌지만 전쟁터에 나가지 않는 은혜를 덧입어요.”
“인생에서 빠른 경주자라고 먼저 도착하는 것도 용사라고 전쟁에서 승리만 하는 것만 아님을 압니다.”
“지혜자라고 해서 명철자라고 해서 매번 음식과 재물과 능력을 발휘하는 게 아님을 압니다.”
“모든 시기와 때는 우리 인생의 농부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아요.”
“그러니 제가 어떤 포도원에 놓여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따라 일하고 하나님의 기다리심을 따라 기다리며 살게 해 주세요.”
“그토록 완고하고 고집스런 그분도 주님께서 작정하신 때가 되어 순한 양처럼 주님을 영접하게 하셨사오니 저희들이 바라며 기도하는 영혼도 주님의 일하심 속에 돌아오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도 주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자유로교회에 속한 저희 한 영혼 한 영혼을 향해 농부의 심정으로 바라보며 저희를 위해 묵묵히 일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찬양)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많이 알고 계시며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깊이 이해하신단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절대 포기 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쉬지 않고 지켜보신단단
그의 생각 셀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그의 성심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없단다
하나님은 너를 원하시는 분 이 세상 그 무엇 그 누구보다
하나님은 너를 원하시는 분 너와 같이 있고 싶어 하신단다
하나님은 너를 인도하는 분 광야에서도 고통중에도
하나님은 너를 인도하는 분 푸른초장으로 인도하신단다
그의 생각 셀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그의 성심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 없단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2960924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포도원의 농부되시는 아버지로서 우리 인생의 농부이십니다.
내게 말라버린 부위는 없는지 병해충에 노출된 부분은 없는지 살펴주시는 분이십니다.
내 심령에 영적인 병해충들을 박멸코자 하시는 분이요 열매맺는 부분은 더 풍성케 맺도록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듯 팔은 안으로 굽듯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자녀들을 어찌 세상에 속한 자들보다 귀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의 마귀에게 속한 자들을 향해서도 주님께 돌아오도록 일하시는 아바 아버지시죠.
그 영혼이 주님께 돌아와 열매맺기까지 우리도 주님의 일하심을 따라 일하며 주님의 기다리심을 따라 기다리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어 그 강퍅한 영혼이 주님 앞에 순한 양이 되어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듯이 그렇게 일하시는 주님의 바라보며 묵묵히 기다리는 저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설령 내 마음에 차지 않는 사람이 있어도 동료가 있어도 그가 목사라 할지라도 묵묵히 바라보며 일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품고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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