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설교열기)(성화)새벽기도회 때 살펴본 스바냐 3장 17절 말씀이 아직도 제 마음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3:17)
이 말씀은 복음송으로도 많이 불리는 말씀의 가사이기도 하죠.
그만큼 한국교회 많은 성도들이 암송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본래 ‘스바냐’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에 의해 감추다’ 곧 ‘여호와의 심판에 날에 구원받는다’는 뜻입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7살에 왕위에 오른 남왕국 유다의 제16대 왕 요시야가 통치할 때였죠.
그가 왕권을 잡기 전 모든 유다 백성들이 죄악과 탐욕과 우상숭배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몬 왕의 2년 통치기간은 물론이고 할아버지 므낫세의 55년간의 통치기간도 마찬가지였죠.
특히 요시야 왕의 할아버지 므낫세는 하나님의 성전문을 닫고 제단도 허물어버린 장본이었습니다.
심지어 므낫세 왕은 이사야 선지자를 톱으로 켜서 죽게 한 왕으로 탈무드에 전해내려옵니다.
그런 할아버지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요시야가 7살에 왕위에 올랐으니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스바냐로 하여금 유다 땅에 심판의 날을 선포하도록 한 것입니다.
죄와 탐욕과 우상숭배에서 돌이켜 하나님 앞에 모여 회개하며 하나님을 구하도록 말이죠.
능력있는 자가 가난한 자와 연약한 자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고 공의를 행하도록 말이죠.
어떤 위치에 있든지 겸손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스냐서 3장 마지막 부분에는 여호와의 날 곧 심판의 날에 구원을 선포하며 끝맺게 했습니다.
죄와 탐욕과 우상숭배에 빠져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은 ‘여호와의 날’에 심판받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을 찾고 공의와 정의를 행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을 숨겨주시고 구원해주신다고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스바냐서의 핵심입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일깨워주시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심령에 깊이 각인시켜 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3:17)
(깨달음)지금 지구 곳곳에서 말세의 징조가 펼치지고 있습니다.
곳곳에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넘쳐나고 전쟁과 테러가 끊이지 않고 동성애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해수면이 점점 높아 몇 년 안에 인천공항도 물에 잠길 수 있어서 방파제를 세워야 할지 모릅니다.
이 모든 게 재난의 시작이자 주님의 심판의 날이 임박해 있다는 징조 아니겠습니까?
이런 심판의 날에 누가 하나님에 의해 숨김을 받는다는 겁니까?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는 자들’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보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자들’이죠.
‘이 혼탁한 세상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살고자 하는 자들’이죠.
‘죄와 탐욕과 우상숭배가 가득한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의나라와 의를 구하며 사는 자들’이죠.
그것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자’입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원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와 같은 자들’이죠.
그것은 곧 구약의 등잔대 곧 금촛대와 같은 형상의 모습입니다.
(적용)구약의 등잔대 곧 금촛대를 히브리어로 ‘메노라’(מְּנֹרָ֖ה, lamp stand, 출25:31)라고 부릅니다.
출애굽기 25장 31-40절을 보면 성막에 순금을 쳐 등잔대 곧 금촛대를 만들도록 한 말씀이 나오죠,.
그 모양은 살구나무와 같은 원줄기가 있고 좌우 양쪽에 세 개의 줄기가 뻗어 있는 형국입니다.
총 7개의 끝부분에 촛대 받침을 만들어 감람유 기름으로 어두운 성막과 성전의 불을 24시간 밝히게 한 거죠.
살구나무는 실은 아몬드 나무인데 겨우내 죽은 듯한 그 나무가 봄철에 새생명을 피워냅니다.
실은 그것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로 인해 상실한 ‘생명나무’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죠.
이스라엘 백성이 반역을 꾀할 때 12지파 대표자들의 지팡이를 가져오게 했는데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났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실은 아몬드 살구나무(민17:8)요 예수 그리스도 생명과 부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살구나무 형상의 등잔대 7개 곧 7개의 금촛대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겠습니까?
요한계시록 1장을 보면 7촛대가 나오는데 그것이 일곱교회이고 일곱교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좌정해 계신다(계1:12-20)고 말씀하죠.
일곱교회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교회를 세우는 지구상의 모든 교회를 일컫는 것이죠.
그 교회가 천명을 이루든 백명을 이루든 만 명을 이루는 고린도교회의 태동처럼 10명을 이루든 말이죠.
종합하면 살구나무 형상으로 만든 메노라 그 금잔대 곧 금촛대 원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빛입니다.
그 원나무 줄기에 좌우로 뻗은 6개 가지는 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나뭇가지요 곧 우리 자신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는 가지요 주님의 생명안에 있기 때문이죠.
주님의 생명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시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하셨습니다.
그만큼 우리 스스로는 생명을 유지할 수도 없고 빛을 발산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이 세상 심판의 날에 영생을 보장받을 수도 없고 영생의 빛 안에 들어갈 수도 없죠.
오직 메노라이신 예수님 안에 붙어 있는 가지라야 심판의 날에 영생을 이어받을 수 있는 것이죠.
유다 왕국이 심판받는 날 스바냐가 하나님에 의해 숨김받고 구원받은 것도 주님의 메노라 가지였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0899457
(역배)요한복음은 A.D.90년경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로서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쓴 편지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임을 천명코자 말이죠.
그를 위해 요한은 요한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7가지 기적’과 ‘7가지 존재증명’에 대해서 기록했죠.
첫째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요2:1-12)이이었죠.
둘째는 왕의 신하가 앓고 있는 병을 예수님께서 직접 가지 않고 원격으로 고친 기적(요4:46-54)이죠.
셋째는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친 기적(요5:1-9)이었습니다.
넷째는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인 기적(요6:1-14)이었죠.
다섯째는 물 위로 걸어간 예수님의 기적(요6:16-21)입니다.
여섯째는 소경을 고쳐 눈을 뜨게 한 기적(요9:1-7)이었죠.
마지막 일곱번째 죽은 지 나흘 돼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나사로를 살린 기적(요11:1-44)이었죠.
예수님은 사물의 질과 양과 공간과 시간과 자연법칙과 타고난 운명과 죽음까지 초월하는 분임을 알린 것입니다.
그런 기적을 행하면서 중간중간에 예수님께서 ‘7가지 존재증명’에 대해 밝힌 말씀도 언급했습니다.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εἰμι〜 ἐγὼ’ 영어로는 ‘I am that I am’(나는 –이다.)이라고 한 말씀이죠.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41,48,50,51,58)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9:5,12:46)
“나는 양의 문이다”(10:7,9)
“나는 선한 목자다”(10:11,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5)
그리고 하나 더 추가한다면 빌라도가 물을 때 예수님께서 “나는 왕이다”(18:37) 하신 말씀이 그것이죠.
물론 ‘에고 에이미’는 예수님이 처음 사용한 게 아니라 구약의 출애굽기에 나온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셨죠.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과 사명을 받고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요, 하고 질문했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הָיָה הָיָה하야 하야, I am that I am)”(출3:14)하고 대답해주셨죠.
나는 인간이나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신’이 아니라 본래부터 존재하는 ‘자존자’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것이 70인역 성경에서 “에고 에이미(εἰμι〜 ἐγὼ)”로 번역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만큼 성자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요 동일한 능력과 신성을 지닌 분임을 밝히신 거죠.
예수님께서 여태껏 7가지 기적과 존재증명 7가지를 말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직 당신만이 영원한 생명의 구원자요 영원한 세계의 참 빛임을 밝히고자 한 것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15장은 그 연장선상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3년간 훈련을 마친 뒤 마가의 다락방에 최후의 만찬을 나누며 하신 말씀이죠.
허리에 수건을 두른 후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긴 후 떡을 떼고 잔을 나누면서 서로 사랑하라 하셨죠.
그 성찬식이 끝났을 때 가롯 유다는 문을 열고 대제사장들의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죽일 계략을 짰죠.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십자가를 놓고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도록 진액을 쏟으며 기도하셨습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0620580
(본문)3주째 살펴보고 있는 본문 말씀은 십자가 죽음을 앞에 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참된 제자란 어떤 자인지, 어떻게 살아가는 자가 참된 주님의 제자인지 말이죠.
주님께서는 맨 먼저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말씀하셨죠.
예수님께서 제자강화의 시간을 가지면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참포도나무라고 말씀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본래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심으면서 참포도나무이길 바라신 하나님이셨죠.
하지만 그 백성들이 죄와 탐욕과 우상숭배에 빠져 들포도열매만 맺고 말았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사야 호세아 아모스 미가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회개하지 않았죠.
그런 선지자들을 보냈어도 그들이 공의를 행하지 않고 연약한 자와 가난한 자를 억압하며 살았죠.
그런 선지자들을 계속 보냈어도 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동행치 않았고 교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안되겠다 싶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통해 그들과 이방 민족 모두가 구원받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었죠.
바로 그 길이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 사는 자들, 그런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참포도나무라고 밝힌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포도원의 농부’로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지기와 같은 농부가 하는 일이란 마른 가지는 쳐주고 열매맺는 가지는 더 잘 맺도록 다듬어주는 일을 한다고 했죠.
그리고 하는 일이란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릴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포도원의 포도나무 결실이란 그렇기에 농부의 기다림 속에 맺는 결실이라고 지난 시간 말씀드렸습니다.
자식이 비록 속을 썩일지라도 그 자식이 변화될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는 게 농부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죠.
일터의 동료가 자신이 바라는 만큼 일하지 못해 자기 마음이 불편하다 할지라도 더 성숙해질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는 게 농부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죠.
성도가 자기 밖에 모르는 어린아이의 수준을 벗어나 공동체를 세우고 하나님나라를 세우기 위해 헌신하는 수준까지 이를때까지 농부되신 아버지의 마음으로 기다려주는 것 말이죠.
아무리 강퍅한 사람이라 해도 예수의 ‘예’자도 꺼내지 말라하는 이도 묵묵히 중보하며 기도할 때 죽음에 임박해서 자기 고집을 꺾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도 실은 포기하지 않는 기다림의 은혜죠.
그만큼 우리 모두 하나님의 기다리심을 따라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농부되신 하나님의 긍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죠.
전도서 9장 11절 말씀도 바로 진리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우리 인생의 시기와 때는 나의 열심과 나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농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따라 일하며 하나님의 기다리심을 따라 기다리며 사는 게 인생의 지혜요 참된 열매맺는 인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말씀인데 본문 5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원해)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말씀이 ‘가지’입니다.
‘가지’로 번역된 헬라어 ‘클레마’(κλῆμα)는 대부분 ‘포도나무 가지’( branch)로 번역돼 있습니다.
물론 가지 차체로서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오직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에만 생명을 누릴 수 있고 열맺를 맺을 수 있죠.
그래서 ‘열매’로 번역된 헬라어 ‘카라포스’(καρπός)의 원형 ‘하르파조’(ἁρπάζω)도 ‘꼭 붙잡다’(to seize)는 뜻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살아 있고자 한다면 포도나무 가지가 열매를 맺고자 한다면 포도나무를 꼭 붙잡아야만 한다는 거죠.
포도나무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꼭 붙잡지 않으면 실은 죽은 나무요 열매조차 못 맺는 것이죠.
(깨달음)그 포도나무가지 생명과 열매도 실은 서두에 말씀한 ‘등잔대’ 곧 ‘금촛대’를 연상케 합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의 부활자로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영원한 빛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이죠.
그 메노라의 가지처럼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가지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예수님을 꼭 붙잡고 있는 메노라와 같은 포도나무 가지라야 영생의 자녀로 영원한 빛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죠.
(원성)요한복음 11장 25-26절을 통해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께서 죽은지 나흘째 된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여동생 마르다를 향해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마르다는 ‘이 세상 마지막 날 부활 때 제 오라버니가 살아나겠죠’했지만 예수님은 지금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이 땅에 육신의 생명을 가졌다고 해서 모든 자가 참된 생명을 얻고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육신의 숨을 내쉬어도 예수님을 모시지 않는 자는 그야말로 육신 덩어리에 불과할 뿐이라는 말씀이죠.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예수님의 생명을 모신 가지로 붙어 있어야 예수님의 생명을 공급받는다는 거죠.
그런 자라야 설령 죽는다 해도 영원한 빛의 세계에 입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날과 그 순간은 다 다를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젊은 날 그토록 강퍅하던 사람도 마지막날 요양원에 입원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때 자기 힘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의 생명과 영생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 또한 농부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기다리심 속에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죠.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런 분들과 달리 돌연사로 급작사로 사고사로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 곁에 함께 있던 분이 그날 저녁에 돌아가실 줄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와 함께 살던 그 분이 엊그제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살아 있는 날 동안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 예수님의 빛안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요 영생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메노라의 가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바로 그런 자라야 이 세상의 심판 앞에 하나님에 의해 숨김받는 은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영원한 생명과 영생의 세계 그 빛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스바나랴 사는 은혜가 바로 그것 아니겠습니까?
(원성2)그런 자를 향해 주님께서 열매맺게 하시는데 디모데전서 6장 11-12절에 나옵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주님의 생명에 붙어 있는 가지는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의 열맺를 맺게 하신다는 것이죠.
주님의 빛 안에 거하는 자들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생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영생을 취하기 위해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꼭 붙잡으며 살게 하신다는 것이죠.
그런 은혜 안에 거하는 삶이 열매맺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0619797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우리 모두가 심판의 날에 하나님에 의해 숨김받고 구원받는 메노라의 가지로 붙어 있는 은혜를 베푸시는 거죠.
(주음성)그렇기에 오늘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이 세상 심판의 날에 지구 종말의 날에 누가 하나님에 의해 숨김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지 이제는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성막의 생명이요 불을 밝힌 메노라 곧 참생명이요 빛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는 가지라야 그렇지 않겠느냐?”
“지금도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가지로 붙어 있어야 영명을 누릴 수 있고 영원한 빛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지 않겠느냐?”
“농부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내게 그런 생명의 세계에 들어올 수 있도록 빛의 세계에 들어올 수 있도록 너를 잠잠히 기다리고 계시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먼저 그것을 점검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이 세상이 아무리 죄악과 탐욕과 우상숭배가 가득차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신다면 너는 예수님의 가지이지 않겠느냐?”
“이 땅에 육신의 생명은 있지만 메노라이신 예수님의 생명도 빛도 없이 껍데기만 육신덩어리로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이 있느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너는 메노라이신 예수님의 생명과 빛 안에 거하여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해라.”
“바로 그것이 메노라의 가지로 영생의 삶을 사는 길이요 바로 그것이 열매맺는 농부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바람 아니겠느냐?”
“그것이 이 세상 심판의 날에 네가 하나님께 숨김받는 길이요 죽음의 날에 영원한 빛의 세계에 들어가는 길이지 않겠느냐?”
(찬양)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나예)지난 목요일날 지방회 교역자회에서 동유럽성지순례 가는 분들의 1차 모임이 있었습니다.
무작정 성지순례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니라 뭔가 공부를 하고 떠나고자 함이었죠.
본래 저에게 루터와 독일지역에 대해 강의를 부탁했지만 저는 다른 지역의 종교개혁을 강의하겠다고 했습니다.
1차 모임 때 강의한 김성진 목사님은 제가 연구하고 묵상한 루터와는 또 다른 내용을 강의해줬죠.
중세시대에 교황의 권위가 하늘을 찌를 듯 했고 그 당시 패스트 곧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2가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신학공부를 하지 않고 배출된 사제도 많았는데 루터도 사제로 임명받은 후 신학공부를 했다는 점이죠.
루터가 1510년경에 로마 교황청을 방문할 무렵에 교황청 주변에 사제를 위한 사창가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루터의 아내는 전염병 걸린 사람도 자기 집에 데려와 치료하고 돌보고 섬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 심령에 정말로 깊이 다가온 부분은 그림이었습니다.
루터의 친구요 루터의 인물화와 성경삽화를 그린 루카스 크라나흐의 <최후의 만찬> 작품이 그것입니다.
<최후의 만찬>하면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을 떠올리기가 쉽죠.
그런데 루카스 크라나흐의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보다 40년 뒤에 그린 작품으로 비텐베르크 교회 제단화로 그린 작품이라고 합니다.
다빈치의 작품은 직사각형 식탁에 예수님이 정중앙에 있고 다른 제자들이 빙 둘러 예수님을 바라보는 구조죠.
하지만 루카스 크라나흐의 작품은 원형식탁에 둘러 앉은 구조요 14명의 제자를 그려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군지 금방 알아보시겠죠?
예수님의 품에 안긴 이는 사도 요한이라고 생각을 할 수 있겠죠.
검은 복장을 한 두 사람 중에 뒤를 돌아보며 포도주 성찬을 건네주는 인물이 루터입니다.
루터의 포도주 성찬을 받은 제자는 루카스 크라나흐의 아들입니다.
루터 옆에 있는 검은 복장의 인물은 루터의 독일어성서를 최초로 인쇄한 인쇄업자 ‘한스 루프트’(Hans Lufft)입니다.
루터를 연구한 최주훈 목사는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제자들은 모두 익명의 비텐베르크의 주민이자 예수의 제자들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최후의 만찬’은 1세기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죠.
15세기 비텐베르크 주민들 모두가 일상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제자이듯 오늘 우리도 한 명 한 명이 예수님의 참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참된 생명이요 빛이신 예수님의 메노라에 붙어 있는 가지로 살아갈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예수님의 제자는 그날 그 밤에 마가의 다락방에 최후의 만찬을 가진 12명만이 아니었네요.”
“예수님의 제자는 15세기에 루터와 함께 하나님의교회를 세우고자 동참한 비텐베르크 화가 인쇄업자 그리고 주민들 모두가 주님의 제자들었어요.”
“오늘을 사는 저 자신도 제가 무슨 일을 하든 제 일을 통해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교회를 세우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게 해 주세요.”
“다만 제게 기술이 있고 남다른 능력이 있을지라도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생명과 빛 안에 거하는 메노라의 가지로 살게 해 주세요.”
(찬양)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인데 당신은 왜 거기서 갈 곳 잃어 방황하나요
너희는 사랑의 예수님을 너희는 세상에 전해야 하는데 당신은 왜 도리어 주님을 원망하나요
들리잖니 너를 부르는 주님의 음성 보이잖니 너를 찾는 주님의 모습
너의 죄악의 짐 모두 벗어버리고 우리 예수님만 영원토록 찬양하세
주님은 세상의 소망이요 주님은 너희의 능력이신데 당신은 왜 거기서 힘을 잃고 헤메이나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주님 너희를 천국에 인도하는데 당신은 왜 주님을 따르잖고 멀리하나요
들리잖니 너를 부르는 주님의 음성 보이잖니 너를 찾는 주님의 모습
너의 죄악의 짐 모두 벗어버리고 우리 예수님만 영원토록 찬양하세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0619796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죄로 물든 이 세상을 구원코자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 세상의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그 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영원한 세계의 빛입니다.
종말의 때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이 때에 심판의 날에 숨김받고 구원받는 길은 오직 주님의 생명과 빛 안에 거해야 합니다.
참 생명이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노라 가지로 붙어 있는 자라야 영생과 영원한 빛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비텐베르크의 루터와 인쇄업자와 화가와 주민들 모두를 메노라의 가지로 참 제자로 삼아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도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교회를 세우는 메노라의 가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심판의 날에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의해 숨김받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의 세계 빛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주일설교SundaySerm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그 안에 거하면(요15:5∼7)_2023년10월17일주일설교핵심 (0) | 2023.09.16 |
---|---|
내가 그 안에 거하면(요15:5-7)_2023년 9월 17일 주일낮설교문 (0) | 2023.09.15 |
내 아버지는 농부라(요15:1∼4)_2023년9월3일 주일설교핵심요약본 (0) | 2023.09.02 |
내 아버지는 농부라(요15:1-4)_2023년9월3일 주일낮설교 (0) | 2023.09.01 |
나는 참 포도나무요(요15:1-4)_2023년8월27일 주일설교문 (0) | 2023.08.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