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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욥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욥39:1~30)

by 권또또 2022.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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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연대기를 쓴 소설가이자 20세기 기독교계의 대변증가로 알려진 C.S. 루이스가 고통의 문제(2002, 홍성사)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는 그 책의 서두에서 고통의 문제를 그렇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하다면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에게 완벽한 행복을 주고 싶어 할 것이며,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그 소원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피조물은 행복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하지 않은 존재이거나 능력이 없는 존재, 또는 선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존재일 것이다”(39)

고통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직면했을 때, 이러한 의문은 누구라도 한번쯤은 들지 않겠습니까? 몇 해 전에 일어난 중국의 쓰촨성 지진 현장이나, 미국의 올랜도 테러 현장을 접하면, 그들의 처참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주여!”하고 한숨을 내 쉬게 되죠. 우리가 이럴진데 피해를 겪은 당사자와 그 가족들은 얼마나 비통해하겠습니까? 그들 가운데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있다면, 그 고통스런 현장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되지 않겠습니까? 왜 이런 고통을 내 가족들에게, 내 식구들에게 겪도록 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만큼 욥이 당하는 고통은 문학적인 장치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실존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어제 읽은 말씀의 연장입니다. 하나님께서 폭풍가운데, 모든 바람보다 가장 강력한 폭풍가운데, 인간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도 숨소리 하나 제대로 내 쉴 수 없는 그 거대한 폭풍가운데 하나님께서 욥에게 찾아와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기를 그토록 바라고 고대했는데, 드디어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신 것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욥이 품고 있는 의문, 곧 의인이 당하는 고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 의문점들을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실 것 같았는데, 그런 기대감보다도 오히려 하나님께서 욥에게 자연계의 세계를 통해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욥의 궁금증을 잠재워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과 바다와 태양을 주관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은 천체를 운행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께서는 기후와 동물들까지도 주관하고 돌보시는 분이신데, 그 광대하신 하나님을 어찌 인간의 유한함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는 뜻이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욥이 자기 의로움을 주장하는데, 그런 의로움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꿰어 맞추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내 맡기며 의탁하는 삶이 낫지 않겠느냐는 뜻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산염소를 통해서’(1~4), ‘들나귀를 통해서’(5~-8), ‘들소를 통해서’(9~12), ‘타조를 통해서’(13~18), ‘말을 통해서’(19~25), ‘매와 독수리를 통해서(26~30) 욥에게 깨우침을 전해줍니다.

그 짐승들과 날것들이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그 새끼를 벨 떼 몸을 구푸리고 고통 속에서 그 새끼들을 낳는데, 그러면 그 괴로움이 지나가고, 그 새끼들을 강하여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자유롭게 나가는데, 너는 그 이치를 아느냐?

들소가 힘이 센데 그렇다고 그것이 너를 위해 일할 수 있겠으며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그것이 힘이 세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할 수 있겠느냐? 네 수고를 그것에게 전부 맡길 수 있겠느냐?

또 타조가 멋지게 날개를 치지만 그것이 학의 날개처럼 예쁘고 멋진 일이겠느냐? 그것이 알을 낳아 땅에 버려둘 때 들짐승에게 밝힐 것을 생각하겠느냐? 그것들이 제 새끼에게 모질게 대하는데, 과연 하나님이 지혜를 그것들에게 더해 주셨다면 그렇게까지 하겠느냐? 그런데 그렇게 미련스럽게 보이는 타조라 할지라도 말보다 더 멋지게 뛰어갈 수 있고, 말 탄 자를 비웃기라도 한데, 너는 그런 위엄을 알고 있느냐?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들짐승과 날짐승을 예로 들면서 당신의 주권에 대해 욥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이 겪고 있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 명쾌하게 답변해주시지 않고, 그처럼 은유적으로 설명해주시는 이유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주일날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를 슈퍼맨으로 생각한다고 말이죠. 10대 시절에는 잘 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못 하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20대 시절에는 대부분 아버지는 다 틀렸다고 생각하고, 30대 시절에 결혼해서 자식을 낳다 보면 어떤 부분에는 맞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40대가 되고 50대가 되고, 불현 듯 60대가 되어 아버지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으면 그때 겪는 일들로 인해 아버지, 아버지 말씀은 다 옳았습니다.’하고 고백한다고 말이죠. 자식을 낳아 키울 때 비로소 부모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고, 부모의 사랑을 깨닫기 시작한다는 뜻이죠. 바꿔 말하면 그만큼 부모의 참 마음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그 뜻을 헤아리는 것도 똑같습니다. 모든 피조물인 인간은 결코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결혼한 부부들이 하는 착각이 무엇입니까? 서로 상대방에 대해 다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사람들도 서로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으로부터 서로의 갈등이 생기는데, 사람이 하나님을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부터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에덴동산에서의 타락도 바로 그런 맥락이었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위치에 서려는 것 말이죠. 그런데 지금도 인간은 하나님의 위치에 서려고 하고 있죠. 이른바 생명분야에 대해서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는 게 그것입니다. 물론 그로 인해 생명과학이 놀랍게 발전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 인간이 알고 있는 생명에 관한 내용이 하나님의 신비로운 영역에 비한다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새 발의 피일 뿐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그럴듯한 뼈, 신장, 장기, 아무리 그럴듯한 3D프린팅 기술로 사람의 신체에 대한 제품을 만들어낸다 해도 다 인공제품이고, 다 한계가 있는 제품임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런 이야기를 드리는 것입니까? 고통의 문제에 대한 것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과 지혜로는 들짐승과 날짐승을 넘어 생명공학분야에도 뛰어들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 말입니다.

그것은 창세기 11절의 말씀만 떠올려도 환히 알 수 있는 점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장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만 강조하는 게 아닙니다. 물질과 생명체의 창조 사건 속에는, 우리의 지혜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삼라만상의 유기적인 관계가 모두 내포돼 있습니다. 예를 들면 호흡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내가 호흡하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호흡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내 온갖 지식을 총 동원한다 할지라도, 제가 어떻게 호흡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의학지식이 풍부한 의사는 모든 이치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풍부한 의학 지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근원적인 것에 대한 설명은 불가능하죠.

 

그래서 루이스는 앞의 책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고,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141)하고 말이죠. 고통의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알 길이 없지만, 마치 모든 피조세계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 고통에 대해 분명하게 알 길은 없지만, 그러나 그 고통을 통해 세상을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깨우칠 수 있다는 것이죠. 마치 사도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8:8)

 

우리가 고난 중에서도 소망을 품을 수 있는 원동력은 내 연약한 실존의 자각을 통해서, 더 나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해주신 천지의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더 깊이 채득하는 하루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야긴과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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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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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추악한 죄인인 저희를 주님의 자녀로 택해 주시고, 십자가 대속의 보혈로 구원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의 삶 가운데 남이 헤아리기 어려운 고통을 겪을 때도 있지만, 그 고통 앞에 저희들은 연약한 저희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게 하시옵소서. 그 고난이 영광을 위한 디딤돌이라는 사실을 체득하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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