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엘리후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그는 여태껏 이야기해 왔듯이, 고난 속에 있던 욥에게 그의 세 친구처럼 단순한 ‘인과응보의 차원’으로 이야기한 게 아니었죠. 그는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교육차원’이 있다고 이야기한 인물이었죠. 그러면서도 엘리후는 욥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중재자 역할을 했죠. 하나님께서 영적인 유익을 위해 욥을 고난 속에 있게 하셨는데, 욥은 그것을 믿고 기다리지 못한 채, 오히려 자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의로우신 하나님을 부당하다고 정죄한 점을 일깨워준 것이죠.
그런 점에서 볼 때 엘리후가 이야기한 것은 올바른 관점이었죠. 욥의 예기치 못한 고난은 그를 ‘겸손과 회개의 자리’로 이끌어 가기 위한 유익한 고난이라는 것이었죠. 그런 상황에서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입증하기 위해 자기 의를 드러내려다가 오히려 하나님께 불경죄를 범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제 말씀을 통해서도 살펴봤지만, 욥에게 찾아온 고난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걸 방임하신 게 아니라 오히려 고난당한 욥을 ‘당신의 자부심’으로 여겼고, 그래서 욥을 ‘당신의 종 욥’으로 인정할 정도로 ‘영광스런 자리로 초대하는 과정’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욥은 그야말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고난을 만난 욥은 처음에는 훌륭하게 반응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또한 친구들과 논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하나님을 신뢰하는 욥의 믿음이 옅어지기 시작했고,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 대한 서운함으로 바뀌어갔죠. 급기야는 자신의 죄 없음을 주장하다가 하나님의 부당하심을 지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만 것입니다.
사실 욥이 그런 모습을 보이게 되는 데는 친구들의 영향이 컸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욥이 겪는 고난의 원인이 바로 욥에게 있다며 ‘인과응보의 관점’으로 욥을 몰아 부쳤죠. 또한 모든 상황을 대하는 욥의 시선을 그의 내면으로 향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당당하게 인정하며 신뢰했는데, 그래서 그의 시선도 ‘위’를 향했는데, 점차 욥은 그의 시선을 아래로,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게 된 것이죠. 급기야는 ‘자기라는 렌즈’를 통해 그의 시선은 굴절되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부당하심을 지적하며 ‘자기 의(義)’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그런 욥을 바라보던 엘리후는 오늘 본문을 통해 그가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한 바른 해석을 위한 단초를 제공합니다. 물론 욥의 고난을 대하는 엘리후의 관점은 분명코 하나님의 관점과는 다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사자처럼, 또 하나님의 대리자처럼, 주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처럼, 그는 고난속에 있는 욥에게 간접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해 주죠. 이른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재인식시켜 주는 게 그것입니다. 그를 통해 욥이 ‘자기 의(義)’라는 틀을 깨어버리고, 신앙 안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를 위해 엘리후가 말한 논증이 무엇입니까? 36장 24절부터 37장 마지막까지, 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세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천둥, 번개, 눈, 비’와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말이죠. 그런 피조물의 세계와 이치와 흐름을 어찌 인간의 제한된 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신 세계와 그 지식으로만 그 모든 피조세계를 꿰뚫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그렇기에 현재 욥이 겪고 있는 고난은 욥 자신의 제한된 지식으로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죠.
그래서 본문 14절을 통해 엘리후가 욥에게 그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 또한 23절에서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엘리후의 입장에서 욥이 할 수 최선책은 자연 세계의 현상들을 바라보며 그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을 생각하라는 것이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다시금 인식하는 계기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만 제한된 틀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판단함으로 오히려 부당하다고 하나님께 변론하려고 했던 욥의 자기 의로움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스스로 깨닫게 하려는, 뜻으로 말한 것이죠.
이런 관점으로 보면, 욥이 겪고 있는 상황은 그의 세 친구의 주장처럼 ‘인과응보의 결과’가 아니고, 또 엘리후의 주장하는 단순한 ‘교육적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믿어주셨던 그 영광의 자리로 초대하는 과정임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친구들과의 논쟁에 휘말리게 되면서 고난 초기 ‘위로 향하고 있던 하나님을 향한 시선’이 점차 ‘자신의 내부 문제’로 초점을 옮기면서, 자신의 좁은 시각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 엘리후는 비록 욥의 고난에 대한 해석의 관점은 다르지만, 욥에게 ‘자연세계를 창조하시고 운행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향한 시선’, 다시 말해 ‘위(上)를 향한 시선’을 회복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흔히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는 것을 ‘계시’라고 말합니다. 계시에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죠. 일반계시는 인간에게 구술적인 전달형식으로 오는 게 아니라 ‘자연, 역사, 인간의 본성’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을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내용처럼 자연의 창조 섭리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일반 계시죠.
그렇다면 특별계시가 무엇인가? 특별계시의 대표적인 예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그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독생자까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까지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하게 되죠. 더욱이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도 밝혀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특별계시인 성경을 곁에 두고서도 우리가 뜻하지 않은 고난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당황하곤 하죠.
더욱이 성경의 내용은 ‘그때’, ‘그곳’의 ‘그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현재 ‘이곳’, ‘이 자리’의 ‘나’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데도, 나와는 별개의 문제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면서 욥의 세 친구들처럼 ‘인과응보의 차원’에서 ‘나와 나 자신의 내부의 문제’로 바라보면서 시선을 위로 향하지 못하게 되죠. 오히려 나의 모든 상황을 ‘아래로 향하는 경우’가 태반이죠. ‘나’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 상황을 재인식하고 재해석하면, 정말로 자연계시는 물론이요 특별계시를 통해서도 그 광대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는데, 그것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엘리후가 결론적으로 욥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너의 시선을 너의 의로움에 갇혀 아래로 향하지 말고 광대하신 하나님께 다시금 두어서 위로 항한 시선을 회복하라는 것 말이죠.
우리 주님은 그래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이십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8-30) 우리가 자연의 세계를 바라보며 질서 있게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현재의 고난은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며 당신의 신실한 종으로 인정해주시는 과정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삶이 비록 힘들지라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연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바로 오늘의 내 상황과 형편도 철저히 붙잡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저희들을 통해 당신의 종 욥처럼, 당신이 인정하고 영원토록 세워주시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이 세상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손길로 우리 또한 창조해 주셨음을 늘 잊지 않게 하여주옵소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연을 주관하고 계신 그 손길로 오늘 나와 나의 상황을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렇기에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낙망 속에서도 찬양을 잃지 않는 저희 모두 되게 하옵소서! 까닭을 모르는 고난은 곧 하나님께서 저희를 믿고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해주신 연유요, 부족한 저희를 이 시대의 욥으로 이미 삼아주신 증거임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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