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과 세 명의 친구 간에 나눈 대화 이후에, 엘리후가 등장해 반론을 제기했었죠. 그것이 32장에서부터 37장까지 이어졌는데, 그 후에 곧장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죠. 그것이 38장부터 41장까지 이어지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살펴보면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었죠. 자연의 이치조차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이 어찌 오묘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냐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돌이켜보면, 비록 욥이 세 친구들로부터 과도한 책망을 받아 고통스럽긴 했지만, 그도 연약한 한계성을 지닌 인간이기 때문에 그 책망을 받을 때 어느 정도 인정했더라면, 어쩌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욥을 책망하실 때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욥40:8)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면 그렇죠. 자신의 지나친 ‘의’에 대한 변호가 오히려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을 평가절하하는 모습이 되었기 때문이죠. 물론 욥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비하하려고 한 건 아니었죠. 그저 친구들에게 자기 의를 내세우다보니, 하나님의 공의로움과 크신 능력이 그만 퇴색되고 만 것이었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욥을 깨우쳐 주시려고 나타나신 것이죠. 그것도 조용히 나타난 게 아니라 폭풍우 가운데 나타나서 책망하셨습니다. 인간은 자연세계가 평온할 때는 자연의 오묘함을 잊을 때가 많습 니다. 자연을 지으시고 자연을 움직이시는 분이 절대자 하나님이심을 놓칠 때가 많죠. 그러다가 태풍이나 화산이나 지진과 같은 자연의 큰 변화 앞에 두려움을 느끼는 동시에 자연의 힘을 마음대로 막을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다시금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되고, 자연의 위대함과, 그 자연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게 되죠. 최근에 상영한 〈레전드 오브 타잔〉도 그런 영화 중의 하나라고들 하죠. 인간이 자연 속에서 희귀보석을 캐내려고 자연을 마구 파헤치는데, 그 자연계로부터 공격을 받는 모습 말이죠. 그런 일을 겪게 되면 그 전까지는 그토록 조용하고 잠잠하던 자연계가 얼마나 성난 모습을 보여주는지, 그로 인해 인간의 한계성을 깨닫게 되죠.
그런데 그런 자연계의 성난 모습 앞에 인간이 깨달아야 할 것은 자연의 힘을 두려워할 게 아니라, 그 자연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더욱더 두려워하는 것이죠. 폭풍우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그런 점을 상기시키고자 자연계의 폭풍을 이용하셨기 때문이죠.
오늘 읽은 41장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신 말씀 중에 마지막 장에 해당합니다. 이 장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이전에 땅과 하늘과 바다, 그리고 짐승 떼들을 말씀하실 때 특별히 38장에서 40장까지 10가지 짐승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 그 중에서도 베호못이라는 ‘하마’를 특별하게 강조하셨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또 하나의 짐승이자 괴물로 묘사되고 있는 ‘리워야단’을 강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리워야단’은 성경에 5회 정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개역개정 성경 이전에 번역된 개역성경에서는 ‘리워야단’을 ‘악어’로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개정에서는 ‘악어’로 번역하는 것 보다는 ‘리워야단’이라는 고유명사로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이 ‘리워야단’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논의가 있습니다. 그것을 여러 가지로 보고 있는데 악어라고도, 공룡이라고도 보는 학자들도 있고, 또는 신화적 상징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 가지 견해로 압축이 되죠. 현존하는 동물이냐, 아니면 현존하지 않는 동물이냐, 아니면 가상의 존재물이냐, 하는 것 말이죠.
개역성경에서는 ‘악어’로 번역했는데 그것은 41장에서 묘사하는 내용 중에 악어로 추론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렇죠. 하지만 악어로 단정하기에는 맞지 않는 내용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개역개정 성경에는 ‘리워야단’으로 음역한 것이죠.
여기서 ‘리워야단’이 실존하는 동물이든지 아니면 이제는 현존치 않는 동물이든지, 또 가상의 존재물이든지 간에 중요한 것이 있죠. 이 ‘리워야단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죠.
욥기서 3장 8절에 ‘리워야단’을 욥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날이 없었더라면’하고 고백하면서 ‘리워야단’을 언급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날에 ‘리워야단’이 나타나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했더라면 자기 존재도 없었을 것이라는 의미죠. 그런 점에서 볼 때 욥기서 3장8절에서 언급한 ‘리워야단’이 단순히 현존하는 ‘악어’일 수만은 없는 것이죠.
그런가 하면 시편 74편 14절에도 ‘리워야단’이 등장합니다. 그때의 리워야다는 13절에 나오는 ‘용’과 함께 등장하는 바다의 용과 같은 괴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시편104편 26절에서는 ‘리워야단’을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바다에서 즐겁게 노는 바다생물 정도로 말이죠. 마지막으로 한 곳이 있는데 이사야 27장 1절에도 ‘리워야단’이 등장합니다. 거기서는 시편 74편과 마찬가지로 ‘용’과 함께 등장하는데, 악한 존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리워야단’을 벌하시겠다고 하신 뜻으로 말이죠.
그렇다면 욥기서 41장에 등장하는 리워야단을 어떻게 봐야 하겠습니까? 본문에 등장하는 ‘리워야단’은 시편 104편 26절에 등장하는 ‘리워야단’처럼 실존 동물로 보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33절에 언급된 말씀 “지음 받았구나”하는 표현 때문이죠. 이른바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인 ‘리워야단’을 언급하는 것일까요? 40장에 언급한 ‘베호못’ 곧 바다 하마처럼, ‘리워야단’ 역시 욥이 제어하거나 대항할 수 없는 존재이듯이, 온 세계와 피조물을 다스리는 하나님께 결코 욥이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10~11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만큼 담대하지 못하거든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여담입니다만, 제 고향이 지도 점암 앞 동네인데, 어릴 적 제 어머니와 형과 누나가 임자도에서 보면 보이는 한둥산 너머에 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용이라고 하는데, 어머니는 ‘이무기’ 정도로 생각을 하죠. 그때 비가 억수로 쏟아 붓는데, 마침 새우잡이 어선을 그 바닷가에 나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죠. 그때 그 한둥산 너머 하늘로 꼬리를 흔들며 하늘로 올라간 용을 봤다는 것입니다. 실제 있었던 사건인데,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꿈으로 꾼 적이 있었죠. 용이 신화적인 동물이라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제가 인터넷에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도 어렸을 때 그걸 본 적이 있다고 댓글을 단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자기가 경험한 것보다도 훨씬 더 엄청난 세계가 열려 있다는 것, 그 용, 이무기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경험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과 분명 차이가 있겠죠. 맹인이 눈을 떴을 때, 주님께서 자기 눈을 뜨게 해 주셨다고, 주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모시겠다고 다짐한 그 청년의 시선, 그리고 그가 진정으로 변화돼 있음을 목격한 사람들은 주님에 대해 바르게 눈뜬 자들이요, 그걸 바라보지 못한 자들은 여전히 눈을 뜨고 있으나 실은 그들이 맹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죠.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자연계나 짐승들이나, 또 다른 엄청난 세계에 대해 눈을 뜰 수 있는 자들, 그런 은혜를 체험하고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저희들의 인생을 주관하시고 이끌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아버지의 은혜가 없으면 제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졌더라도 교만해질 수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저희가 경험한 것보다도 아직도 경험하지 못한 게 너무나 많고, 저희가 아는 것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이 훨씬 더 풍부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오늘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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