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후가 욥에게 지적할 때 욥이 잠잠했던 것, 그것은 엘리후의 지적이 타당성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른바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고통을 권선징악 차원에서, 인과응보격의 차원으로 욥을 몰아세우고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마다 욥도 그런 게 아니라고 자기 의로움을 호소했고, 그것을 세 차례에 걸쳐 대화하고 토론하고 항변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그들의 항변을 깊이 듣고 있던 엘리후가 나서서 말하는데, 욥도 그렇고 그 세 친구들조차 이전과는 달리 자기주장을 펼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욥의 의로움 앞에 그 세 친구들이 정당한 논리로 욥을 공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엘리후는 어떻게 욥의 의로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까? 엘리후가 지적한 부분은 그것이었습니다. 비록 욥이 자기 의로움을 이야기하지만, 그 의로움을 하나님의 정당성이나 하나님의 절대성보다 앞세우는 것, 바꿔 말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보다도 자기 의로움을 더 치켜세우는 것, 그것을 엘리후가 지적한 것이죠. 이른바 욥이 자기 의로움의 출처가 하나님이라고 말하지만, 엘리후는 그의 주장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티끌과 같은 지를 말한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볼 때 우리 실존의 작음을 절감하듯이, 또 높이 뜬 구름 앞에서 우리의 낮음을 절감하듯이, 인간의 의와 자랑은 ‘크신’ 하나님 앞에 한없이 ‘작은’ 것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6~7절에 엘리후가 말합니다.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인간이 아무리 대단한 존재인 것 같고, 또 인간의 의로움이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인간이 가난하고 굶주리고 헐벗은 고아와 과부가 나그네를 수 없이 많이 돕는다 해도, 더 나아가 인간이 아무리 많은 악행을 저지른다 해도, 그것이 우주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 무슨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힘이 아무리 세고 능력이 있어, 다른 친구들에게 자기 힘을 자랑하지만, 실상 자기 아버지의 오른손 하나에도 꼼짝 못하는 꼴과 똑같은 격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가 의지하는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죠. 하나님은 온 우주보다도 크시고, 하나님은 만물보다도 크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초월성을 지닌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작은 것에 불과한, 하나님께 그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못한 우리 인간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는 은혜로우신 분입니다. 그것을 10~11절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자가 없구나 땅의 짐승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가르치시고 하늘의 새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지혜롭게 하시는 이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이도 없구나.”
그 위대하신 하나님, 능력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 우리 인간의 행사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하나님께서는 바로 ‘나를 지으신 분’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라고 고백을 하죠. ‘땅의 짐승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가르치시고, 하늘의 새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지혜롭게 하시는 이’라고 말하죠.
그래서 인간의 의와 악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그 하나님께서, 티끌과 같은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시고 노래하도록 구원하시며, 짐승이나 새들보다 우리를 지혜롭게 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의 존재에 대한 오래된 질문을 되뇌이게 하죠.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이와 같이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말이죠. 시편 8편 1~4을 통해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어찌됐든 욥은 지금 하나님을 뵐 수 없고, 그의 판단하심조차 알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본문 14절에서도 그렇게 엘리후가 말하고 있죠. “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판단하심은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말하는 그대일까보냐.”
이런 욥의 처지, 곧 그와 같은 인간의 처지 앞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대답하지 않는 이유를 엘리후가 두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인간이 고통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신지를 찾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앞서 읽은 10~11절에서도 그렇게 고백했죠.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자가 없다고 말이죠. 땅의 짐승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가르치시고 하늘의 새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지혜롭게 하시는 이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이가 없다고 말이죠.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지만, 정작 그 신음 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지’를 찾고 묻는 자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대답지 않으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바꿔 말해 자기 의에 갇힌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엘리후가 욥에게 우회적으로 지적하는 바이죠.
그래서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도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를 묻는 기도’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나의 고난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신지'를 묻는 기도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셔서 땅에 있는 우리와는 무관하실 것이라는 오해를 사그라지게 하죠.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신지를 묻는 기도‘는, 티끌 같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신지를 묻는 기도‘는 이 땅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어디 계신지를 묻는 기도‘는, 나 홀로 있었던 아픔의 시간에도 주님께서 그곳에 함께 계셨고, 내가 뛰며 기뻐하던 때에도 그곳에서 주님이 함께 계셨음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여정에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묻는 기도를 우리가 끊임없이 드려야 하는 것이죠. 그때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주는 첩경을 만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으시는 두 번째 이유에 대해, 엘리후는, 하나님 앞에 헛된 것을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13절에 그렇게 밝히고 있죠. “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이 부분을 표준새번역에서는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악한 자들을 보지도 않으시고, 그들의 호소를 들어 주지도 않으시므로, 그 악한 자들의 울부짖음에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만큼 헛된 것이란 악한 것이고, 그 악을 좇는 자들의 부르짖음에는 결코 하나님께서 응답지 않으시고 침묵하신다는 뜻입니다.
엘리후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욥에게 하나님이 응답치 않으심이 그의 악행으로 인함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밝힌 것이죠. 물론 그의 판단이 맞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14절의 하반절 말씀처럼 말입니다. “일의 판단하심은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중요한 것은 엘리후가 이렇게 하나님의 침묵하심에 대해 두 가지를 이야기할 때 욥이 취해야 할 자세죠. 그의 지적처럼 욥이 하나님께 끝까지 의뢰하고 간구하며 하나님을 찾는 자세, 더 나아가 혹시라도 자기 속에 있는 악을 생각하며 더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 말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것, 그것을 엘리후가 이야기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도 바라시는 바이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믿음을 이야기한다면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요? 바로 기다림이죠. 하나님께서는 기다림의 과정을 통해 욥이 불순물을 제거하여 바로 서길 원했던 것입니다.
https://www.bookpod.co.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1131
https://www.bookpod.co.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1130
*사랑하시는 주님. 티끌 같은 저희들은 주님의 크신 뜻을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지금 저희가 처한 고난이나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내 마음대로 판단하기보다,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더욱 기도하며 주님을 찾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다가오시는 그 기쁨의 날을 맞이하기까지 온전한 기다림의 자세를 갖추며 정금과 같이 서게 해 주시옵소서.
'새벽묵상DewSermon > 욥'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욥37:1~24) (0) | 2022.02.18 |
---|---|
곤고에서 구원하시고(욥36:1~33) (0) | 2022.02.17 |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욥34:1~37) (0) | 2022.02.15 |
그 사람의 중보자로 함께 있어서(욥33:1~33) (0) | 2022.02.14 |
고소장을 쓰게 하라(욥31:1~40) (0) | 2022.02.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