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어제 새롭게 등장한 엘리후가 하는 말을 잇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후, “그는 나의 하나님”이란 뜻의 이름을 지닌 엘리후는 아버지 바라겔, 곧 “하나님이 복 주신다” 또는 “하나님이여 복을 주소서”하는 이름의 뜻을 지닌 아버지 바라겔의 아들인데, 그는 아브라함과 친척 관계요, 또 유다 지파의 후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욥과 같은 동족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성찰도 깊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욥과 세 친구들 사이에 중재자로 나선 사람이고, 이 후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신 것을 보아 그는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예비한 사자로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말을 통해 중요하게 깨닫게 되는 게 무엇일까요? 그의 말은 32~37장까지 6장에 걸쳐 기록돼 있는데, 나이가 많은 욥이나 세 명의 친구들과 달리, 그는 비록 나이가 어려도 참된 지혜를 갖춘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 지혜로 욥의 세 친구처럼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거나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는 게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 지혜로 사람과 사람을 잇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돌아보게 하는 중재자 역할을 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화평케 하는 자가 그만큼 중요하다고 어제 말씀을 드렸죠.
오늘 본문도 엘리후의 말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내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성경에서는 그렇게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욥 어른은 부디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개역개정판이나 옛 개역판 성경에서는 어른을 존대하는 느낌이 없지만, 표준새번역성경은 어른을 존대한다는 느낌을 받게 되죠. 어제 읽은 32장에서도 엘리후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욥과 세 명의 친구들을 존중했고, 그들의 말을 경청했음을 알 수 있죠. 그러나 욥과 세 명의 친구가 양보 없는 변론만 계속하자, 마침내 엘리후가 입을 열어 자기 말에 하고 나서는 것이죠. 그래서 귀를 기울여 들어달라고, 경청해 달라고 당부하는 것이죠.
사람은 귀 기울여야 하는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도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할 정도로, 들어야만 자신의 인생을 유익하고 행복하게 가꿀 수 있기 때문이죠. 그것은 사람의 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들고 날며 주님의 꼴을 먹어야 인생의 영적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죠. 엘리후가 비록 인간의 말도 전할지라도, 그 말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자들은 큰 영적인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이가 많은 욥과 세 친구의 말이나 나이가 어린 엘리후의 말을 단순한 인간의 말로 받기보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되겠죠.
이것은 우리 자신들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나 삶이나 일터 속에서 나보다 경륜이 많은 사람이라면, 인생을 오랫동안 살아 온 사람이라면 잘 새겨듣는 법이 필요하죠. 뭐든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나이 어린 사람이 가끔씩 깊이 있는 이야기, 정말 인생의 혜안이 담긴 말을 할 때가 있다면, 그의 말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교회 강단에서 설교하는 말씀도 인생의 경륜이 많은 목사님이나 나이가 젊은 저 같은 사람이나, 더 나아가 어린 아이의 간증을 통해서도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하는 법이죠. 바꿔 말하면 모든 삶의 이야기에는 쓸모 없는 게 하나도 없고 다 양약이 된다는 점이죠. 그것은 마치 황대권 선생이 쓴 〈야생초 편지〉처럼, 이 세상의 모든 잡초는 쓸모 없는 잡초가 없고, 다 쓸모 있는 잡초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본문 9절에서 12절은 이제 엘리후가 본격적으로 이야기하는 말입니다. 욥이 내비친 자신의 깨끗함에 대한 반론 격이라 할 수 있죠. 특별히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그대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욥이 자기 의로움을 이야기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결코 의로운 인생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한 그것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모습이고, 실은 어리석은 착각이기 때문이죠. 어떤 선행이나 봉사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로움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선행과 구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허락하신 분이 실은 하나님이시고, 그의 생명도 그의 능력도 실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어느 누구도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한 하나님과의 단절될 뿐이고, 그런 의로움을 고집하는 한 그것은 자기 안에 갇히는 꼴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객관화시킬 수 없는 법이죠.
엘리후가 말하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욥이 자기 의로움을 주장하면 할수록 하나님과의 단절, 자기 자신 속으로의 고립을 겪는다고 말이죠. 그만큼 욥이 자기 의로움만 주장하지 말고, 비록 의로운 삶을 살았을지라도 더더욱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오라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자기 자신을 객관하시키고, 자기 고립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더 크신 긍휼의 은총을 입을 수 있다는 주장이죠.
본문 13~18절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행하심을 밝히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사람에게 말씀하시는데 사람이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사람들이 자기 관심거리에만 집중하기 때문이죠. 돈이나 인기나, 재미나 편안함 같은 이 세상의 것에만 관심을 집중하기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새벽에 주님 앞에 나온 이유 중의 하나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함인 줄 믿습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성령님과 동행하며 출발하고자 하는 자세, 이미 그 속에 하나님께서 깊이 말씀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그런 마음과 자세를 더욱 선하게 가꾸셔서, 새벽기도회가 끝나면 한 5분 정도는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 그 말씀 앞에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점검하고, 깨닫는, 그런 기도의 시간으로 삼고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19~28절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인생의 곤고한 상황과 죄악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전하고 있죠. 여기에서 특별히 23~24절을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중보자로 함께 있어서 그의 정당함을 보일진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여기에서 일천 천사를 그 사람의 중보자로 함께 한다, 그래서 어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을 건져내는 자로 삼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록 엘리후의 증언이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욥과 세 명의 친구들을 중재할 수 있도록, 중보할 수 있도록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 곧 하나님의 천사로도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영체와 같은 천사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표현이죠. 엘리후가 지금 욥에게 중재자로 나서서 말하는 것은 무턱대고 자기 이야기를 늘어 놓고자 함이 아니라, 고통당한 욥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한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천사라는 말을, 중보자라는 말을, 70인역 성경에서는 ‘파라클레토스’ 곧 성령으로 번역해 놓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엘리후의 말이 욥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중요한 것은 저와 여러분이 엘리후와 같은 하나님의 중재자,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덧입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군가 욥과 같이 고통에 처해 있을 때 그를 변호해 주면서, 하나님 앞에 더 나아가도록 격려하는 그런 중재자 말입니다. 오늘도 그 누군가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며, 성령님의 위로를 전하며,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도록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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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우리가 사는 날 동안 관심 가져야 할 것은 주님의 말씀인 줄 믿습니다. 주의 전을 들고 나며 말씀의 꼴, 생명과 진리의 꼴에 먹는 일에 관심을 갖게 하시고, 그 말씀의 감동을 따라, 누군가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성령님의 중재자로 격려하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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