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처한 극한 상황에서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 묻곤 합니다. ‘하나님은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왜 내게 이런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까?’하고 말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어려움과 고통을 당한 욥도 어쩌면 그런 질문을 하나님께 던졌을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잠시 잠깐 나를 시험코자 하실 수 있고, 나를 믿기 때문에 이런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점차 그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짙어질 수 있죠. 더욱이 고난당한 욥을 위로하러 왔던 세 친구가 위로와 격려는커녕 자신을 향해 인과응보식으로 정죄하고 비난하고 나섰는데, 욥도 이유 없이 고난당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그들이 말할 때마다, 그의 시선도 점차 위로 향했었는데, 이제는 자기 믿음의 시선도 아래로, 곧 자기 내부로 향하게 된 것이죠.
그를 통해 욥은 세 친구가 아무리 자기를 조롱하고 비웃고, 자기를 불의하다고 거짓되다고 이야기하도, 계속적으로 자기 의로움을 항변했고, 급기야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보다도 자기 의로움을 더 높이 세우는 데에 직면하게 된 것이죠. 이른바 자기 의로움을 항변하기 위해 하나님께 소송장을 내기라도 할 기세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욥31:35) 자기 친구들이 자신의 의로움에 대해 고소할 때 하나님께서 나서서 자기 의로움을 변호해 주시기를 원한다고 할 정도로, 욥은 자기 의로움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즈음에, 엘리후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던 것이죠. 욥은 욥대로 자기 의로움을 항변하고, 욥의 세 명의 친구들은 그들대로 욥을 정죄하면서 이야기가 끝날 무렵, 양측이 평행선만 달릴 뿐 어떤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던 그 시점에, 그 엘리후가 등장하여 중재자 역할을 한 것이죠. 욥을 공박하는 세 사람의 의견 곧 모든 것을 인과응보식으로 해석하고 문제점을 찾으려는 그들의 논쟁도 잘못되었고, 또 자기 의로움을 하나님의 공의로움보다 더 높이사고 있는 욥도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중재안을 찾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엘리후가 욥에게 그리고 그 세 친구에게도 깨우칠 수 있도록 이야기했던 내용은 그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고통은 죄 때문에 당하는 고통도 없잖아 있지만, 그 영혼을 깨우치고 교육시키는 차원의 고통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인간의 논리로 풀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자연세계의 이치와 흐름이 있듯이, 하나님의 광대하신 그 뜻을 어찌 인간의 논리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죠. 그러니 그 고통 속에서 너의 시선을 아래로, 너의 내부로 향할 게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는 ‘나의 종 욥’처럼 오직 그 시선을 위로 향하도록,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섭리하는 그 하나님께 시선을 두도록 하기 위해, 그런 고통을 허락하셨다는 것, 바로 그것을 욥에게 일깨워주고 있는 것, 그것이 엘리후가 이야기한 내용이었습니다. 궁극적으로 그런 광대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우칠 수 없는 까닭에, 인간이 아무리 의롭고 정직하고 아무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같아도 그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야 할 존재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죠.
이상의 내용이 욥기서 1장부터 37장까지 읽은 말씀이었습니다. 1장과 2장에서 욥의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고, 사탄의 하나님께 욥을 고소하고 그에게 인생풍파와 고통을 가져다주면서 하나님의 묵인하심 그러나 하나님의 기대하심이 나타나 있었고, 3장에서 욥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자기 태어남을 비통해하고, 4장에서 27장까지 욥과 세 명의 친구들이 세 차례에 걸쳐 변론을 하고, 28장부터 31장까지 욥이 최후 변론을 하고, 그리고 32장부터 37장까지 엘리후가 등장해 중재자 역할을 한 내용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38장에 이르러 하나님께 직접 욥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본문 38장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욥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서 말씀하셨습니다. 폭풍가운데 말씀하신 하나님의 그 모습은 욥기서 40장 6절에서 다시 한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실 욥의 자녀들이 죽게 된 것도 실은 큰 바람 곧 폭풍이 불어서 일어난 것 아니었습니까?(욥1:19). 욥이 또 악창이 들끓고 있을 때 스스로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폭풍으로 자신을 치셨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욥9:17)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 욥이 고백하는 폭풍이 무엇입니까? 인생의 폭풍우가 불어대는 욥의 상황가운데 하나님께서 모든 바람을 잠재우시는 거대한 폭풍가운데 자신을 찾아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욥을 뒤흔드는 모든 폭풍의 바람과 그 모든 존재를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의 현현은 이 땅의 바람을 잠잠케 할 만큼 큰 바람을 동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폭풍우 가운데, 모든 비바람을 잠재울 만큼의 크고 강한 바람으로 현현하신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만큼 유한한 모든 것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도록, 바꿔 말해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세계가 어떤 변명이나 대구도 하지 못하도록, 그만큼 온전하시고 완벽하신 존재임을 알리기 위함이죠.
그 폭풍우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시는데, 욥은 그때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마도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이유에 대해 설명해주시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세 친구들 앞에 그토록 고대하던 자기 의로움을 변호해주실지 모른다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욥의 바람과는 거리가 먼 ‘반문’을 욥에게 던지십니다. 본문 2절에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이를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하나님께서 여태껏 자기 의로움을 주장하던 욥을 완전히 꺾어 버리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결코 욥이 대답할 수 없는 여러 질문들을 통해서 하나님 당신이 누구인지를 계속해서 드러내 주고 계십니다.
4절입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고통의 현장에서 ‘왜 자신에게 이런 어려움이 있어야만 하는지?’ 묻고 있는 욥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인간이 살아가는 땅과 하늘, 바다와 우주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중요한 일들을 하나님께서 관여하시는데, 네가 그 모든 이치를 헤아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시는데, 4~18절까지는 ‘땅과 바다와 태양을 주관하시는 분’으로, 19~21절까지는 ‘천체를 운행하시는 분’으로, 22~38절까지는 ‘기후를 주관하시는 분’으로, 39~41절까지는 동물을 돌보시는 분으로, 욥에게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그만큼 그 광대하신 하나님의 뜻을 어찌 유한한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욥도 그렇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그 크신 섭리와 이치로 모든 자연계를 주관하고 이끌어 가시는데, 하물며 당신이 가장 아끼시고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의 현장과 고통도 무턱대고 이끄시거나 방치하시는 분이 아니란 사실이죠. 그 우주와 자연만물을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간섭하시고 이끄시듯이, 욥을 향한 상황도 그리고 우리 각자를 향한 모든 상황도 치밀한 당신의 섭리와 계획 속에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욥처럼 우리가 혹여라도 고통을 당할 때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기보다 이 광활한 우주와 자연만물을 당신의 얼개로 구상하시고 짜맞추시고 섭리하는 그 뜻을 내다보며, 하나님을 향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통과 의미, 그리고 회복의 은혜를 덧입게 하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오늘 우리가 겪는 여러 상황 속에서 왜 내가 이런 상황을 겪어야 하는지 질문할 때가 많습니다. 왜 저입니까? 왜 제게만 일어나야 합니까? 하고 말입니다. 오늘 욥에게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말씀해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럼으로 인해 우리가 겪어야만 하는 고통의 순간과 상황이 하나님의 철저한 섭리와 계획 속에서 이끄시는 길임을 깨닫는 은혜를 덧입혀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어떤 순간에도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의지하여 승리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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