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리는 베냐민 지파 출신의 사울이 왕이 된 모습, 그 후에 하나님의 제사와 명령을 무시한 채 자기 보기에 좋은 길만을 취하다 그만 버려진 모습, 그리고 그 후임 왕으로 유다 지파 베들레헴 출신 다윗을 지명해 기름부어 세운 모습을 살펴봤죠. 물론 다윗이 곧바로 왕위에 오른 게 아니라 사위과 되었었지만 그 후에 8년간 광야 도피행각을 벌이다가, 사울이 길보아 전투에서 블레셋 군대의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리다가 자결한 그 후에 다윗이 헤브론에 올라가 7년 6개월간 하나님과 교제의 자리, 이스라엘 백성과 연합의 자리를 취한 후에 왕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죠. 여호수아 때부터 사울 왕 때까지 400년간이나 정복치 못했던 난공불락의 성읍 여부스를 정렴한 그 후에 말이죠. 그때 다윗은 여부스 성읍을 ‘예루살렘’으로, 곧 ‘평화의 터전’으로 삼은 후에 왕도를 그곳으로 천도한 후에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죠. 다윗이 그렇게 명실상부한 왕이 되기까지는 혼자만의 힘으로 된 게 아니라, 도피행각을 벌이던 아둘람 동굴에서 숨어 살때부터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다윗을 위해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수많은 용사들이 함께 한 까닭이었죠.
오늘 읽은 역대상 12장은 어제 소개된 다윗의 용사들에 이어 또 다른 용사들이 나옵니다. 1-22절까지는 베냐민 지파와 갓 지파 그리고 유다 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용사들, 23-40절까지는 다윗이 헤브론에 있을 때 ‘온 이스라엘’ 지파의 용사들까지 달려나와 다윗을 왕으로 받든 모습을 밝혀줍니다.
사실 어제도 살펴봤고, 사무엘하 2장을 읽을 때도 살펴봤지만, 사울이 죽고 곧바로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건 아니었죠.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만의 왕으로 추대되었죠. 그곳에서 7년 6개월간 하나님과 교제하고, 온 나라 백성들과 연합을 꾀할 때, 드디어 난공불락의 성읍 여부스를 점령한 이후에서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을 왕으로 받들었죠. 그런데도 오늘 본문은 도피행각을 벌이던 그때부터 다윗을 왕으로 인정한 지파가 있었고,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으로 있을 때부터 온 이스라엘 지파의 용사들이 다윗에게 달려 나와 도왔다고 밝혀줍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역대기 기자는 그런 언급들을 통해 다윗이 사울의 정권을 뒤엎고 권력을 쥐게 된 게 아님을 밝히고자 한 것이죠. 그만큼 온 이스라엘의 용사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은 왕이었다는 것을 기록한 것이죠.
그 과정을 어떻게 밝힙니까? 본문 1절에 “다윗이 기스의 아들 사울로 말미암아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에 그에게 와서 싸움을 도운 용사 중에 든 자가 있었으니.” 먼저 역대기 기자는 다윗이 시글락에 있을 때 다윗을 도와준 용사들을 소개합니다. 시글락은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던 시절 유대 광야를 전전긍긍하다가 마지막에 숨어들어간 곳이었죠. 그곳이 바로 블레셋 가드 지역의 한 곳인데, 다윗은 부하 장수 600명과 그 식솔들을 데리고 가드 왕 아기스 밑에 들어갔는데, 그 왕이 다윗에게 할당해 준 곳이 시글락이었습니다. 바로 그곳에 있을 때부터 다윗을 도우러 나온 용사들이 있었음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죠.
그들이 누구입니까? 본문 2절에 “그들은 활을 가지며 좌우 손을 놀려 물매도 던지며 화살도 쏘는 자요 베냐민 지파 사울의 동족인데 그 이름은 이러하니라.” 시글락에 있는 다윗을 도우러 나온 용사들이 실은 사울 왕과 혈족인 베냐민 지파의 용사들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죠. 같은 베냐민 지파 출신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등을 돌린 사울과 함께 하지 않는 용사들이 있었다는 사실이죠. 그런 그들이 자발적으로 다윗에게 와서 돕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8절은 베냐민 지파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갓 사람 중에서 광야에 있는 요새에 이르러 다윗에게 돌아온 자가 있었으니 다 용사요 싸움에 익숙하여” 다윗을 돕고자 한 지파 가운데에는 갓 지파 자손들의 용사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다윗이 숨어 있던 요새는 엔게디 광야(삼상24:2)의 요새로 추정합니다. 그 엔게디 동굴은 사울이 대변을 본 곳이고,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 맡기고 죽이지 않은 곳입니다. 바로 그 엔게디 광야의 요새로 갓 지파의 용사들이 다윗에게 몰려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16절에서는 베냐민과 유다 지파의 용사들, 본문 19절에서는 므낫세 지파 자손 중에서 다윗에게 나온 용사들이 있었음을 밝혀줍니다.
그런데 그때 다윗 곁에 몰려든 용사들을 향해 다윗이 그렇게 말하죠. 본문 17절입니다. “다윗이 나가서 맞아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평화로이 내게 와서 나를 돕고자 하면 내 마음이 너희 마음과 하나가 되려니와 만일 너희가 나를 속여 내 대적에게 넘기고자 하면 내 손에 불의함이 없으니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감찰하시고 책망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매.” 다윗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엔게디 요새로 몰려든 용사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자신을 사울에게 넘기고자 잡으러 온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자신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온 것인지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18절에 “그 때에 성령이 삼십 명의 우두머리 아마새를 감싸시니 이르되 다윗이여 우리가 당신에게 속하겠고 이새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함께 있으리니 원하건대 평안하소서 당신도 평안하고 당신을 돕는 자에게도 평안이 있을지니 이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심이니이다 한지라 다윗이 그들을 받아들여 군대 지휘관을 삼았더라.” 그렇게 몰려든 30명의 용사들 중에 우두머리인 ‘아마새’는 우리가 온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온 것이니 평안하라고 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마새를 향해 성령님께서 감싸주셨다고 밝힙니다. 그래서 아마새는 성령님의 이끄심 속에서 다윗에게 말했죠.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우실 것입니다.’하고 말이죠. 그 아마새의 위로와 격려가 실은 성령님의 역할이죠. 보혜사 성령을 가리키는 ‘파라클레토스’는, ‘파라’ 곧 ‘옆에서’라는 단어와 ‘클레토스’ 곧 ‘위로하다’는 합성어죠.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옆에서 부르시고 위로하시는 보혜사이십니다. 비록 다윗이 사울의 칼날을 피해 도망치고 광야로 쫓겨나와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빈털터리로 살지라도, 다윗과 함께 해주시겠다는 위로와 격려를 불어넣으셨던 것입니다. 그 역할을 바로 그 아마새의 입술을 통해 불어넣으신 것이죠.
그래서 22절의 말씀처럼 다윗 곁에는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하매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더라.” 하나님의 천군천사가 함께 하신 것입니다.
본문 23-40절까지는 다윗이 헤브론에 있을때 몰려든 여러 지파의 용사들에 관한 기록입니다. 유다 지파 자손을 비롯해, 시므온, 레위, 베냐민 자손, 에브라임 자손, 잇사갈 자손, 스불론 자손, 납달리 자손, 아셀 자손, 요단 동편의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자손의 용사들까지도 함께 했습니다. 더욱이 40절을 보면 그들은 여러 음식과 밀가루 과자, 무화과 과자, 건포도와 포도주와 기름, 그리고 소와 양도 많이 가져와서 함께 나눠 먹었음을 밝혀줍니다.
왜 그런 모습을 밝혀주는 걸까요? 사무엘하 2장에서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7년 6개월간 살때는 유다 지파의 왕이었다가, 여부스 성읍을 점령한 후에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음을 밝혀주는데 말이죠. 그런데도 본문은 다윗이 헤브론에 있을 때부터 온 지파의 용사들이 함께 했다고 밝혀줍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패망한 나라를 재건하는데, 하나님과 다윗이 맺은 언약에 그 기초를 두고자 함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세계사 속에 작은 변방에 지나지 않았죠.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대제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페르시아의 속국에 지나지 않았죠. 그런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인간의 독단적인 능력이나, 정치력과 군사력만이 능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바로 세워주셔야 가능하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다윗 왕조에 그 기초석을 두고자, 도피행각을 벌이던 엔게디 요새, 블레셋의 시글락, 헤브론에 있던 그 시절부터 모든 지파의 용사들이 함께 했다는 걸 밝힌 것이죠.
https://www.bookpod.co.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1131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허물어진 조직과 단체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언약에 토대를 두고서, 모든 이들이 같은 뜻을 품고 힘을 합쳐야 한다는 점이죠. 그 어떤 인간의 독단적인 능력이나 정치력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의 토대를 하나님의 언약에 두고서 성령님의 도우심과 격려 속에서 한 마음 한 뜻을 모아 세워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그런 가정, 그런 일터, 그런 교회가 되도록, 우리 각자가 밀알이 되십시다.
*사랑하는 주님.
패망한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것도, 무너진 가정과 일터와 교회를 세우는 것도,
우리 개개인의 힘과 능력으로만 가능한 게 아님을 압니다.
파라클레토스 옆에서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과의 언약백성의 토대 위에서 다시금 세우게 하시옵소서.
그런 저희들을 야긴의 하나님, 보아스의 하나님의 도구로 친히 사용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새벽묵상DewSermon > 역대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 이르되(대상14:1-17) (0) | 2021.09.14 |
---|---|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대상13:1-14) (0) | 2021.09.13 |
다윗에게 있는 용사(대상11:1-47) (0) | 2021.09.10 |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대상10:1-14) (0) | 2021.09.09 |
온 이스라엘이 그 계보대로(대상9:1-44) (0) | 2021.09.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