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5장을 읽을 때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걸 읽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이 되어 7년 6개월간 살았죠. 그 중 2년은 유다 지파의 왕으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내전을 치르는데 세월을 보냈고, 나머지 5년 6개월은 이스라엘의 북쪽과 남쪽을 하나로 연합할 수 있는 여부스 성읍, 여호수아 때부터 사울 왕 때까지 400년간 정복치 못했던 그 성읍을 점령하는데 세월을 보냈죠. 그래서 그 성읍을 예루살렘 곧 평화의 터전으로 명명했는데, 그때 왕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천도한 이후에 명실상부한 온 이스라엘 왕다운 왕이 될 수 있었죠. 그의 나이 37살 때의 일로, B.C.1000년 경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6장에서는 다윗이 자기 나라의 정통성을 하나님의 법궤에 두고자 해서, 그 법궤를 예루살렘 성읍으로, 곧 자기 성읍으로 모셔 오고자 했죠. 그것이 사울과는 다른 점이었죠. 그런데 그 법궤가 과연 어디에 있었습니까? 사실 그 법궤는 엘리 제사장 때 블레셋과의 전투 앞에서 빼앗긴 적이 있었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 법궤를 부적처럼 여기고자 블레셋과 전투를 벌이는 현장에 모시고 갔다가, 패했고, 그 법궤마저 빼앗겨 버렸죠. 그것이 사무엘상 4장에 나온 내용이었는데, 그 뒤에 그 법궤가 어디로 갑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그 법궤를 블레셋의 아스돗 지역에 있는 다곤 신전 앞에 놔두었죠. 그런데 자고 났더니 다곤 신상의 목이 부러져버렸죠. 그래서 아나돗 주민들은 이웃 지역인 가드로 법궤를 옮겨갔죠. 그런데 가드 주민들이 독종에 걸리기 시작했고, 그들은 에그론 지역으로 법궤를 가져다 놓죠. 그러자 에그론 주민들도 독종에 걸렸는데, 그렇게 7개월가량 법궤가 블레셋 지역에 머무는 동안 블레셋 사람들은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서 법궤를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옮겨가게 하죠. 그래서 젓 나는 암소 두 마리로 하여금 새 수레를 끌고 가게 했죠. 그날 젓나는 암소 두 마리는 법궤가 올려진 새 수레에 끌고 가는데, 새끼들도 보지 않은 채 울면서 끌고 갔죠. 그 법궤가 벧세메스 지역에 오자, 그들은 인근 ‘기럇 여아림’(삼상7:1), 다시 말해 ‘바알레유다’로 그 법궤를 모셔다 놓고서, 그때부터 ‘40년간’ 그곳에 안치돼 있었죠.
이상이 사무엘상 4장에서부터 7장 1절에 나온 법궤와 관련된 말씀인데, 오늘 본문은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그 법궤를 예루살렘 성읍으로 옮겨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사실 그런 면에서 볼 때 다윗은 사울과 큰 차이를 지녔죠. 사울은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 왕도인 ‘기브아’로 모실 생각조차 하지 않았죠. 그러나 다윗은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왕도를 천도한 이후에 곧장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오고자 한 것이죠. 그만큼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법궤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이고,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받들고자 한 것이었죠. 한 편으로 생각하면 사울은 자기 왕권을 오직 자기 말과 명령에 기반을 둔 자였고, 다윗은 자기 왕권을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을 두고자 한 것이었죠. 그만큼 다윗은 자기 나라의 정통성을 인간의 욕망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궤 곧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기반을 두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하 6장에 보면 3만 명의 군사를 동원해, 법궤가 있는 바알레유다, 곧 ‘기럇 여아림’으로 갔죠. 그리고 그 법궤를 모시고 있던 ‘아비나답’의 집에서 새 수레에 싣고 모시고 오는데, 그때 그 집의 웃사와 아효가 그 법궤 앞에서 자랑하고 과시하듯이 앞에서 수레를 몰았고, 그 수레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를 때 소들이 뛰자 웃사가 그 법궤를 손을 붙잡자, 하나님께 그 웃사를 치셨죠. 그 모습을 바라본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 성으로 모셔오는 걸 두려워하여,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그냥 모셔놓도록 했죠.
오늘 읽은 역대상 13장 1-14절까지가 실은 그 사건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역대상은 패망한 이스라엘을 다윗 왕조와 성전 중심으로 재건하는데 초점을 맞춘 기록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때 일어난 일들을 다시금 떠올리는 알 수 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패망한 이스라엘, 지금은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변방 중의 변방에 지나지 않는 이스라엘, 그 나라를 다시금 재건하는데, 옛 다윗 왕조의 영화처럼 다시금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면, 오직 성전중심으로, 다시 말해 하나님의 법궤를 중심으로 재건해야 함을 깊이 상고하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본문을 통해 다윗이 잘 한 점과 또 실수한 점을 각각 밝혀내고 있습니다. 과연 다윗이 그 법궤를 자기 성으로 모셔오는데 있어서 잘한 점이 무엇일까요? 본문 1-4절에 그것이 기록돼 있습니다.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하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좋게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우리가 이스라엘 온 땅에 남아 있는 우리 형제와 또 초원이 딸린 성읍에 사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전령을 보내 그들을 우리에게로 모이게 하고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뭇 백성의 눈이 이 일을 좋게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 다윗이 법궤를 모셔올 때 잘한 점이 몇 가지가 있다는 것이죠. 첫째로 잘한 점은 법궤를 모시고자 한 당위성이죠. 그것이 곧 나라의 대소사를 자기 방식대로 처리하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궤 앞에서 묻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 법궤를 옮겨오겠다는 것이죠. 사울 때에는 비록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자기가 왕이 된 후에는 그 법궤를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라의 대소사를 묻고 나아가겠다는 뜻이죠. 둘째로 잘 한 점이 무엇인가? 그 일을 독단적으로 하지 않고 지휘관들과 논의하고, 그 다음은 백성들과도 의논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주위 사람들의 자문과 동의를 구했던 것이죠. 셋째로 잘한 것은 제사장과 레위인들까지 동원할 정도로 그 일을 전심으로 준비하여 온 나라의 기쁨으로 삼고자 한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실수한 점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것은 다윗이 실수한 게 아니라 웃사와 아히오(7절), 다시 말해 웃사와 아효(삼하6:3)가 실수한 것이지만, 더 큰 차원에서 보면 다윗이 실수한 점이었습니다. 과연 무엇을 실수한 것입니까? 본문 7-10절에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다윗이 그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모셔오려고 하는데, 그 수레 앞에서 웃사와 아효가 거드름을 피우며 몰고 나간 것, 그리고 그리고 그 수레가 ‘기돈의 타작마당’(9절, 삼하6:6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소들이 뛸 때 웃사가 그 궤를 붙잡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그를 치신 일이었죠. 웃사와 아효는 자기 집에서 40년 넘게 있던 법궤가 있었으니 그 앞에서서 주인행세를 한 것이고, 그 법궤가 뛸 때 자기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거드름을 피워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치신 것이었죠. 그런데도 왜 다윗의 실수로 우리가 큰 틀에서 봐야 하는 걸까요? 다윗이 법궤를 모시고 오는 방법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법궤는 출애굽 광야시절부터 고핫의 자손들(민4:15), 다시 말해 레위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다녔죠. 그것을 다윗이 망각했고, 그 사실을 웃사와 아효에게 바르게 알려주지 않아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치신 것이었죠. 한 마디로 하나님의 법궤, 곧 하나님의 말씀은 전쟁의 부적용이나 자기 과시용으로 삼는 게 아니라 오직 어깨에 메고 떠받들어야 할 진리와 생명의 말씀임을 다윗이 놓치고 있었던 실수였습니다. 그저 법궤만 가져오면 자기 나라의 정통성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다시 말해 다윗 자신에게도 어떤 면에서 보면 법궤를 앞세운 나라의 부적용, 자신의 과시용으로 삼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것을 깨우치도록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던 일이기도 하죠.
그렇기에 패망한 이스라엘, 무너진 이스라엘을 재건하는데, 정말로 하나님의 법궤 곧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어깨에 메는 심정으로 철저히 순종하며 살 때 너희 나라를 바르고 굳게 세워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오늘 본문을 통해 다시금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패망한 나라를 바르고 굳게 세울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법궤,
언약의 말씀에 기반을 둘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말씀을 부적용이나 자기 과시용으로 삼지 않게 하시고,
오직 어깨에 메듯 어떤 상황 속에서도 순종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그것만이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사업장과 교회도 바르게 세워주시는 길은 줄 믿습니다.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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