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13장을 읽으면서 다윗이 오벧에돔의 집에 있는 법궤를 자기 성으로 모셔오려고 하다가 화를 당한 일을 살펴봤습니다. 이른바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서 그 집에서 나오는데 맨 앞에는 웃사와 야효가 주름을 잡으며 앞장서 나갔죠. 그때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 소가 뛸 때 웃사가 나서서 그 법궤를 붙잡았죠. 그런데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셔서 그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죠. 왜 그 좋은 날에 다윗이 그런 일을 겪게 되었는가? 비록 사울이 자기 욕심을 토대로 이스라엘을 세우고자 했던 것과는 달리,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 곧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토대로 이스라엘을 세우고자 했지만, 그 법궤로 자기 나라의 방패막을 삼고자 한 부적용이나, 백성들 앞에서 보이고자 한 자기 과시용으로 삼고자 한 마음도 있을 수 있기에, 웃사를 치심으로 다윗의 내적인 동기를 바르게 세워가도록 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을 경험하게 되면 인생의 연약함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런 시련들을 뜻하지 않게 만나면 자기 인생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되죠.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다 가질 수 있고, 모든 사람도 다 부릴 수 있는 다윗도 그런 사건을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가졌을 것입니다. 과연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과연 내가 하나님의 법궤를 부적용으로, 또는 나의 과시용으로 삼고자 모셔오려 하지 않았던가? 하는 자신의 내적 동기를 가다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서, 그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모셨죠. 그리고서는 시간을 두고서 자신의 내적 동기도 바로 잡았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향을 좇아 그 법궤를 모시고자 다시금 다짐하게 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런 일들을 겪은 후에 다시금 법궤를 모셔오는 일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사무엘하 6장 12-22절을 읽을 때 살펴본 말씀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그때 법궤를 수레에 싣고 올 때 웃사와 아효가 거드름을 피우는 모습도 봤고, 자기 과시용으로 삼고자 한 모습도 낱낱이 지켜봤을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실은 그 모습이 자기 자신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도 깨닫지 않았겠습니까? 더욱이 자기 자신의 그릇된 동기도 깨달았을 것이고, 그래서 이제는 정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동기를 좇아 그 법궤를 다시금 모셔오려고 한 것입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그 법궤를 모십니까? 전에는 새 수레에 싣고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 방식은 블레셋 백성들이 취한 방식이었죠. 그들의 지역에 7개월 가량 법궤가 머무르고 있을 때 그곳 백성들이 모두 독종으로 고통을 당하자, 새 수레를 준비하여 젖 나는 암소 두 마리로 하여금 끌고서 이스라엘의 국경 근처 벧세메스로 가게 하는 방식 말입니다. 다윗이 처음에는 그런 방식을 취했지만,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걸 알고서, 이번에는 이스라엘의 전통방식, 곧 레위인들로 하여금 그 법궤를 어깨에 짊어지고 메게 하는 방식을 취해 자기 성으로 모셔오게 하죠.
사실 그 방식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명령하셨던 방식입니다. 출애굽기 25장 10-22에서도 또 출애굽기 37장 1-9절에서도, 그리고 실제 광야로 나서는 길목의 모습을 보여준 민수기 4장 15절에서도 실제로 레위 자손들이 성막과 관련된 모든 기구들을 메고 나왔죠. 그 중에서도 법궤는 고핫 자손들이 메고 다녔죠.
바로 그와 같은 사실을 다윗이 깨달았던 것이죠. 그래서 본문 1-2절이 이렇게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다윗 성에서 자기를 위하여 궁전을 세우고 또 하나님의 궤를 둘 곳을 마련하고 그것을 위하여 장막을 치고 다윗이 이르되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택하사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영원히 그를 섬기게 하셨음이라 하고.” 다윗이 자기 궁궐을 세우고, 또 하나님의 궤를 모실 만한 장막을 준비하여, 이제 법궤를 모시고 오는데, 이전과는 달리 법궤를 멜 사람, 곧 레위 사람들을 통해 그 법궤를 메고 오도록 준비를 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3-11절까지 이르러, 그 법궤를 모시고 올만한 레위 자손들의 수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두 사람을 불러 모든 레위 자손들을 통솔하여 그 법궤를 모셔오도록 준비하게 하죠. 그러면서 본문 13절을 통해 신신당부하는 주문을 하죠.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 하여 몸을 성결하게 하고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령한 대로 레위 자손이 채에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 이른바 전에 겪었던 일, 곧 웃사와 아효의 그 사건, 더욱이 그 때 웃사를 치신 그 사건을 떠올리며, 이제는 정말로 하나님께서 원하는 방식, 하나님께서 원하신 그 동기를 바르게 해서 법궤를 모셔오는 일에 신경을 쓰라는 당부였죠. 그때 대제사장의 주관 하에 그 레위인들이 그 법궤를 채 곧 긴 봉으로 걸어서 어깨에 메고 왔음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죠.
본문 16-24절까지의 말씀은 그 법궤를 모시고 올 때에 행한 일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른바 19절에 ‘놋제금’을 치는 자들, 20절에 ‘비파’를 타는 자들, 21절에 ‘수금’을 타는 자들, 그리고 22절에 그 제금과 비파와 수금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자들, 또 23절에 궤의 앞에서 문을 지키는 자들, 24절에 궤 앞에서 나팔을 부는 자들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찬양대를 구성해서 법궤를 모시고 오는 일에 기쁜 마음으로 찬양을 했다는 뜻이죠. 그 찬양대의 총 책임자가 바로 17절에 나오는 헤만과 아삽과 에단 곧 여두둔이었던 것이죠. 그만큼 온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고 오는 일에 다들 기쁜 마음으로 동참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29절은 그 기쁜 일에 초를 치는 듯한 말을 전하죠.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보고 그 마음에 업신여겼더라.” 이른바 다윗의 아내이자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 왕이 춤추며 기뻐 뛰는 모습을 보고 업신여겼던 것이죠. 물론 이 말씀 뒷부분이 사무엘하 6장 17-23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무 탈 없이 법궤가 다윗 성으로 오니까 다윗이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다윗이 춤을 추며 기뻐하는데, 그 모습을 바라본 미갈이 몸까지 드러내면서 춤추는 다윗을 보고서 왕의 체면을 구기는 일이라고 비난했죠. 물론 그 비난은 미갈의 혼잣말이라 다윗이 신경 쓸 겨를이 없었죠. 법궤를 붙박이 성막에 안치하고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다윗은 온 백성들에게 축복하고, 떡과 고기와 건포도를 나눠줬죠. 그리고 자기 집으로 와서 가족에게 축복하려는데, 사울의 딸 미갈이 한 마디 하죠. ‘왕은 어찌해서 이 계집종이 보기에도 천박한 몸짓을 놀립니까? 왜 몸까지 드러내며 춤추는 것입니까? 그 꼴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하고 말이죠. 그러자 다윗은 ‘그 일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너무너무 기뻐서 천진난만하게 춤춘 것이요. 나 같은 무지렁이 촌놈을 왕으로 삼아주셨고, 법궤까지도 무사히 모셔왔는데, 내가 이 보다 더 천하게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 앞에서 뭐든 다 할 수 있소.’하고 말했죠. 그 후에 사울의 딸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고, 성경은 증언하죠.
이와 같은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를 리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내용은 임의로 빼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울이 베냐민 지파 출신이기에 굳이 그 지파의 수치스러운 일을 들춰낸다 한들 덕이 되지 않겠다 싶은 까닭이겠죠. 다만 한 가지, “그 마음에 업신여겼더라.” 하는 미갈의 개인적인 어리석음은 기꺼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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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성령님의 음성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법궤를 메는 레위인들이 성결하게 했고, 제금과 비파와 수금과 나팔을 불고 춤을 추며 기뻐하는 모습은 흡사 예배자의 모습이라는 점이죠. 그런데도 이런 모습을 조롱하는 미갈과 같은 자가 있지만, 내가 정말로 기쁨의 제사 감격의 예배를 드리는 자라면 전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감격의 예배가 교회에서는 물론 가정과 일터에서도 삶의 예배로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우리가 원하는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낙심치 말게 하시고,
그 사건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옵소서.
고난의 렌즈를 통해 우리 자신의 내적인 동기를 늘 살피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예배자들을 찾으시는 주님, 모든 예배를 영과 진리로 드리게 하시고,
가정과 일터에서도 삶의 예배를 영적인 예배만큼이나 소중히 드릴 수 있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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