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지내면서, 2년간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내전을 치르는데 힘을 쏟아부었고, 5년 6개월간은 난공불락의 성읍 여부스를 점령하는데 세월을 보냈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 여부스 성읍을 점령한 뒤에 그 성읍의 이름을 평화의 터전, 곧 예루살렘이라 명명했죠. 그리고 그때 왕도도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천도했고, 그 성읍에 자기 자신을 위한 멋진 궁을 짓기 시작했죠. 그때 다윗이 자신을 위한 멋진 궁궐을 짓도록 도와준 인물이 바로 역대상 14장에 나오는 두로 왕 히람이었죠. 그는 다윗에게 사신들은 물론 백향목과 석수와 목수까지 보내 다윗이 궁궐을 잘 건축할 수 있도록 협력했죠. 다윗의 왕국이 신흥강대국이 될 것을 내다본 까닭이었죠.
그렇게 멋진 궁궐 속에서 다윗이 지내는데, 다윗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이유인 즉 자신은 화려한 백향목으로 지어진 궁궐에 거주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법궤는 아직도 초라한 천막 속에, 곧 장막 속에 거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바로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일어난 일을 오늘 본문 말씀이 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무엘하 7장을 통해 이미 읽은 내용이기도 하죠. 본문 1절에 “다윗이 그의 궁전에 거주할 때에 다윗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나는 백향목 궁에 거주하거늘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아래에 있도다” 두로 왕 히람을 통해 지은 예루살렘 왕궁에 거주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비해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장막이 너무 초라하다는 것을 깨달은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고자 마음을 내 비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싶어 했는데, 과연 하나님께서도 그 일을 기뻐하셨는가? 하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4절에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내가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 하나님은 다윗이 짓고자 하는 성전 건축에 제동을 걸고 계신 모습이죠. 과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가 본문 5-6절에 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올라오게 한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이 장막과 저 장막에 있으며 이 성막과 저 성막에 있었나니 이스라엘 무리와 더불어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사사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하고.” 이른바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재하신 분이라는 게 그 큰 이유입니다. 출애굽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계셨다는 것, 바꿔 말해 당신은 제한당하지 않는 자유하신 분, 그 어느 곳에서나 함께 동행하시는 분이라느 점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손으로 지은 건축물에 제한당하는 분이 아님을 천명한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다윗이 그 아들 솔로몬을 앉혀 놓고 개인적으로 고백한 내용에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막으셨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역대상 22장 8절에 나온 말씀이 그것입니다. 자신이 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여 그 피를 흘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지 않는 것 것 같다는 내용입니다.
바로 그런 두 가지 차원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짓고자 한 성전 건축에 제동을 거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는가? 아닙니다. 본문 7-15절까지는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성전 건축에 대해 제동을 거셨지만, 다윗의 그 아름다운 마음은 기쁘게 받으시겠고, 그런 다윗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의 후대에 복을 내려주시겠다는 뜻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른바 내가 너를 양치는 자에서 뽑아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았다는 것, 그래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동행했다는 것, 그래서 이제는 너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한 곳에 거주하도록 하고 악한 자들이 해치지 못하게 해 주겠다는 것, 더 나아가 모든 대적들로 하여금 너에게 복종하게 해 주겠다는 것, 그리고 네가 생명의 연한이 차서 네 조상들에게 돌아갈 때 네 아들 중에 하나를 왕으로 세워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할 것이고, 그가 너를 대신에 내 집을 건축할 것이요, 그의 왕위를 영원토록 견고하게 해 줄 것이다, 하는 약속입니다.
그와 같은 후대의 복을 약속받은 다윗이 어떻게 하는가? 본문 16-27절은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려드리는 내용입니다. 정말로 초라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아주신 것 너무나도 과분한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 또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후대에게도 자신과 같은 은총을 베풀어주셔서 왕위를 견고케 해 주시겠다는 것,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 종이 영원토록 주님 앞에 서 있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처럼 종의 집이 영원토록 복을 받도록 해 달라는, 간구의 기도였죠. 한 마디로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은 무엇을 해 달라고 간구하거나 소망을 아뢰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이전에 베풀어주신 그 은혜를 기억하며, 앞으로도 자기 인생을 철저히 하나님께 의탁하며 살겠다는 그런 기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성령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첫째로 내 계획이 미뤄지거나 틀어져도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전적으로 의탁할 수 있는 자가 돼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계획을 내비쳤지만, 하나님께서는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그로 인해 자기 대에서, 자기 계획한 대로 짓겠다고 고집을 피우거나 떼를 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저 자기 생각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계획이 따로 있음을 믿고 나아갔던 것이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전 건축에 필요한 준비물들은 다윗이 또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점입니다. 역대상 22장 14절을 보면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와 은 일백만 달란트와 놋과 철을 그 중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이 준비하였고” 금 1달란트는 20-40kg 인데, 보통은 33kg이라고 칩니다. 요즘 시세로는 금 1kg가 6천만원이 넘는데, 금 1달란트를 33kg으로 환산할 경우 19억 8천만원이 되고, 그게 10만 달란트라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그 정도로 다윗이 성전을 아름답고 화려하게 짓고 싶어했는데, 그 계획을 하나님께서 제동을 거시자 그 뜻을 접었죠. 하지만 그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정성스럽게 준비했던 다윗입니다. 바꿔 말해 내가 이루고픈 뜻이 무산되더라도 내가 해야 할 바에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점,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던 것이죠.
둘째로, 하나님은 인간이 지은 특정 건물에 제한당하는 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살이에서 구해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기까지 40년에 걸친 광야생활을 하던 동안에도 함께 동행하셨던 분입니다. 한 마디로 무소부재 하신 분이시죠. 그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생각에 제한당하는 분이 아닌 것이죠. 그런데도 인간들은 자기 생각의 틀이나 자기 건물 안에 하나님을 가둬두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램프에 가둬두고 언제든 꺼내서 자기 소원을 이루어 주는 그런 존재로 말이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내 생각의 틀로 제한하려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성전건축을 허락지 않으시면서도 다윗에게 복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8절에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 이것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했기 때문에 그 보답으로 복을 주신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이들이 설날에 어른들을 찾아 인사를 드리는 것은 그 어른을 공경하고 예의를 갖추기 위함이죠. 세배돈은 부차적인 것이죠. 그런데도 세배돈을 받기 위해 어른들을 찾아다니고 공경한다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죠.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고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지, 무언가를 행하기 때문에 복을 주신 분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드리는 이유는 복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피조물로서 당연히 창조주 하나님께 행해야 할 일이죠. 만일 복 받기 위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드린다면 그것은 기복주의 신앙이죠.
*사랑하는 주님.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화려한 성전을 짓고 싶어 합니다.
자신을 과시하고 자기 공로로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물질을 복으로 생각하는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상을 복으로 여기는 성숙한 신앙인들 되게 하시옵소서.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복을 누리는 저희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오늘도 목자요 농부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의탁하는 삶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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