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리는 베냐민 지파를 살펴봤습니다. 베냐민은 야곱의 막내아들로 태어났고, 태어나는 순간 그 어머니 라헬도 죽었죠. 어미의 젖도 빨지 못한 상태 속에서 태어난 베냐민의 출생이 얼마나 암울했겠습니까? 그러나 시작이 작고 미약해도 그 끝을 아름답고 선하게 가꾼 족속이 베냐민 지파였죠. 야곱이 12 아들을 축복할 때 베냐민을 향해서는 ‘물어뜯는 이리’라고 했죠. 그만큼 과격함을 지닌 게 분명했건만 그들은 그 단점을 용감함으로, 곧 장점으로 승화시켰던 지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70년이 지나 다시금 고국으로 돌아올 때 다른 어떤 지파들보다도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왔던 지파가 바로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하나님 앞에 밀알로 내어드리는 지파였죠. 그런 그들이었으니 어찌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축복의 통로로 사용치 않으셨겠습니까?
오늘 읽은 역대기 9장은 역대기에 나오는 마지막 족보 이야기입니다. 사실 역대기 1-9장까지는 야곱의 12아들 곧 이스라엘의 12지파에 관한 족보였고, 10-29장까지는 다윗 왕의 통치 이야기입니다. 다만 오늘 읽은 9장의 족보 이야기는 다윗 왕 이전의 족보가 아닙니다. 다윗 왕 이후, 그것도 바벨론 포로생활을 다 보내고, 다시금 고국 땅에 돌아온 12지파 족보입니다. 쉽게 말해 9장의 족보 이야기가 먼저 기술돼 있지만, 실은 10장보다 더 나중의 역사라는 점이죠.
과연 그렇게 기술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격변하고 있는 포로생활 이후의 이스라엘 사회를 염두에 둔 까닭입니다. 포로기 이후에 고국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사회를 하나로 합쳐 통일왕국의 시대의 모습을 재건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1-9절까지는 8장까지 언급한 지파들의 족보와 달리,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12지파의 족보를 언급한 것이죠. 그만큼 포로기 이후에도 이스라엘 자손들의 대가 끊어지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 “온 이스라엘이 그 계보대로 계수되어 그들은 이스라엘 왕조실록에 기록되니라. 유다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더니.” 여기에서 “온 이스라엘”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참고로 ‘온 이스라엘’이라는 단어가 구약 성경에 105번 정도 사용되었습니다. 평균적으로 따지면 구약성경 1권당 3번 정도 사용된 것이죠. 그런데 역대기에서 무려 40번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정도로 이스라엘 사회 전체가 하나가 되어 무너진 사회를 재건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지파들의 연합을 이끌어내고자 ‘온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더욱이 1절 하반절에는 “유다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더니”라는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가 멸망당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게 모두 죄악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기에서 돌아온 족보가 있고, 그들의 계보가 끊어지지 않은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으로 끝내지 않고 은혜를 베푸셔서 그 민족이 회복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셨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또한 성전을 중심으로 ‘온 이스라엘’이 하나가 돼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본문 10-34절까지는 포로에서 귀환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 관한 족보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이후에 달라진 것 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더 이상 다윗 왕족이 다스린 게 아니라는 점이죠. 북이스라엘은 B.C.722년에 앗수르 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을 당했고, 남왕국 유다는 B.C.586년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했죠.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졌고,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 능력 있는 왕족 출신의 후예들과 명문가 집안의 자녀들이 1,2,3,차에 걸쳐 포로로 끌려갔죠. 그 중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다니엘도 있었죠. 그런데 그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것으로 끝났는가? 아니죠. 그토록 대대적인 군사력을 갖춘 바벨론 제국도 신흥 강대국 페르시아에 의해 529년에 멸망당합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대왕 고레스에 의해, 이른바 이사야 41-46장에 나오는 ‘동방의 의인’으로 나오는 고레스 대왕이, 칙령을 내려 이스라엘 민족이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죠. 더욱이 무너진 성전과 성벽도 재건토록 명령을 내리죠. 그래서 1,2,3차에 걸쳐 포로귀환하게 된 것이죠.
그렇게 포로 귀환한 상태에서는 더 이상 다윗의 왕족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이제 필요한 것은 성전을 재건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붙잡고 사는 것이죠. 이른바 신앙의 재결집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를 위해 필요한 사람들이 누구인가? 바로 본문에 기록된 제사장과 레위인들이죠. 그래서 본문에 1,760명의 제사장, 212명의 성문 지킴이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만큼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여, ‘온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어, 다시금 성전 중심으로 언약백성의 자세를 갖춰 무너진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세워가자는 뜻이죠.
그런데 본문 35-44절은 엉뚱하게도 사울 왕의 족보가 기록돼 있습니다. 여태껏 1-34절까지 포로기 이후에 귀환한 이스라엘의 족보를 밝혀주었는데, 그리고 성전을 중심으로 일을 하게 될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는데, 왜 마지막 부분에서 사울 왕의 계보를 소개하는 것일까요? 사실 사울 왕의 계보는 10장으로 연결돼야 할 부분입니다. 바꿔 말하면 본문의 마지막 부분과 10장의 내용은 한 장으로 엮어야 할 점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나눈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최초 성경의 장절을 구분한 이의 실수라고 할 수 있죠. 구약성경의 필사본은 대부분 양가죽으로 기록한 두루마리 형태로 보관했죠. 그 때는 성경의 장절이 없던 때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였죠. 그랬던 두루마리의 성경에 최초로 장을 나눈 인물이 1228년 스티븐 랭턴 감독이었죠. 그리고 1448년에 R. 나탄이란 사람이 구약에 절을 붙였고, 1551년에 로버트 스테파누스란 사람이 신약성경에 절을 붙였습니다. 바꿔 말해 오늘 본문 마지막 사울의 족보를 9장의 마지막 부분에 붙이게 된 것은 그때 잘못 나눈 까닭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큰 하나님의 뜻, 천지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도록 감동을 주셨을까, 하는 점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해 봤죠. 왜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의 족보를 포로후기의 예루살렘 성읍의 사람들, 그리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족보 다음으로 연결시키게 하신 걸까,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포로 후기의 족보 다음에 사울 왕의 족보를 기록하게 하신 것도 깊은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야만 한 것, 그들이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고 나라를 다시금 세워야 하는 그 수고로움을 겪어야만 한 것, 그 원인 제공자가 바로 사울 왕에게 있음을 잊지 말라는 차원에서 본 장에 넣게 하셨다는 점입니다. 사울이 왕이 되어 통일왕국을 정말로 바르게 이끌었다면, 온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언약백성으로 살도록 이끌었다면 나라가 두 쪽이 나거나 멸망당하지 않았을 것이란 사실이죠. 그것을 반면교사 삼도록, 포로기 이후의 족보사에 편입시켰다는 점입니다.
우리들의 가정도,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가정과 사회가 안정이 되려면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시대가 어둡고 암울하다고 해서, 사울 왕처럼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내 팽개친 채, 자기 욕심과 탐욕에 이끌려 살면 우리들의 가정도 사회도 허물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진심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가정과 자녀들에게 야긴의 하나님, 보아스의 하나님께서 세워주시고 능력을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참포도나무이신 주님의 가지로 붙어 있을 때 열매 맺게 하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비록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들, 유다 백성들이 70년 간 포로생활을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다시금 고국으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하도록 은총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런 포로기 이후의 족보사에 사울 왕의 족보를 기록케 하신 하나님의 뜻을 바라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가정과 자녀들, 이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로 내 욕심과 내 탐욕을 위해 하나님을 등지는 일이 없게 하시고,
오직 언약 백성답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가정과 자녀들과 일터와 사업장으로 세워주시옵소서.
야긴의 하나님, 보아스의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바르게 세워주실 것이요,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저희들에게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도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가지로 붙어 사는 하루의 삶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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