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기를 처음 읽어나갈 때, 역대기는 열왕기서와 다른 관점으로 기록돼 있다고 했습니다. 열왕기서가 이스라엘이 패망하게 된 원인과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면 역대기서는 패망한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했죠. 그래서 역대기서의 중심축은 다윗 왕조와 성전 재건에 있다고 했죠. 다윗 왕조의 기틀을 통해 패망한 나라를 다시 세우고, 또 다윗이 준비하고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중심으로 신앙열정을 회복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나라를 재건케 하신다고 말입니다. 그런 역대기서 중 역대기상은 1-9장까지 아담에서 아브라함을 거쳐 이스라엘의 12 지파에 관한 족보에 관한 내용, 10장-29장까지는 다윗 왕의 역사와 성전 건축의 준비 내용을 담고 있다고 했죠.
어제까지 읽은 역대기 9장까지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셨습니까? 사람들은 레위기를 읽어도 잠이 오지만 역대기상 초반부만 읽어도 잠이 온다고 합니다. 이름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죠. 그런데 왜 그렇게 1-9장까지 족보들을 기록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죠. 패망한 유다를 중심으로 왜 북쪽 지파들까지 다 거론하는가, 하는 점이죠. 더욱이 어제 읽은 9장 1-34절까지는 패망한 이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다시금 돌아온 그 후손들의 족보인데, 왜 그들의 족보까지 기록하고 있는 것인가?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B.C.722년 앗수르 곧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당해 그들의 존재감마저 사라진 마당이고, 남 유다는 B.C. 586년 바벨론 곧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멸망당해 성전도 다 무너지고, 성벽도 다 훼파되고, 심지어 왕족과 고관대작들의 자녀들까지 다 포로로 끌고간 마당이었죠. 그러나 북이스엘과는 달리 남유다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을 베풀어주셨기에 다윗의 후대를 다시금 고국으로 돌려보내주셨죠. 그것이 이른바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이 다 찰 무렵이었죠. 그 무렵 대제국 바벨론도 신흥제국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당했고, 페르시아의 대왕 고레스 곧 키루스 대왕이 칙령을 내려 유다 민족, 다시 말해 이스라엘 민족은 고국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또 무너진 성전도 재건해도 좋다고 공포했죠. 바로 그때 1,2,3,차에 걸쳐 포로귀환이 이뤄진 것이죠.
그렇다면 이제 포로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지파 가운데 중심축도 유다 지파가 될 것이고,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데 모든 초점을 맞추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런 관점 속에서 역대기와 에스라와 느헤미야서를 기록한 것이죠. 그런데 어제도 살펴봤지만 그 유다 지파와 더불어 가장 많은 자손들이 유다 땅으로 돌아간 지파가 베냐민 지파였다고 했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베냐민 지파를 아름답고 복되게 이끌어주셨음을 살펴봤습니다. 물론 포로 귀환자들 가운데에는 베냐민 지파만 있었던 게 아니라 북쪽의 8개 지파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패망한 나라를 재건하고자 하나의 마음, 한 뜻을 강조하기 위해 ‘온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역대기상하서에만 무려 40번이나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남유다와 베냐민 지파, 그리고 북쪽 8개 지파가 한 마음으로 연합하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이스라엘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그 구심점은 혈육의 관점보다도 더 중요한 언약백성의 관점이 중요한 바, 북쪽의 8개 지파 가운데 단과 납달리 지파는 최북단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온갖 우상과 이방신들에게 더 깊숙이 빠져 그들을 언약 백성의계보에서 빼버렸던 것도 살펴봤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그 중심축은 하나님의 언약, 여호와의 율례와 법도를 중심으로 세워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 읽은 역대기상 10장부터 마지막 29장까지는 다윗 왕의 역사와 성전 건축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그런데 다윗 왕의 역사를 시작하기 전에, 오늘 본문은 사울 왕과 관련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역대상의 중심 인물인 다윗 왕을 소개하기 위한 전 단계로 사울 왕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 있는 것이죠. 더 나아가 다윗이 왕이 된 것과 사울이 왕이 되어 하나님 앞에 어떤 죄악들을 범했는지, 왜 그의 왕위가 폐하게 되었는지, 과거의 역사를 더듬어보면서 미래를 바르게 세워가라는 측면의 뜻도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읽은 말씀의 핵심은 사울 왕의 사역이 주를 이루지 않습니다. 그저 사울 왕이 왜 죽게 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를 본문 13절 상반절이 이렇게 밝혀줍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사울이 하나님 앞에 어떤 중죄를 저질렀습니까? 사무엘상 13장을 읽어나갈 때 우리가 살펴봤지만 사울이 왕이 된지 2년이 지나갈 무렵 블레셋과의 전투가 벌어졌죠. 그 당시에는 먼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적들과 싸워야 할지 멈춰서야 할지,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전투에 임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그 제사를 집례할 사무엘이 7일이 되도 오지 않았죠. 그때 사울은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걸 보고서 초조했고, 급기야 사무엘을 기다리다 못해 자신이 나서서 직접 제사를 주관해 드렸죠. 물론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심어린 제사가 아니라 자기 군사와 백성들 앞에 보여주기 위한 요식행위의 제사였죠. 그렇게라도 해서 백성들의 마음을 붙잡아두고픈 마음 말입니다. 그때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죠.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삼상13:13-14)
그런 말씀을 들었다면 사울이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자신이 엉뚱하게 걷고 있는 길에서 돌아서야 하겠죠. 나 보기에 좋은 길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길을 택하여 걸어가는 게,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것이죠. 그런데도 그 후에 어떻게 합니까?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사울 왕이 통솔하는 군대와 아말렉 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때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그 아멜렉 군대를 완전히 진멸할 것이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진멸하고, 심지어 가축떼까지 완전히 진멸하여 하나님의 헤렘, 곧 하나님의 성전이 되도록 하라고 말이죠. 그때 사울이 어떻게 합니까? 군대는 다 진멸하지만, 가축떼 중에서 쓸고 없고 값나가지 않는 가축도 다 죽였지만 그러나 살지고 좋은 짐승들은 모조리 살려서 취해버렸죠. 그때 사무엘이 말했죠. “지금 내 귀에 들려오는 양과 소의 소리가 어찌된 것입니까?”(삼상15:14) 그러자 사울은 변명하죠. 그것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남긴 것이고, 나머지 것들은 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진멸했습니다, 하고 말이죠. 바로 그때 그 유명한 말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15:22)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죠. 그것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30b)과 궤를 같이 하는 말씀이죠.
그런 사건들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한 부분입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런데 본문 13절b-14절은 또 하나의 죄목을 나열하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과연 무슨 사건을 두고 하는 지적입니까? 사무엘상 28장에 보면 블레셋과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때 그 전투에 싸워나가야 하는지 하나님께 물어보아도, 꿈으로도 계시로도 환상으로도, 심지어 우림으로도 응답이 없었죠. 그때 사울이 행한 게 ‘엔돌에 사는 신접한 여인’ 곧 무당을 찾아가 물어본 일이었죠. 그때 그 무당은 땅에서부터 한 영을 불러올렸죠. 그 영의 영체가 마치 사무엘선지자의 모습과 같았는지, 사울은 그 영체를 보고서 곧장 사무엘이라고 환호성을 지르지 않습니까? 그만큼 다급하면, 앞뒤를 분별치 못하고,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어버리는 모습이죠. 그런 모습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아가야 할 사울이, 왕전히 엉뚱한 길을 좇아갔던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진노하셨고, 그가 죽은 것이라고, 그 두 가지 죄악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 왕을 소개하기 위한 전 단계로 사울 왕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왜 사울의 죽음과 그의 두 가지 죄악을 나열하시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패망한 이스라엘을 재건하는데 결코 사울 왕의 발자취를 따르지 말라는 차원이죠. 아무쪼록 우리 자신들도 사울의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아 정말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참포도나무이신 주님의 가지로 붙어 사는 은혜로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사울에게 크신 은총을 베푸셔서 왕이 되게 해 주셨는데,
그만 자기 보기에 좋은 길만을 좇다가 패망하고 죽게 되었습니다.
정말 곤궁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도 하나님께 묻고 기다려야 할 텐데,
엉뚱한 무당을 찾아간 사울의 모습이었습니다.
저희 모두는, 나 보기에 좋은 길이 아닌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길을 택하여 사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참포도나무이신 주님의 가지로 붙어 사는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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