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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절입니다.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새번역은 이렇습니다. “내가 이런 편지를 쓴 것은, 내가 거기에 갔을 때에, 나를 기쁘게 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에게서 내가 마음 아픈 일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기쁨이 여러분 모두의 기쁨임을, 여러분 모두를 두고 나는 확신하였습니다.”
언젠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또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처럼 변화가 없다면, 피차 볼 때 슬프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다음에 함께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그 눈물의 편지를 보냈던 것입니다, 하는 이야기죠.
4절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생각할때마다 마음이 가위 눌리듯 눌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생각하기만 하면 마음에 근심과 걱정에 눌렸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먹고 사는 일 때문에 눌리고 걱정한 게 아니었습니다. 병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바른 삶을 살지 못하는 것 때문에 마음에 눌림 당하고 고통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사랑하시고 그를 쓰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런 부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죠. 오늘도 내가 눌리고 걱정하는 것이 나의 육체적인 것만을 위한 것이라면, 이제는 우리도 바울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눌림과 걱정 속에서 바울이 많은 눈물로 썼다고 하는데, 이것은 3절의 눈물의 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런 것 때문에 사도 바울은 반대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됩니다. 2천 년 전 헬라 문명의 사고방식으로 사나이가 눈물을 흘린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죠. 거짓 교사들은 그 눈물의 편지를 보고 연약한 인가, 유약한 남자, 하고 비난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들은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체험하면 아무리 강철 같은 사람이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나 같은 죄인 같은 사람을 구원해 주신 그 은혜 앞에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까? 따라서 사도 바울이 눈물을 흘리면서 쓴다는 것은 정말 사도 바울은 은혜 받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내가 눈물로 너희에게 애절하게 쓰고, 너희들의 잘못을 지적한 것은 너희들을 가슴 아프게 하거나 근심하게 하려 함이 아니라, 내게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원천이 바울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입니까? 아니죠.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이 바울의 속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 사랑에 바울이 통로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내 속에 넘치도록 역사한다는 것은 그릇된 길로 가는 사람을 바른 길로 돌아서게 하는 능력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이 바른 길로 나아오게 하는 것이죠.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볼 때 그냥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게 아니죠. 묵인할 때가 있지만, 그러나 때가 되었을 때, 그들의 잘못을 권면하고 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권면하는 게 참된 사랑임을 바울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5절에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여기에서 ‘근심하게 하는 자’는 누구인가? 고린도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은 끝까지 용납지 않습니다. 그 거짓 교사들의 선동에 이끌려서 고린도교회에 분란을 일으킨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다수의 대표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않게 함이라, 하는 것은 내 표현이 심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는 뜻입니다. 비탄하게 하는 자가 나 혼자만을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실은 너희들 모두도 비탄하고 근심하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죠. 거짓 교사들의 선동에 의해 교회가 분란이 났으니 모두 그 영향을 받은 것이죠.
6절에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새번역은 “여러분 대다수는 그러한 사람에게 이미 충분한 벌을 내렸습니다.” 사도 바울이 눈물의 편지를 보낸 이후에 교회가 회복을 하면서, 바로 자기들을 뒤흔들었던 그 주동자 되는 사람을 이미 징계를 했습니다. 어떤 형식으로, 어떤 징계를 내린 바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고린도교회가 그 당사자가에게 징계를 내린 것은 마땅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7절에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너희들이 징계한 것은 백번 잘했다, 그러나 지금은 용서하고 위로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오히려 비탄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고린도교회를 뒤흔든 주동자가 지금 징계를 받았는데, 그가 교회에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뉘우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뉘우치지 않았다면 교회를 떠났거나, 남아서 처절하게 싸우겠죠. 그런데 그가 징계를 받고 나와서 뉘우치며 삽니다. 그러니까 용서하고 위로해 주라는 것입니다.
8절에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여기에서 ‘그들에게’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고 ‘그를’입니다. 그 사람이 뉘우치고 교회 회원으로 계속 나오는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뉘우치는 한 너희들은 용서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9절에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내가 너희에게 그를 용서하고 이해하라는 것은 너희들이 범사에 순종하는지 알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범사에 주님께 순종하며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좇아 산다, 어떤 고비때마다 진리를 좇아 산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그런데 우리가 범사에 순종한다는 것은 내가 용서할 자를 용서하는 것도 용서하는 것도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길이란 뜻입니다.
10절에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지금 너희란 고린도교회 교인입니다. 나는 바울을 말하는 것이죠. 그들과 바울은 뗄 수 없는 신앙공동체죠. 그렇다면 여러분이 누군가를 용서한다면 나도 무조건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누가 상처를 많이 받았겠습니까? 거짓 교사들의 선동에 놀아난 그 주동자로 인해 바울이 가장 큰 상처를 받았겠죠. 그런데 바울은 이미 용서했으니, 여러분들도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11절에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뉘우치는 자를 반드시 용서해야 할 것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사탄에게 속는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부당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있는 것을 가로챈다는 것입니다. 그 책략에 빠지지 않으려면 용서해야 할 자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에게 무엇을 빼앗아 가겠습니까?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빼앗아 가려고 하는 것이죠. 따라서 이미 믿음 안에서 고린도교회가 바로 서고 모두가 주님을 향한 중심을 회복했다면, 사단이 중간에서 방해하지 못하도록, 용서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십니까?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변증만 말하는 게 아니라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해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될 때, 한 때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다시금 신앙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 회복의 방법이 때로는 말을 통해서 가능하지만 때로는 바울처럼 눈물의 편지, 눈물의 글로 가능케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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