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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고린도후서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2-17)

by 똑똑이채널 2025.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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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장 12-2장11절까지는 바울의 대적자들에게 모함과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고린도교회에 대한 방문계획 변경에 대한 바울의 자기 변증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그 마지막 부분은 고린도교회 내에 외부 거짓 교사들의 선동과 사주를 받고 교회를 뒤흔드는 주모자 역할을 한 교인을 사랑으로 용서하도록 권면했습니다. 회복된 고린도교회로부터 징계를 받았음에도 교회를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자기 잘못을 뉘우친 사람이죠.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으로 용서하라는 것이죠. 그래야 사단에게 속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죠. 사단은 우리 미움과 이기심을 이용해 분열시키려 하지만 그들을 용서할 때 사단을 이길 수 있다는 거죠.

 

오늘 본문 이후부터는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자기 변증입니다. 12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에베소에서 3차 선교를 하고 있던 바울이 지금 드로아에 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이후의 구절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큰 맥락을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죠. 3차 선교 여행 중에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데 글로에의 집 사람들로부터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을 전해들었죠. 그래서 바울이 방문했지만 그들은 전혀 듣지 않았죠. 다만 바울이 에베소에 돌아와서 첫 번째 편지를 썼죠. 그러나 그들은 듣는 시늉도 않했죠. 대신에 그들은 자신들의 논쟁거리에 대한 답변을 구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죠. 그때 바울은 디모데를 먼저 보내서 해결하도록 함과 동시에 자신의 두 번째 편지를 써서 보냈죠. 그것이 고린도전서라고 했죠. 그런데 디모데도, 또 고린도전서도 어떤 해결의 실마리보다 상황이 더 악화될 뿐이었죠. 그래서 바울이 소위 말하는 ‘눈물의 방문’을 했는데 그들은 외면해 버렸죠. 그러자 다시 돌아와 세 번째 편지를 써서 디도 편으로 보냈죠. 그러면서 염려가 되어 마게도냐로 건너갔는데, 마게도냐로 건너가려면 바로 아시아의 항구가 있는 드로아로 가야 했던 것이죠. 바로 그때 드로아에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기로 했던 것이겠죠. 그런데 드로아에서 어떤 일이 있었다고 밝힙니까?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드로아에 갔는데 주 안에서 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문이 열렸다’는 것은 전도의 기회가 활짝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바울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길을 멈추고 전도를 위해 올인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3절에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전도의 문이 열렸지만, 드로아에서 만나기로 한 디도가 오지 않아서 마음이 편치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어떻게 했다는 것입니까? 고린도에 간 디도가 서서히 북쪽으로 해서 마게노야에서 배를 타고 드로아에 오면 되는데, 바울이 직접 그 마게도냐까지 건너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작별을 했다”는 것은 2차 선교여행 때 함께 동역한 동역자들일 수 있고, 드로아에서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일 수도 있겠죠. 그들에게 전도의 문이 열린 드로아의 일은 맡기고 바울은 마게도냐로 갔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일생과 편지 | 권 성 권 -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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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의 신앙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삶의 우선순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었지만 삶을 무계획으로 산 게 아니라 계획을 갖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의 우선순위는 드로아가 아닌 고린도교회입니다. 그런데 드로아에 복음의 문이 열렸고 그래서 드로아에 머물 수도 있었지만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가기 위해 마게도냐를 택했다는 점입니다. 왜죠? 우선순위였죠.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도 똑같습니다. 강도 만난 자를 나귀에 태워 주막집에 뉘였죠. 그런데 그는 비용이 들면 돌아올 때 갚겠다고 하면서 자기 길을 떠납니다. 자기 삶의 우선순위를 놓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그는 자기 사업을 위해 출장가던 사람이고, 가던 길에서 피투성이가 된 그를 여관이나 호텔에 눕히고 치료하게 한 다음에, 자기 사업차 떠난 사람이죠.

그리스도인은 삶의 우선순위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제가 50대나 60대 직장인과 함께 차를 마시고자 한다면 그 분들은 낼 수 있죠. 그런데 30대나 40대 직장인을 불러서도 안되지만 그 분들도 응해서도 안 되죠. 그곳의 일이 우선순위요, 그래야 직장에서 빛과 소금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기독대학생이나 청년들에게 우선순위는 뭘까요? 실력을 기를 때까지 공부하는 데 있죠. 맞벌이 부부가 아닌 주부에게는요? 가정과 자녀들을 돌보는 데 있죠. 그런데도 교회에 나와 죽치고 있다면 결코 빛도 소금의 역할도 감당할 수 없죠. 그래서 교회는 주차장이 아닌 주유소의 기능을 해야 합니다. 영적인 충전을 하고 삶의 현장에 나가 전문인으로서 빛과 소금의 삶을 다하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이 디도를 만나지 못한 불편한 마음을 안고 마게도냐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14절에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바울이 불편한 마음으로 마게도냐로 건너갔다고 하는데, 14절에서는 자기를 사도 삼아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을 합니다. 왜죠? 왜 그렇게 급반전이 이뤄지고 있는 걸까요? 내용상으로는 고린도후서 7장 5-7절과 연결이 돼 있습니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낙심된 마음으로 마게도냐를 건너갔는데, 그곳에서 디도를 본 것이고, 디도가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잘 수습하고 돌아왔다는 보고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기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곳 마게도냐에서 곧바로 네 번째 편지 곧 우리가 읽고 있는 고린도후서를 써서 보냈던 것입니다. 그 감사의 마음을 지금 먼저 쓰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일생과 편지 | 권 성 권 -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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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바울은 두 가지 차원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첫째는 14절 말씀처럼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하시는 것 때문에, 또 하나는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냄새란 번제물을 태울 때 나는 냄새인데, 곧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흠향하시는 것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15절에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바울은 제물을 태우는 냄새처럼,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제물이 되셔서 그 향기를 하나님께 올려드린 것이죠. 우리도 예수님을 향한 제물이 됨으로 하나님께 향기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16절에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모든 사람에게 향기가 풍겨지는데,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이죠. 전쟁에서 승리한 병사들의 향기는 생명의 냄새지만 포로로 끌려가는 병사들에게 그 향기는 죽음을 의미하죠. 마찬가지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향기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향기입니다.

그런데 16절 마지막 부분이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새번역에서는 이런 일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데, 17절의 새번역은 “우리는, 저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죠. 우리는 거짓교사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 먹은 장사꾼처럼 혼잡하게 한 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진실된 사람들처럼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일생과 편지 | 권 성 권 -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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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무엇을 깨닫게 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거짓교사들처럼 자기 욕심을 섞어서 복음을 전한 게 아니었습니다. 바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 일이 하나님 앞에서 행한 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코람데오’의 의식을 갖고 복음의 향기 곧 제물의 향기가 되었던 것이죠. 거짓 교사들이 머리를 잘 굴려 이득을 보는 것 같았지만, 코끝의 호흡이 끝남과 동시에 모두 끝나버릴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을 위해 당대에 손해 보는 것 같지만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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