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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을 모함하던 거짓 사도들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추천서 한 장, 혹은 자기 소개서 한 장 제출한 적이 없다는 걸 좋은 구실로 삼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짜이기 때문에 추천서나 자기소개서를 쓸 수 없다고 공박을 한 것이었죠.
그걸 알게 된 바울은 부랴부랴 추천서나 자기 소개서를 썼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었죠. 자기를 공박한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추천서에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데 있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죠. 설령 추천서나 자기 소개서를 보내도 그들은 그걸 가지고 또 꼬투리를 잡을 게 뻔했죠. 그래서 바울은 상상할 수 없는 추천서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른바 너희를 향한 나의 삶이 추천서이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죠. 1년 6개월 넘게 고린도교회를 여러분과 어떻게 세웠는지 당신들이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만큼 거짓 교사들의 추천서는 얼마든지 꾸미고 위조하고 색이 바랄 수 있지만 주님을 향한 헌신과 봉사의 향기 나는 삶은 꾸밀 수가 없다는 뜻이었죠. 그것은 가슴에 새기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편지가 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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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연장선상에서 오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도직 수행에 대한 사도 바울의 긍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4절에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사도 바울에게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가 자신을 향한 추천서라 했고,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는데, 그 확신은 개인적인 신념에 의한 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로 말미암아 확신’하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향한 확신’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자기 삶이 늘 하나님 앞에서의 삶임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이란 사실을 늘 객관화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나를 위한 수단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죠. 반대로 나를 하나님의 말씀 앞에 객관화하면 무엇이 굽어 있는지 알 수 있죠. 그래서 이미 살펴 본 고린도후서 2장 17절을 통해 그 당시 복음의 행상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수단으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이단 사이비 집단과 같은 격이죠.
그렇다면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졌던 4절 이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5절에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나의 만족이 원천이 아니라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원천이 되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비극은 자기 스스로 만족의 원천이 되려는 데 있습니다. 잠언 30장 15절 말씀처럼 인간은 거머리처럼 “다오 다오”하지만 더 채우려고 한다는 것이죠. 그럴 때 정도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것은 빌라도도 마찬가지였죠.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할만한 죄목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토록 했습니까? 그 법정에서 소리치는 유대인들에게 만족을 주고자 함이었죠. 그러나 한 꺼풀 더 깊이 들어가면 빌라도 자신의 만족을 위함이었습니다. 자기 지위를 보존코자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그들이 난동을 부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책임을 물어 자신이 해임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만족과 자기 자신을 동시에 만족하기 위함이었는데 그 ‘만족’(막15:15)이란 단어와 본문의 ‘만족’이 ‘히카노스’(ἱκανός)로 똑같은 단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이 세상의 만족으로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거듭난 존재로 들어가는 것이죠. 그만큼 하나님만을 만족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을 향한 존재지향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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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만족’을 뜻하는 ‘히카노스’란 단어는 만족과 함께 ‘감당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감당하든지, 그 감당의 주체는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새번역은 “우리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서 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격은 하나님에게서 납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이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어떻게 내품든지, 그리스도의 어떤 편지로 살든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난 삶이라는 뜻입니다. 바꿔 말하면 무슨 뜻입니까? 바울은 어떤 일이든지 감히 감당할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 자격을 부여하시기 때문에 행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겸손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만족을 뜻하는 ‘히카노스’란 단어가 ‘감당’(ability)이란 뜻과 함께 ‘충분’(sufficient)이란 뜻도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룻기서 1장 20절의 70인역 성경에서 ‘히카노테스’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나오미가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했다”할 때, 그 ‘전능자’가 바로 ‘히카노테스’입니다. 그 단어는 욥기서 31장 2절에서도 ‘전능자’로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전능자요, 그 뜻은 충분자라는 의미죠. 하나님은 그 생명이 충분한 분이시고, 그 능력이 충분하신 분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바울도 그렇습니다. 자신은 아무 자격도 없지만 무슨 일이든 감당할 자격과 능력을 주시는 그 하나님이 바로 충분자, 곧 전능자시기 때문에 감당하며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죠. 나는 비록 약하고 연약하지만 충분자 되시는 주님으로 인해 내게 주어진 모든 일들을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 충분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무슨 일을 맡기셨습니까? 6절에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한 나라나 권력의 제왕을 맡긴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복음의 일꾼되는 것 하나로 만족하도록, 그 일을 충분히 감당하도록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6절 하반절에서 11절에 이렇게 밝힙니다.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율법 조문은 ‘기록된 율법 조문’을 뜻하는 것이고 그것과 대비되는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영’은 ‘프뉴마’로 성령입니다. 그만큼 생명을 전하는 것은 율법 조문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니라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성령님의 역사로 가능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 조문을 받은 직분자가 모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으로 모세에게 맡긴 것이었죠. 그런데 모세의 영광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만, 영의 직분 곧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은 더욱더 영광스럽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심판의 기능이 강하지만 주니의 복음은 생명의 기능이 강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심판의 직분도 영광이었다면 모든 인간을 살리는 복음의 직분은 더 영광스럽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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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오늘 성령님께서 바울이 쓴 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십니까? 바울에게는 돈도 권력도 세상 명예도 없었습니다. 그가 맡은 직분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직무에 절대적으로 만족하며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자 되시는 하나님으로 인함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 분이 모든 영광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들도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힘든 상황에 놓이든지, 또 어떤 하찮은 일을 맡든지, 그 직무가 충분자되시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게 중요하죠. 모든 일을 그 분 앞에서 행한다는 자세로 살아갈 때 때로 우리가 예기치 못하는 은혜의 선물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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