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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을 통해 주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도직 수행에 대한 긍지를 표현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주님을 위한 추천서요 향기라고 말이죠. 그만큼 바울은 주님의 부름을 받은 사도로서, 자기 직분에 대한 긍지와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자기 자신의 영광의 직분에 대해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비교 설명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 내려왔을 때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다고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는 그 얼굴의 광채를 수건으로 가렸죠. 문제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 영광의 광채가 바로 모세 자신에게 나온 게 아니라고, 율법의 형식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고, 모세가 받은 그 직분의 영광은 하나님께 나온 것이요, 율법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영광임을 일깨워주고자 함이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왜 그와 같은 이야기를 빗대서 자기 직분의 영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고,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마찬가지기 때문이죠. 고린도교회에 침투한 율법주의자들의 농간에 의해 그들이 율법보다도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인데도 그들이 놓치고 살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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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연장선상에서 바울은 오늘 4장1절-5장10절을 통해 어떤 마음 가짐으로 직무를 수행했는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본문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이 직분이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3장 6절에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사도라는 구체적인 호칭을 가진 직분이기도 하지만 복음의 일꾼된 직분이죠.
중요한 것은 4장 1절이 ‘그러므로’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른바 전능자 곧 충분자 되시는 하나님의 영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었죠. 곧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자에게 자유가 주어지죠. 왜냐하면 그 영 곧 성령 안에 있는 자는 죄와 죽음의 정죄로부터 자유를 얻고 담대한 용기 속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여기에서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란 어떤 뜻입니까? 그 담대함과 용기의 출처가 나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셨기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새 언약의 일꾼이 된 것도 주님의 긍휼하신 은혜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이죠. 만약 그 긍휼하신 은혜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바울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모습은 사도행전 26장 9-11절에서 고백한 바 있죠. 주님의 긍휼하신 은혜를 받기 이전의 바울은 주님의 완전한 대적자였죠.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앞장섰고, 기독교인들을 색출해 감옥에 처 넣는 앞잡이였죠. 그런 바울에게 주님의 긍휼하신 은혜가 임할때 그가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죠.
그런 바울이 어떤 마음 자세로 일한다는 것입니까? 낙심하지 아니한다.” ‘낙심하다’는 단어가 고린도후서 4장 8절에도 나옵니다. 이 ‘낙심’은 절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 1절의 ‘낙심하지 아니한다’는 말은 ‘용기를 상실하지 않는다’는 뜻이죠. 내가 상대를 충분히 이기고 제압할 수 있는데도 내가 져주는 것은 믿음의 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악에 대항해서 한 번도 맞서려고 하지 않고 굴복해버리는 것은 다른 차원이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간판을 내리는 꼴이죠. 바울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죠? 내게 긍휼을 베풀어주신 ‘충분자’가 나와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기를 상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절에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바울은 그 충분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그 용기가 있었기에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속임을 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목적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 상대가 파멸당하는, 그런 속임수로 살지 않았다는 뜻이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고린도후서 2장 17절에서 이미 살펴봤죠. 고린도교회의 침투한 거짓교사들 곧 복음의 잡상인들의 모습이 그것이었죠. 그들은 복음의 혼합물을 넣고 살았죠.
그러나 바울은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여기에서 진리를 ’나타내다’는 ‘파네로시스’(φανέρωσις)는 ‘눈에 보이게 한다’는 단어입니다. 진리를 입으로만 공허하게 하는 게 아니라 삶으로 보여줬다는 뜻입니다. 그 삶이 각 사람의 양심에, 각 사람의 심령에 주님의 추천서로 남아 있다는 것이죠.
3절입니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바울이 전한 복음이 속임이 않았고, 잡상인처럼 혼합물을 섞지 않았고, 오직 진리를 드러내는 삶이었는데, 상대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상대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지 못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로 담대한 표현을 바울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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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요? 1차 선교여행 때 구브로를 지나 살라미를 거쳐 버가와 비시디아 안디옥에까지 갔습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어떤 이들은 받아들이지만 다른 이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방해를 하죠. 그때 바울이 깨달은 게 사도행전 13장 48절입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무슨 뜻입니까?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그곳에서 영생을 주시기로 택함 받은 사람들은 주님을 믿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1절의 긍휼하심이 구체적으로 무얼 의미하는 것입니까? 지금 3절과 연결이 되는 것이죠.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긍휼하심은 우리를 택함 받은 주님의 자녀로 불러주셨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까? 바울처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삶 속에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4절입니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빛을 볼 수 없도록 세상 사람의 마음을 혼미하게 만드는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세상의 신’이라는 것이죠. 지금 바울은 사탄을 ‘세상의 신’으로 칭했습니다. 왜 사탄이 ‘세상의 신’입니까? 사탄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사탄은 우리의 영혼을 줄 수도 없고 주님께서 주신 영혼을 가져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이 세상 것에만 몰두하게 만듭니다. 주님을 섬기지만 그럼에도 세상을 더 섬기게 만드는 게 사탄의 역할이죠. 그래서 믿는 자들조차도 미혹시켜 하나님의 사람들을 혼미케 하려는 것이죠. 그렇다며 주님의 긍휼하심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때로 사탄에게 미혹당하고, 주님보다 세상을 더 섬기지만,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보도록 눈을 열어주시는 것이죠. 그 빛을 보며 살도록 늘 진리의 빛으로 조명해 주시는 거죠.
5절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바울은 주님의 긍휼을 받은 자로서 자기 자신을 전파하는 게 아니라 오직 주님만이 자신의 주님이심을 전파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예수님의 종이된 것을 전파한다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어두운 데서 빛이 비치라’ 이 말씀은 창세기 1장의 말씀이죠. 온 세상이 흑암일 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세 가지 특징이 있었죠. 흑암, 혼돈 곧 무질서, 그리고 공허함 곧 텅 빈 상태였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실 때 흑암이 없어졌고 빛이 임했죠. 또한 혼돈한 세상이 질서의 세상으로 바뀌었죠, 그리고 공허함 곧 무효한 세상에서 유효한 세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만큼 그 빛이 우리 마음속에 임할 때 어둠, 혼돈, 공허함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에 성령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혼탁한 세상에서 주님의 자녀로 살 수 있는 것은 주님의 긍휼하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긍휼하신 은혜의 빛이 우리를 감싸고 계시기에 어둠과 혼돈과 공허함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땅에서 주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은혜 안에 거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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