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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고린도후서

이 보배를 질그릇에(고후4:7-15)

by 똑똑이채널 2025.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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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4장 10절부터 5장 10절까지는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이 사도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세를 밝혀줍니다. 그 토대가 주님의 긍휼하심에 있음을 밝히는 내용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의지나 결단으로 사도가 된 게 아니었죠. 오직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사도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신’에 사로잡혀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이 있는데, 바울은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주님의 전적인 택하심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었죠. 그것이 주님의 긍휼하심이죠.

 

그 연장선상에서 7절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은 ‘그러나’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이 보배가 뭡니까? 6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입니다. 빛 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빛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죠. 우리도 어둠에 눈먼 자였는데, 진리요 생명이신 하나님을 아는 빛을 주신 것이죠. 내가 빛에서 어둠으로 끝났다, 내가 소망으로 시작했는데 절망으로 끝났다, 내가 알찬 삶을 살다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공허해졌다? 그것은 주님을 잘못 믿은 것이죠. 주님은 반드시 어둠에서 빛으로, 혼돈에서 질서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세상에 그보다 더 큰 보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세상 모든 사람은 보배를 보배함에 넣습니다. 보석은 보석함에 어울리는 상자에 넣죠. 그 누구도 보배를 아무 곳에나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는 것입니다. ‘질그릇’은 우리 자신이죠. 질그릇은 가장 싸고 부서지기 쉬운 것이죠. 누구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에 비하면 우리는 먼지죠. 세상 사람들은 보배 상자에 넣는데, 하나님께서는 보배이신 당신 자신을 질그릇에 지나지 않는 우리 속에 넣어주셨습니다. 오직 당신의 긍휼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죠.

왜 주셨는가? “우리가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질그릇도 되지 않는 우리 자신을 더더욱 깨닫게 됩니다. 내 능력이나 실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통감할 수 있게 되죠. 오직 그분의 긍휼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알도록 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우리 속에 넣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의 삶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질그릇인 자기 자신 속에 하나님을 담아주심을 알았기에 사도로서 더 확고하게 살았던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8절을 통해 고백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여기에서 ‘우겨쌈을 당하다’는 헬라어 ‘틀리보’(θλίβω)는 포도열매를 가득 넣고 포도즙을 만들기 위해 내려누르는 동작입니다. 그 단어는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주먹밥을 쌓는다는 것과 같죠. 살다보면 내 삶의 처지가 우겨쌈을 당하는 것과 같을 수 있죠. 바울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는다는 것이죠. 왜죠? 내 속에 충분자요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죠.

아람 나라 왕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는데, 그때마다 이스라엘이 다 방비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모든 지역들을 방비하도록 한 것이죠. 그래서 아람 왕이 군대를 일으켜 도단 성읍의 엘리사를 우겨쌉니다. 그런데 게하시는 우겨쌈 속에 빠졌지만, 엘리사는 “너와 나와 함께 하는 자가, 저들보다 더 많다”고 이야기하죠. 열왕기상 6장 17절을 통해 엘리사가 하나님께 기도하죠. 게하시의 눈을 열어주도록 말이죠. 그때 하나님께서 게하시의 눈을 열어주셨는데, 아람 군대보다도 더 많은 하나님의 군대가 그 군대를 에워싸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죠. 엘리사는 사실 질그릇밖에 되지 않죠. 그러나 그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셨기에 결코 우겨쌈을 당하지 않는 것이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는데, 낙심치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절망하지 않는 걸 말합니다. 왜죠? 그 분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를 인도하시기 때문에, 절망에서 소망으로 나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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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에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박해’란 ‘디오코’(διώκω)로 사냥감을 좇아가는 행동입니다. 사냥감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모습이죠. 그렇게 나를 박해해도 나는 버림바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먹잇감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왜죠? 내 속에 그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ἀπόλλυμι) 아니한다고 말합니다. 넘어져도 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왜죠? 죽음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 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참수형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내 삶과 일과 사업과 계획이 거꾸러트림을 당해 완전히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계시는 한 결코 끝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죠. 주님은 그 속에서 대반전의 역사를 쓰시는 분이기 때문이죠.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는 것은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그때 우리 몸에 주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거꾸러트림을 당하고 우겨쌈을 당하는지 알 수 있죠. 그런 일들을 통해 그 분의 생명과 능력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11절입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몸은 죽을 육체입니다. 하루하루 우리의 육체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죠. 매일매일 흙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죠. 그런 육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을 때에 주님의 온전한 생명이 드러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듯 흙인 육체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담긴다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게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육체 자체를 목적으로 삼을 때 육체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육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과 진리를 보여주는 도구가 된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육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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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일생과 편지 | 권 성 권 -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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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에 바울의 중심자세가 나옵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우리란 바울과 디모데와 디도 같은 이들이죠.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육체를 통해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나기 위함이었죠. 그 삶을 사는 궁극적인 목적은 ‘너희 안에서’ 곧 고린도교회 성도들 안에 주님 생명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죠.

13절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이것은 주전 250년 경의 칠십인역 번역본의 시편 116편 10절을 인용한 것이죠. ‘내가 믿었다는 것’ 이 시를 쓴 시인은 소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나는 버림바 되지 않는 것을 확신한다는 것이죠. 그 시인처럼 바울과 동역자들도 믿었기에 고린도교회를 향해 주님의 복음을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14절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셨기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이여 너희들도 살리시고 서게 하실 줄 아노라, 하는 것입니다.

15절의 새번역은 이렇습니다. “이 모든 일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서,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고 거꾸러트림을 당해도 망하지 아니한 것은 결국 너희를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답답한 일을 당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가는 것은 우리로 말미암아 주님의 생명이 한 사람이라도 더 퍼져서, 그들이 그로 인해 주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됨이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긍휼하심에 보답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인데, 그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죽어가고, 그로 인해 누군가가 주님의 생명에 의해 살아나는 것이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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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령님께서 무슨 음성을 깨닫게 하십니까? 우리가 바울처럼, 나 한 사람이 바른 그리스도인이 될 때 내가 주님과 함께 죽는 삶을 통해 누군가 새 삶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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