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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사도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수행하는 자세를 계속 밝혀주었습니다. 바울이 오직 주님만 위해 살아가는 그 근거는 자신의 의지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은총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쌓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치 않고 거꾸러트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만 자기 육체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살 수 있는 이유는 질그릇과 같은 자기 육체 안에 보배이신 하나님의 빛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담아주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빛 속에 거하면 두려워할 게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자신을 나타내는 마지막 단락입니다. 16절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한다.’ 왜죠? 하나님께서 보배를 바울의 심령 속에 담아주셨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바울도 그렇고 우리들도 세상을 살다보면 낙심할 일이 참 많죠. 그때마다 그 상황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내 안에 보배이신 주님 때문에 다시 일어서는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죠.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여기에서 ‘겉사람’이란 육체를 말하는 것이죠. 우리의 육체는 낡아진다는 것은 소모되는 것, 곧 점차 빛이 바래지는 것, 머잖아 닳고 닳아 썩는 걸 말하죠. 옷도 그렇지만 우리의 육체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소모의 대상에 따라 그 의미는 전혀 달라집니다. 무가치한 것을 위해 내 육체를 소모했다면 허망한 것 뿐이죠. 하지만 가치 있는 것을 위해 육체를 소진했다면 참으로 새로운 의미로 승화되는 것이죠. 바울이 육체는 비록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말한 의미가 그것입니다. 여기에서 ‘새로워진다’는 ‘아나카이노’(ἀνακαινόω)라는 동사는 반복을 뜻하는 ‘아나’( ἀνά)와 ‘새롭다’는 의미의 ‘카이노스’(καινός)가 결합한 단어입니다. 한 번 새로워지는 게 아니라 날이 갈수록 더욱더 새로워지는 걸 말하죠.
그래서 진장한 의미의 나이듦이란 이 세상에서 줄 수 없는 훈장이자 상급과 같은 것이죠. 낡아지는 육체를 보고 사람들은 허무하다고 말하지 모르지만 그 육체가 망가진 만큼 그의 속사람도, 그를 통해 자식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성장하고 성숙해졌다만, 그것이야말로 큰 자랑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잠언 16장 31절에서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하고 고백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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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7절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이 짧은 문장에 대조되는 게 있습니다. ‘잠시’와 ‘영원’, ‘환란’과 ‘영광’, ‘경한 것’과 ‘중한’ 게 그것입니다.
아무리 환란이 커도 잠시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육체는 낡아지기 때문이죠. 그 영원한 하나님의 큰 영광에 비하면 모든 환란은 실은 가벼운 것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매일매일 육체가 낡아지고 병이 드는 것, 그것이 육체의 관점에서는 환란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잠시라는 것입니다. 육체는 결코 영원하지 않고 대단히 무거운 것 같지만 실은 가벼운 것 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내 속사람이 강건케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의 무게가 된다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주목하다’는 것은 시선을 집중하는 걸 말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자들과 달리 보이지 않는 것에 집중한다는 것이죠. 왜죠?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18절 말씀도 이 한 구절만 봐도 큰 교훈이 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도 앞에 나온 육체와 관련된 말씀으로 연결지을 필요가 있죠. 바울은 날로 낡아지는 우리의 육체에 자신의 시선을 고정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 영원한 생명, 그 생명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이죠.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5장 1절이 이렇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헬라어 원문에는 “왜냐하면”이 들어가 있죠. 따라서 4장 18절을 설명하는 게 5장 1절입니다. A.D. 1228년에 스테판 랑톤이란 사람이 성경의 장절을 나눴죠. 그런데 잘못 나눈 게 많은데, 오늘 읽은 말씀도 5장을 끊어버렸지만, 실은 4장 18절과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이 말씀이 천국을 의미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이 장막 집, 곧 텐트는 우리의 육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육체를 성곽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돌로 만든 성곽은 수 백 년 갑니다. 로마에 가면 2천년 전에 지은 성곽이 있죠. 그런데 바울은 우리의 육체를 텐트라고 칭합니다. 텐트는 한시적입니다. 바람이 불면 펄럭입니다. 맹수의 공격 앞에서도 지켜주질 못하죠. 우리의 육체는 그토록 연약한 텐트라는 것입니다. 그 텐트가 무너지면, 곧 하나님으로부터 지어진 것, 곧 인간이 지은 게 아닌 하나님의 영원한 집이 있는 줄 안다는 것이죠. 그 영원한 집은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 영원한 몸을 말합니다. 죄 짓기 이전의 아담에게 입혀준 그 몸 말입니다. 그래서 내 육체가 무너지면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입혀줄 그 몸이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것을 소망하며 살아간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 텐트와 같은 육체가 무너지면 없어지지만 하나님께서 입혀 줄 몸은 영원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내 시선을 거기에 고정시키며 산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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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우리가 여기 있어’ 하는 것은 이 텐트, 곧 육신에 있다는 것이죠. ‘처소로 덧입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입혀 줄 영원한 몸을 말합니다. 그 영원한 몸을 덧입기를 내가 육체의 텐트 속에 살고 있는 지금도 간절히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 있는 걸 ‘탄식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탄식한다’는 말을 쓰죠.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몸을 덧입기를 사모하는데 탄식한다는 것은 실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죠. 하지만 헬라어 원문의 의미는 절망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탄식하는 게 아니라 내게 확실한 영광을 보여주기 때문에 짓는 ‘탄식’입니다.
이를테면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책을 인터넷으로 구입을 합니다. 제가 대금을 결제하고 구입완료를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어떻게 합니까? 구입한 물건이 언제 오는지 기다리면서, 오늘이냐고, 아니라면 내일이냐고, 그렇게 갈망하는 것이죠. 그래서 ‘어휴, 이틀이 지났네.’하고서 한숨을 짓는 것 말입니다. 그러면서 보다 확실한 그 만화책을 받을 날을 기다리는 것이죠. 바울이 지금 그걸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육체의 연약한 텐트 속에 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덧입게 될 그 영원한 몸, 그 신령한 몸을 너무나도 갈망하는 상태에서 한숨을 짓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그 영원한 몸, 신령한 몸을 입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가 벗은 자가 되지 않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 신령한 몸을 입지 못한다면, 그 영원한 생명을 벗은 자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육체가 낡아지면서 살다가 코끝의 호흡이 사라지는 날 한 줌의 흙으로 끝나버리는 것이죠. 그런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울이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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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도록, 한 줌 흙으로 끝나버릴 삶이 되지 않도록 살 수 있기 바랍니다.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화로운 삶에 목적을 두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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