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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4장1절부터 5장10절까지는 사도 바울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도직을 수행하는 자세에 대한 내용이었죠. 그 근거를 네 가지였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긍휼이라고 했죠. 바울이 먼저 찾은 게 아니라 주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긍휼을 베풀어주셨죠.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빛을 자기 속에 부어주셨기 때문이라 했죠. 질그릇 속에 보배를 담아주신 것 말이죠.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자신이 깨어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죠. 셋째는 하나님께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그 보증으로 성령님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했죠.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는 것이죠. 넷째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며 살기 때문에 자기 생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맡긴 사도직의 근본 목적이 화목케 하는 데 있고, 그 원동력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11절에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주님의 두려우심을 안다는 게 무엇이고 뭘 권면한다는 걸까요? 헬라어 원문에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10절 내용을 받는 게 11절입니다. 11절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주의 두려우심을 알고 사람들을 권면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두려움을 알기 때문에 그 날을 대비해서 뿌려야 할 것을 뿌리도록 권면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심판대의 ‘두려움’이란 공포가 아니라 내가 뿌린 것을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상급의 날이죠. 그래서 너희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 날의 상급을 준비하라고 권면한 것이죠.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사도 바울이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고, 권면한 것이, 하나님 앞에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자신들의 중심과 신앙인격이 하나님에 의해 바른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마음과 양심이 너희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고린도교회에서 사도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모함하고 음해하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죠. 그들은 바울을 비인격적인 사람이라고 흔드는 이들이 있었죠. 그래서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에 의해 바르게 판정된 것처럼 너희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만큼 하나님을 신실하게 경외하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서 분별해 주실 것을 믿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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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사도 바울의 이 말도 고린도교회의 배경을 우리가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세웠던 고린도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이 가지고 온 게 무엇이었죠. 추천서였죠. 외적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왔죠. 그렇게 하면서 사도 바울은 추천서나 자기소개서가 없지 않느냐, 하면서 부정한 것이죠. 바로 그 배경 속에서 오늘 본문을 쓴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신앙인격이 하나님에 의해 바르게 판정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가 새삼스럽게 너희에게 자천하고자 하겠느냐는 뜻입니다. 왜 그 이야기를 합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중심을 자랑하는 것이지, 거짓교사들처럼 외형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중심이 형편없이 외형만 자랑하는 그들을 바르게 판별하라는 뜻이죠. 물론 바울은 빌립보서 3장 4-9절을 통해 자기 외형을 자랑할 게 많지만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하죠. 왜죠? 바울을 둘러싸고 있는 외적 자랑거리들이 질그릇이기 때문이죠. 그것이 오히려 해가 된다는 것을, 그것을 깨야, 내 속에 보배이신 주님을 모실 수 있기 그만큼 너희들도 자기 소개서나 추천서와 같은 외형을 자랑하는 이들을 분별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13절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왜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거짓 교사들이 바울에게 ‘미쳤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이죠. 물론 바울은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나 미쳤는데,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서 내가 미친 사람이다.’하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욕심과 자기 이기심을 위해 미칠 때 타인을 죽이는 흉기가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해 미치면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되는 것이죠.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향해 미치지 않고, 어떻게 종이에 쓰여 있는 이 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수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께 미치지 않고,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 수 있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13절에서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하나님을 위해 미쳤지만 너희들을 위해서는 정신이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전하는 것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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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나님께 미쳤는가? 그 이유를 14절에 밝혀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곧 바울 디모데 디도 같은 동역자들에게 강권한다는 것입니다. 강권한다는 헬라어 ‘쉬네코’(συνέχω)는 ‘사로잡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사랑’이란 바울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죠. 그 사랑을 생각하면 바울은 주님에게 미치지 않을 수 없죠. 다메섹에서 체포조를 동원해 가는데 왜 바울만 꼭 집어 뽑아내신 겁니까? 바울의 논리로는 설명할 길이 없죠. 그래서 에베소서 1장 5절을 통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고백을 한 것이죠. 그 사랑에 미쳤기에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가기 위해 가이사랴의 빌립 집사의 집에 머물렀는데, 대예언자 아가보가 예루살렘으로 가지말도록 말하죠. 하지만 바울은 사도행전 21장 13절을 통해 “나는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노라”하고 고백하며 가죠. 왜죠? 자신을 향한 주님의 사랑 때문에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것이죠. 그래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 대신 죽었은즉”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죠.
15절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이 본문이 무슨 뜻입니까? 이때까지 ‘그들 자신’ 곧 겉사람을 위해 살아 온 상태에서 이제는 ‘다시 살아나신 이’ 곧 부활하신 예수님을 위해, 더 친밀하게 말하면 부활하고 다시 살아날 우리의 속사람을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육신을 따라 안다는 것은 ‘인간적인 관점’으로 안다는 것이죠. 거짓 교사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도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리스도를 육신을 따라 알았다”고 고백을 하죠. 어떻게 메시아가 예루살렘 왕궁이 아닌 갈릴리 빈민촌에 살 수 있는가? 당시 율법의 관점으로는 나무에 달린 자가 저주받은 자였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십자가에 달릴 수 있는가? 그래서 예수님을 인간적인 관점으로 알고 판단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렸는지 안다는 것이죠. 나를 살려주고, 내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죠. 그것을 알고 나면 하나님께 미쳐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사도 바울이 이 글을 쓰면서, 바울을 압도했던 감동과 감격을 느낄 수 있죠. 이 글의 단락을 마지막으로 써 나가면서 ‘보라’,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 보라, 하면서 감탄사를 넣은 것이죠. 옛 피조물과 새로운 피조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예전에는 피조물이긴 하지만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있는 것이었죠.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 그 자리를 내어드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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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령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께 나의 자리를 내어드리며 사는 피조물의 은혜를 덧입는 것입니다. 겉사람 옛사람의 미련에서 벗어나 새 사람 새 피조물의 은혜를 덧입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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