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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5장 11절부터의 내용은 바울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도직의 본질적인 목적이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그리스도의 강권적인 사랑이 그와 같은 자신의 사도직을 부여해주셨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렇게 자신을 강권해 주시기에 자신은 하나님께 미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주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들여다볼 때 ‘보라’하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고백했죠. 새로운 피조물이란 자기 자신이 주인 노릇하던 이전의 삶과 달리 이제는 주님께 자기 자리를 내어드리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곧 주님께 미친 자의 삶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연장에서 오늘 18절이 이렇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지금까지 이야기 한 그리스도의 사랑,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 그걸 포함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 났다는 뜻입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가장 행복할까요? 구원도, 은혜도, 영원한 생명도, 하나님께로부터 났다고 고백하는 사람이죠. 어제 밤에 내 심장이 뛴 것도, 내 눈이 열렸다 닫힌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사람이죠. 매 순간 순간 하나님께 감사를 고백하며 사는 자가 행복한 사람이죠.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화목하게 하시고’, 이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해 주신 진정한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칙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다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을 ‘그리스도를 통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왜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 하는데 그리스도가 끼게 된 것입니까? 본래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은 불가하죠. 죄가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과 인간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기 때문에 불화라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죠. 그저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 혹은 인간 소외라는 말이 맞는 것이죠. 그런데 그 단절을 가져온 인간의 죄가 무엇입니까?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서려는 것이었죠. 선악과를 따 먹은 게 그것이죠. 그 반역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과 단절이 되었고, 그걸 회복하도록 하나님의 속죄양이 필요한 것이었죠. 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저지른 반역의 죄값을 대신 치러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게 하신 것이었죠. 그 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절 하반절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하고 고백하죠.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케 된 이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반역 속에 있는 사람들과 연결시키는 직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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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절에서 그걸 설명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하는 말씀은 18절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와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반역죄를 범한 인간들을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죠.
왜 우리가 세상에서 화목하기가 쉽지 않습니까? 뭔가 거래를 할 때 자기에게 유익한 것만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오늘 화목했다가도 내일 자신에게 불리하면 뒤집기도 하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로 인해 인간으로부터 반역을 당하셨는데, 그 반역 당하신 주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내어주심으로 우리와 화목케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바울이 알게 되었으니 어찌 미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는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다”, 이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통로, 곧 사도의 직분을 감당케 하셔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위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하는 것, 아래로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X의 삶을 구현하는 것이죠.
20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사신’이란 요즘 말로 하면 ‘대사’ 곧 ‘칙사’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사라고 밝힌 것입니다. 사신이 영어로 ‘엠바사다’(ambassadors)인데 헬라어로는 프레스뷔오(πρεσβεύω)입니다. 그런데 그 어원이 ‘노인’이란 뜻입니다. 옛날의 사신은 젊은 사람을 보낸 게 아니라 ‘노인’을 보냈죠. 그만큼 삶의 경륜과 연륜이 많은 사람, 자기 분신과도 같은 사람을 보내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신이 되기 위해서는 나이가 많이 들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죠.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에 예수님의 사신으로 살 때 대부분 20대나 30대였죠.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심령을 꿰뚫어보는 것이죠. 그렇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말씀의 사람이 돼야 하는 것이죠.
다시 20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분명한 인식을 갖고 권면한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은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허투루 말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래서 너희가 그리스도를 대신에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것은 그런 의미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죄의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통로가 되라는 것 말이죠. 바로 이 편지를 받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런 정체성을 갖도록 하라는 것 1차적으로 중생을 하라는 것이죠. 그리고 2차적으로 화목케 되는 삶 곧 성화의 삶을 살라는 당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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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절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죄’를 알지 못하신 이는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을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지 않고, 죄로 삼았다고 말하죠. 그것은 곧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화목이 무엇인지 알 수 있죠. ‘화목하라’는 게 ‘카탈라소’(καταλλάσσω)인데 본래 ‘교환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과 화목케 하셨다는 것은 ‘바꿨다’는 것입니다. 내 죄를 대신해서 당신의 의를 바꾸셨다는 것 말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온전한 의를 주시면서 인간의 죄와 바꿨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을 향해 미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의를 바꿔주신 그 화목을 깨닫게 해 주셨을 때, 어찌 자기 생을 바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6장 1절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하나님과 일하는 자’가 곧 하나님의 ‘사신’을 말하는 것이죠. 그런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도 헛되이 흘러버리기 때문이죠. 바울은 그래서 하나님과 화목케 된 자 곧 중생의 은혜를 덧입은 자는 그 다음 단계 곧 성화의 삶을 살도록 간청한 것입니다.
2절에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것은 이사야 49장 8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바울이 의와 죄를 바꿔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고,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간청하면서, 지금이 은혜를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단락을 끝내고 있습니다. 지금 이 말씀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전해졌다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의로 너희들의 죄를 교환해주셨다면, 그래서 너희들이 중생의 은혜를 덧입었다면 이제는 그 은혜를 헛되어 받은 자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과 화목하는 성화의 삶을 살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곧 새로운 피조물답게 살아가는 길이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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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령님께서는 무엇을 깨닫게 하십니까?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하나님께서 화목케 하는 직분을 주셨다는 것이죠. 1차적으로는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케 해 주신 것, 2차적으로는 세상의 죄에 빠져 있는 이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통로로 곧 사로로 부르셨다는 것이죠. 오늘도 그런 화목의 직분자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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