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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써 보내면서 1-11절까지 ‘위로’라는 단어를 10번 ‘환란’과 ‘고난’이란 단어를 8번 썼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심각한 분열 상태에서 대립한 고린도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것 자체가 하나님의 위로였기 때문이죠. 그만큼 주님께서는 성도들을 정금같이 빚으실 때 환란을 사용하시고, 그 환란을 통과한 자들을 통해 누군가를 위로의 통로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부터 본론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부분에서 바울은 자기 일정이 변경된 것을 언급합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모략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12절에서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여기서 ‘너희’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고, ‘세상’이란 고린도의 세상 한복판을 말하는 것이죠.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관계를 맺은 건 수도원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한복판이었죠. 모든 인간관계는 세상 속에서 세상의 법칙 곧 이기심의 법칙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이뤄집니다. 만약 바울이 그런 이기심의 토대로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관계맺었다면 자랑할 게 있었을까요? 목회자가 세상의 돈과 권력과 명예욕으로 성도들과 관계를 맺었다면 말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자랑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바울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관계를 맺었다고, 또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관계를 맺었다고 자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양심이 증언한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양심’이란 ‘수네이데시스’(συνείδησις)인데 ‘-과 함께’의 ‘쉰’(σύν)과 눈으로 ‘본다’는 ‘에이도’(εἴδω)의 합성어입니다. 양심이란 다 같이 함께 본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신실하심으로 또 세상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관계 맺었던 것을 너희들도 다 보고 잘 안다는 것입니다.
13절에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여기에서 ‘너희가 읽고 아는 것’이란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쓰기 전에 두 통의 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전서와 고린도전서죠. 그리고 지금 고린도후서를 쓰고 있는데, 이 편지는 다른 걸 쓴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이미 쓴 편지들을 되풀이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죠? 신앙훈련이란 같은 말씀의 내용을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똑같은 말씀을 내 삶에 체질화시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3절b-14절에서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나는 너희들에게 전한 복음을 완전히 알기를 바랐는데 실제로는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너희들은 유한한 존재요, 그것은 바울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재림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모든 것들을 온전하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재림의 날에 모든 걸 입체적으로 다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실수한 근본적인 이유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사도 바울을 부분적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완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죠. “저 바울이 고린도에 찾아온다고 하다가, 안 오는 것 봐봐, 다 가짜야.” 하는 것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수준 안에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거짓 사도들과 함께 모의한 사람들이었음에도 그들에 대한 사랑을 놓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장 7절에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그 날이 되면 다 드러나기 때문이죠.
본문 15절입니다.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때 1년 6개월을 체류하며 세운 교회였죠. 그래서 그 후에 마게도냐를 목적지로 삼고 그들을 한 번 둘러볼 계획이었습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전서의 내용이었죠.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전서 16장 5-7절을 쓰면서 마게도냐를 목적지가 아닌 경유지로 삼겠다고 바꿨습니다. 왜 그렇게 바꿨겠습니까? 고린도전서를 쓴 배경은 글로에 집 사람들이 3차 선교 중에 에베소에 있는 바울에게 찾아와 고린도교회가 분열이 심하다는 걸 보고했죠. 바울은 그래서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내가 너희들을 지나는 길에 볼 게 아니라 마게도냐에 들렀다가 너희들을 목적지로 삼아 몇 달 살겠다고 한 것이죠. 그런데 17절에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이 말은 “내가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이 변덕스러운 일이었겠느냐?”하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천박한 내 이기심을 따라서 계획한 것이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이 부분을 새번역에서 쉽게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아니오, 아니오’ 하려는 속셈이면서도, ‘예, 예’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겠습니까?” 이를테면 겉으로만 인심 쓰는 것처럼 ‘예, 예’하면서 뒤로는 그렇지 않으면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들릴 때 먼저 경유지로 삼아 마게도냐를 지나 고린도로 간다고 한 게 속셈으로는 아닌데, 너희들에게 듣기 좋게 ‘예, 예’ 했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결코 그렇게 한 게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
18절에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하나님은 미쁘시다, 이 단어는 ‘피스티스’로서 ‘신실하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내가 예 할 때 속으로 ‘아니오’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신실하게 ‘예’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두 번째 일정이 변경된 것은 나의 이기심을 위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한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19절입니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실루아노’는 ‘실라’의 로마식 이름입니다.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때 요한 마가 대신에 대동한 자가 실라였고,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나 합류하도록 했죠. 그래서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이른바 자신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예’만 하신 분이었고, 결국 자신들도 주님의 뜻을 좇아 예하면서 너희들에게 나아간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예’한 것처럼, 바울은 자신이 여행 일정을 바꾸었다 할지라도 주님을 본받아 주님께 예 하는 자세로 영광을 돌리려 했다는 것입니다.
21-22절에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셨을 뿐 아니라 매일매일 성령님을 통해 견고하게 세워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바울이 주장하는 게 뭡니까? 내가 일정을 변경한 그것이 실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조명하신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역사하시는 분이시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일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이죠. 그때 그리스도의 영광보다 나의 영광에 목숨을 걸면 스스로의 족쇄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저와 여러분들은 어떤 상황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스’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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