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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고린도후서

넘치는 사랑(고후1:23-2:2)

by 똑똑이채널 2024.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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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장1-11절이 도입부였습니다. 도입부는 고린도교회에 대한 축복 또 위로의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내용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의 본론 첫 머리부터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방문 일정을 변경했던 것에 대한 자기 반증을 담고 있습니다. 그만큼 여행 계획 변경과 관련해서 거짓 교사들로부터 모함을 심하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7절에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천박한 이기심을 좇아 속셈으로는 ‘노’하면서 겉으로 듣기 좋게 ‘예’했겠느냐? 하는 것이죠.

그래서 18절에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내가 계획을 변경했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예스하기 위함이었지, 노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21절에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주시고, 우리를 날마다 굳건하게 하시면서 그 인으로 성령님을 주셨는데, 내가 계획을 변경했던 그 모든 일들이 성령님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일생과 편지 | 권 성 권 - 교보문고

바울의 일생과 편지 | 바울은 누가 뭐래도 복음 전도자였다. 그가 복음 전도자로 활동한 것은 그의 곁에 위대한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나바, 디도, 실라, 디모데, 누가, 루디아, 야손, 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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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연장선상에서 오늘 23절에 말합니다.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사도 바울이 제일 먼저 계획은 마게도냐를 목적지로 삼고 고린도를 경유해서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죠. 그러다가 계획을 바꿔 먼저 마게도냐를 경유해 고린도를 목적지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에게 가지 않았다는 것은 ‘아끼기’ 때문이었다는 거죠. ‘아끼다’는 ‘페이도마이’는 현재분사형입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아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죠.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때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고, 장막을 만들어 팔면서 자비량으로 교회를 세웠으니, 어찌 아끼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아꼈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첫째로 경유지로 삼지 않고 목적지로 삼고 여러 달 동안 함께 체류코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무진장 긴 것 같지만 지극히 짧고 제한돼 있습니다. 남아 있는 시간들도 그렇죠. 바울은 그 짧은 인생 중에 또 다시 몇 달을 쪼개서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함께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아낀 것이죠. 두 번째는 고린도전서 4장 21절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글로에 집안 사람들로부터 고린도교회에 대한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의 두 마음이 나타나 있죠. 바울이 자기 생애를 바치면서 세운 고린도교회가 심각한 도덕적 타락 속에 빠져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5장 1절에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교인 중에 아버지의 아내와 분륜을 저지른 사람이 있었다는 거죠. 아버지의 아내란 아버지의 첩입니다. 그러나 첩이든 어떻든 아들에게는 어머니뻘이죠. 그런데 그 어머니뻘 여자와 분륜을 저지르는 교인이 교회에 있었다고 하니, 바울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래서 매를 들고 갈까, 아니면 온유한 마음으로 갈까, 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처음 먹은 생각대로 마게도냐로 가서 고린도를 경유지로 삼고자 했다면 그냥 질타만 하다가 오지 않았겠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숨을 고르기 위해서, 늦게 마게도냐로 가서 고린도로 가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바울은 그들을 아꼈던 것입니다.

 

 

바울의 일생과 편지 | 권 성 권 -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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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23절을 다시 보면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여기에서 바울은 ‘내가’ ‘내가’하는 말을 강조합니다. 서론 부분에서는 모두 ‘우리’라고 썼는데, 본론부에서 고린도교회 방문계획을 바꾼 것이 너희들을 위함이었다고 하면서 ‘나’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왜죠?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증인으로 삼고”, 내가 하는 이 말이 거짓말이면 하나님께서 죽여도 좋다는 뜻입니다. 그 정도로 내가 너희를 아끼기 위해서 당장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목숨을 걸면서까지 자기 변증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개인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했을까요? 만약 개인적인 명예 회복을 위함이었다면 바울은 입을 다물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자기 진실성을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변증하는 이유는 자신의 진실성이 흔들릴 경우에 자기가 전한 복음의 토대 위에 세워진 고린도교회의 신실성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만큼 교회의 신실성을 위해 자기 목숨을 걸고, 주님의 이름으로 변증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모함 받고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개인적인 문제로 끝난다면 입을 다문 게 나을 수 있죠. 그런데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는 것이 교회의 신실성에 대한 오해로 확대된다면 우리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나를 변증하고 교회를 변증해야 하는 것이죠. 바울도 그만큼 교회를 사랑했죠.

 

24절입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새번역이 이렇게 번역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믿음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기쁨을 누리게 하려고 함께 일하는 일꾼일 따름입니다.” 부모 자식 간이든, 부부지간이든, 형제지간이든, 성도와 성도지간이든, 상관없이 그리스도인에게 사람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원칙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어떤 권면을 하든, 그 목적이 지배나 주관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알아가는 기쁨을 더 깊이 알아가도록 돕는 데 있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지배하려고 하고, 남편이 아내를 지배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러나 사람을 지배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더욱 우리를 지배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도록 서로 돕는 관계입니다. 그것이 곧 동역의 관계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근거가 24절 하반절에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이 말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믿음이 완전무결하다는 게 아니라 아니라, 그들의 믿음의 토대가 완전무결하다는 뜻입니다. 그 믿음의 토대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죠. 바울은 복음 이외의 것은 전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너희들의 토대가 바른 복음인 이상, 내가 너희들을 돕기만 하면 언제든 살아 있는 복음의 말씀 안에서 바르게 세워질 것을 믿은 것입니다.

2장 1절입니다.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여기에서 ‘근심’이란 ‘슬픔’, ‘비탄’, ‘눈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내가 슬픔이나 비탄이나 눈물 속에서 찾아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언제요?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때 고린도교회를 세울 때 비탄에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제 비탄 속에서 그들을 찾아갔다는 것입니까? 글로에의 집 사람들을 통해 고린도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죠. 그래서 먼저 자신이 방문했고, 그래도 듣지 않아 돌아왔을 때, 그들이 문제점의 답변을 원하는 편지를 섰을 때, 바울이 편지를 보냈죠. 그런데도 해결이 되지 않죠.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를 보내고 난 후에 곧장 편지를 썼죠. 그것이 고린도전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또 다시 눈물의 방문, 슬픔의 방문을 합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든지 알지 못하지만 사도 바울은 곧장 돌아오죠. 그렇듯이 이 모든 정황을 볼 때 사도 바울이 직접 찾아갔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바울의 권면을 받지 않아서 되돌아왔다고 이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2절에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공동번역은 이렇습니다. “나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나를 기쁘게 해줄 사람에게 슬픔을 안겨주는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 나의 본래 의도는 여러분들에게 슬픔이 아닌 기쁨을 주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무얼 말하는 것입니까? 과거에 내가 쓴 편지는 슬픔이 아니라 기쁨을 주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일생과 편지 | 권 성 권 - 교보문고

바울의 일생과 편지 | 바울은 누가 뭐래도 복음 전도자였다. 그가 복음 전도자로 활동한 것은 그의 곁에 위대한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나바, 디도, 실라, 디모데, 누가, 루디아, 야손, 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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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눈물의 편지를 써 보낸 목적이 개인의 명예회복을 위함이 아니라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성도들이 믿음을 회복하고, 영적인 기쁨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죠. 우리의 삶의 초점도 하나님 나라를 사랑하는 것, 그 누군가 나의 말로 인해 믿음을 회복하고 영적인 기쁨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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