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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SundaySermon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마2:1-6)_2024년 12월 8일 대림절둘째주일설교

by 똑똑이채널 2024.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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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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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유머)정치인이 리무진을 타고 가다가 한 남자가 풀을 먹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는 운전사에게 차를 세우게 한 다음 그에게 물었습니다.

“왜 풀을 드시죠?”

남자는 “제가 너무 가난해서 음식을 살 돈이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정치인은 “불쌍한 양반, 우리 집으로 가시죠”라고 말했습니다.

 

차에 올라탄 뒤 가난한 남자는 말했습니다.

“저를 선생님 댁으로 데려가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정말 친절하시네요.”

그러자 정치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집은 잔디가 30㎝ 정도로 자랐거든요.”

 

(깨달음)누구를 보며 살아가는가, 누구를 좇아가며 살아가는 중요한 인생의 문제입니다.

채식을 먹고 사는 이가 정치인이 주는 육식을 먹고자 좇아간다면 그 길은 패망의 길 아니겠습니까?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14:12)

 

(예화)나그네 두 사람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야 할 길은 멀고도 아득했습니다.

목적지까지 가려면 높은 산과 바다와 골짜기도 넘어야 했습니다.

 

한 나그네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갈 길은 아직도 멉니다. 그러나 힘 내십시오. 하늘을 바라보면서 가노라면 목적지에 닿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다른 나그네가 말했습니다.

“길은 땅에 있습니다. 땅을 보면서 걸어가죠. 하늘을 본다고 길이 보입니까?”

 

한 나그네가 대답했습니다.

“하늘을 보면 가야 할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을 보고 가셔야 합니다.”

그러자 다른 나그네가 대답합니다.

“말도 안 되오. 땅을 봐야 길을 찾을 수 있지요. 안되겠소. 당신은 하늘만 보시요, 나는 땅을 보면서 가겠소.”

 

이렇게 두 나그네는 서로 자기 의견만 고집하다가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하였습니다.

한 나그네는 부지런히 하늘을 보며 걸었습니다.

하늘의 해와 달이 길을 비추어 주었고, 별들이 반짝이며 가는 길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때로는 눈비가 올 것을 알려 주기도 하고, 바람이 부는 방향도 알려 주었습니다.

나그네는 하늘의 안내를 따라 열심히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반면 다른 나그네는 땅만 보며 걸었습니다.

길이 없는 숲 속을 헤매고 골짜기를 건너 열심히 걸었지만 캄캄한 어둠뿐이었습니다.

몇 날을 걸어도 산도 하나 넘지 못한 채 오던 길만 뱅뱅 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입니까?

내가 인생을 걸어가는데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가, 아니면 땅의 길만 좇아 사는가, 그 차이를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5:32-33)

 

(적용)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길을 좇아 살 때 그 인생의 평안과 행복의 복을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의 것만 좇아 좌로우로 치우치면 그 실은 필명 사망의 길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진리와 생명의 길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고 그 분의 말씀을 좇아 살 때 인생의 선한 역사를 이루는 복을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인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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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헤롯 왕’ 곧 ‘헤롯 대왕’은 ‘헤롯 1세’로 불리는 왕입니다.

그는 B.C.73년경에 태어나 B.C.40-37년경에 로마제국의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의 왕으로 임명받았습니다.

그 후 B.C.4년경까지 유다를 통치한 왕입니다.

 

그는 에돔의 후손입니다.

유대의 남쪽 에돔의 후손으로 안티파테르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정통 유대인이 아니었음에도 전쟁에 여러 공적을 세워 26살에 갈릴리의 총독이 되었습니다.

33살에 유대인의 왕이 되었고 70살까지 유대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태어나던 해나 그 다음 해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대의 왕으로서 오래 살아남기 위해 여러 가지 것을 강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도시를 건설했고 또 농업을 장려했고 해상 무역을 발전시켰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치적은 예루살렘 성전을 증개축한 일이었습니다.

무려 46년간 성전을 증개축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권력에 대해 집착이 너무나도 강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을 장남을 의심해서 죽였습니다.

다른 두 아들도 그가 죽기 4일 전에 살해해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모와 자기 부인 마리암네까지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까지 나돌 정도여습니다.

“헤롯의 아들이 되기보다는 헤롯의 돼지가 되는 것이 더 안전하다”하고 말이죠.

 

(깨달음)어떻습니까?

헤롯은 그 정도로 자기 권력에 집착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왕위를 찬탈할 것 같은 낌새라도 보이면 즉각적으로 처단해버린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주변에 사람들이 얼마나 피를 말렸을지 알 수 있습니다.

 

권력을 부여한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권력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권력과 권한을 부여하신 것은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하고 섬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지 않는 자기 중심적인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고 그 끝은 불행만 남는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적용)혹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력이나 권한을 맡길 때 늘 겸손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더욱이 그 권력이나 권한을 섬김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복된 일이요 오래도록 찬사를 받는 일인 줄 믿습니다.

작금의 대통령 계엄령선포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음성이 그것인 줄 믿습니다.

 

(본문)오늘 본문 정치권력에 눈먼 헤롯이 자기 왕위에 집착하고 있을 때 찾아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원해)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헤롯 대왕을 찾아온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이를 만나고자 함이었습니다.

우리말 ‘동방’은 헬라어로 ‘아나톨레’(ἀνατολή)인데 ‘떠오르다’는 말로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에게 동쪽이란 보통 페르시아나 바빌로니아 지역을 말합니다.

그 지역에서 별을 보고 연구하던 이들이 동방의 박사들입니다.

 

우리말 ‘박사’로 번역된 헬라어 ‘마고스’(μάγος)는 ‘마술사’나 ‘점술가’를 뜻하는 말입니다.

물론 ‘마고스’라는 말이 ‘천문학자’를 칭하기도 하고 ‘별점을 치는 사제 계급’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마고스’는 동방의 현자로 불릴 정도로 지혜로운 사람으로 추앙받았습니다.

그러니 동방의 박사들이 헤롯 대왕을 찾아왔을 때 그들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던 것입니다.

 

(깨달음)본문 2절을 보면 동방의 현자들은 그 별을 보고 동방에서 계속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동방이라 하면 바벨론이든지 더 멀게는 페르시아로 추정을 합니다.

그 거리가 얼마나 멀겠습니까?

페르시아에서 예루살렘까지는 3,200km이고 바벨론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는 800km입니다.

구약시대에 바벨론에 포로 끌려간 이들 중에 2차 포로귀환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때 4개월이 걸렸습니다(스7:9).

 

포로귀환자들이 걸어서 4개월 가량 걸렸다면 동방의 박사들이 걸어서 왔다면 1년 넘게 걸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방의 현자들이 낙타를 타고 왔다면 훨씬 더 짧았겠죠.

바벨론에서 왔다면 2~3개월, 페르시아에서 왔다면 6~8개월 정도 걸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게 있습니다.

그들이 동방에서부터 1년 가까이 혹은 8개월 더 짧게는 3개월 걸려 도착했을 때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계속 그 별을 보고 길을 나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유대 땅에 도착했을 때는 그 별을 보고 간 게 아니라 헤롯의 궁으로 갔다는 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별의 관점을 계속 따라갔다면 베들레헴으로 계속 갔겠죠.

하지만 유대 땅에 왔을 때 인간적인 관점에 치우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새로운 왕이라면 헤롯의 황실에서 태어날 것으로 내다본 것 말이죠.

만약 그들이 계속 별의 관점을 따라갔다면 결코 헤롯의 황실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적용)이 사건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길은 인간의 길과 다르다는 점 아닙니까?

인간의 선입견에 치우치게 되면 하나님의 그 크신 뜻을 놓치고 만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별을 보고 천문을 연구하는 동방의 현자라 할지라도 그들이 인간적인 관점에 치우치게 되면 하나님의 그 크신 뜻을 놓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지 않으면 나의 경험이나 생각이 결정적인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것 말이죠.

그만큼 우리의 경험이나 생각이나 나의 능력을 의지하기보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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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이것은 사도 바울의 모습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자기 욕망의 길만 좇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 치우친 채 출세지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을 때 그가 증인으로 서 있던 것도, 그리고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해 감옥으로 연행하는 데 앞잡이가 된 것도 그런 일환이었죠.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 다메섹 길 위에서 빛으로 찾아오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때 눈뜬 장님으로 다메섹의 직가에서 3일을 지낸 후에 아나니아의 안수로 눈을 떴을 때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벗거졌죠.

무엇이 벗겨진 것입니까?

지극히 인간적인 자기 관점의 비늘이 완전히 벗겨진 것 아닙니까?

여태껏 자기 신념, 자기 관점, 이 세상이 것만 바라본 세상의 관점들이 한 순간 다 벗겨진 것이었죠.

그때부터 그는 진리와 생명을 향한 길목으로 인생의 궤도를 수정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인간의 길과 다른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원성)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지금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55:8-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16:9)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16:33)

 

(적용)그렇기에 아무리 내가 경험이 많고 내 식견이 출중해도 늘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 길목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예수님이라면 과연 어떻게 하셨을지, 주님께 묻고 구하는 것 말이죠.

설령 그렇게 인생길을 살아왔더라도 막판에 자기 생각에 치우친 채 어긋난 길을 걷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본문의 동방 박사들도 그 별을 보고 끝까지 잘 좇아오는가 싶었지만 막판에 어긋난 길로 치우친 것 아닙니까?

막판까지 그 별만 보고 좇아갔다면 헤롯의 궁궐이 아니라 베들레헴으로 직행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10km나 걸리는 베들레헴으로 가야 하는 수고와 번거로움을 겪어야 했던 것이죠.

 

그만큼 한 해 인생을 주님과 함께 살아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혹여라도 별을 바라보고 쫓아오는 동방의 박사들처럼 12월달까지 믿음으로 인내하며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왔어도 정말 주님께 칭찬받을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막판에 인간적인 판단에 치우친 채 어긋난 결정을 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마지막까지 겸손한 한 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탄생을 기리고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대림절 두 번째 주일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인간적인 생각이나 판단보다도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좇아 사는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네가 비록 채식을 먹고 산다할지라도 정치인이 주려는 고기를 먹고자 그를 따라가는 것은 패망의 길이지 않겠느냐?”

땅의 길만 좇는 자는 바르게 보이나 필경 사망의 길이요 하늘의 길을 좇는 자는 힘들어도 그 길이 생명의 길이지 않겠느냐?”

동방의 별을 보고 연구하던 그 현자들도 유대 땅까지 별을 보고 잘 좇아왔지만 막판에 인간적인 땅의 관점에 치우치고 말지 않았더냐?”

동방의 박사들도 인간적인 땅의 관점이 아니라 하늘의 관점을 끝까지 좇았다면 헛수고하는 고생을 하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이 세상 관점만 가득 찬 바울이 주님을 만났을 때 비로소 세상의 비늘이 벗겨지고 영원한 관점을 좇아 살게 된 것 아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지금 네가 걷는 이 길이 땅의 길을 좇는 것인지 하늘 영생의 길을 좇는 것인지 너 스스로 분별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마른 떡 한 조각으로도 행복할 수 있지만 육선을 바라보며 정치인을 따를 때 그 길이 고통의 길이라는 걸 너는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너에게 하나님께서 권세와 권한을 맡겼을 때 그것을 섬김의 도구로 사아야 너와 네 주변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겠느냐?”

너는 동방의 박사들처럼 인간적인 관점에 치우치거나 좌로우로 치우치지 말고 오직 별을 좇는 관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너에게 복된 길을 열어주지 않겠느냐?”

네가 걷는 길이 굽어 돌고 가슴이 아파도 하늘의 별을 좇듯 진리와 생명을 좇는다면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는 분이심을 너의 삶에 목격하게 해 주지 않으시겠냐?”

 

 

야긴과 보아스 | 권성권 - 교보문고

야긴과 보아스 |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 이 책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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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내가 걷는 이 길이 혹 굽어도는 수가 있어도 내 심장이 울렁이고 가슴 아파도

내 마음속으로 여전히 기뻐하는 까닭은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심일세

내가 세운 계획이 혹 빗나갈지 모르며 나의 희망 덧없이 스러질 수 있지만

나 여전히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까닭은 주께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잘 아심일세

어두운 밤 어둠이 깊어 날이 다시는 밝지 않을 것 같아 보여도

내 신앙 부여잡고 주님께 모든 것 맡기리니 하나님을 내가 믿음일세

지금은 내가 볼 수 없는 것 너무 많아서 너무 멀리 가물가물 어른거려도

운명이여 오라 나 두려워 아니하리 만사를 주님께 내어 맡기리

차츰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 지으신 빛이 뚜렷이 보이리라

가는 길이 온통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차츰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 지으신 빛이 뚜렷이 보이리라

가는 길이 온통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성화)우리가 알고 있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자 복의 근원이 된 사람입니다.

그는 아버지 데라를 좇아 갈대아 우르라는 우상의 도시를 나와 하란 땅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데라는 하란 땅의 화려함과 번영을 보고 그 도시에 눌러앉아버렸고 급기야 그곳에 최후를 맞이했죠.

만약 데라가 가나안 땅으로 나아갔다면 그는 새로운 인생의 길을 맞이했을지도 모릅니다.

오직 그 눈에 보이는 세상의 화려함 세상의 번영을 좇는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 치우친 채 그곳에 눌러앉은 것이었죠.

 

그렇게 아버지 데라가 하란에서 죽자 아브라함은 이제 기댈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땅에서 자식을 낳은 것도 아니요 여전히 실패작 인생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찾아와 본토 친척 아비 집 다시 말해 네가 기대고 의지하는 인간적인 관점을 내려놓고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 땅의 길이 아니라 하늘의 길을 좇아 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미지의 세계 곧 가나안 땅으로 나아간 것이었죠.

하지만 가나안 땅으로 나아갔어도 모든 게 완벽하게 준비된 게 아니었습니다.

세겜으로 갔다가 벧엘로 갔다가 헤브론으로 갔다가 그랄로 갔다가 다시금 브엘세바로 와서 헤브론에 정착한 것이었죠.

그야말로 좌충우돌이었고 그의 인생도 얼마간은 굽어도는 길 같고 어두운 길을 걷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땅의 관점이 아니라 하늘의 관점, 인간적인 관점이 아니라 말씀의 관점을 좇아 살 때 하나님께서 그 인생의 종착지에서 복의 근원이 되는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점입니다.

 

(깨달음)그런 아브라함을 바라보고 좇아다닌 롯은 어떻습니까?

솔직히 롯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간 게 아니라 아브라함을 바라보고 따라나선 것이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갈 때 세겜으로 이동할 때 벧엘로 갈 때 헤브론으로 갈 때 그랄로 갈 때 그리고 브엘세바를 거쳐 헤브론에 올라갈 때 그때까지도 오직 인간적인 관점만 바라보고 좇아간 것이었습니다.

마치 풀을 먹던 그 사람이 고기가 많을 것이라는 정치인의 집을 좇아 리무진을 타고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인간적인 관점에 치우친 롯이 훗날 선택한 곳이 어디였습니까?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가 소유가 풍부할 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죠.

그때 롯은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해 좇아갔고 아브라함은 헤브론 마므레 수풀을 선택해 나아갔습니다.

둘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헤브론 마므레 수풀은 그야말로 황무지였지만 오직 하나님과 뜨겁게 교제하는 자리요 하늘의 별처럼 말씀을 좇아 사는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 땅은 하란 땅처럼 화려함과 번영과 환락의 도시였습니다.

그야말로 인간적인 관점에 치우친 롯이 그 길을 좇아가다가 이방 왕에게 붙잡히고 포로신세로 전락한 일이 있습니다.

 

(원성)그렇기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이 바로 그것 아닙니까?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14:12)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9:11)

 

(깨달음)그만큼 눈에 보이는 이 땅의 것들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으로 해결하면 모든 게 만사 오케이 될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제일 빠른 경주자가 먼저 도착하고 용사가 승리할 것 같고 모든 능력자가 모든 것을 취할 것 같지만 그 시기와 기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 자신의 명철이나 지혜나 인간적인 관점의 길, 땅의 길을 내려놓고 별의 길 곧 하나님의 말씀의 길을 좇아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길이요 그것이 아브라함처럼 복된 인생의 은총을 누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실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 인생에 굽어도는 것이 있고 안개가 보여도 아브라함처럼 별을 보고 말씀을 좇아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어떤 경우에도 롯처럼 사람을 따라가거나 인간적이 관점에 치우친 채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번영만을 좇지 않게 해 주세요.”

어떤 경우에도 아브라함처럼 헤브론의 마므레 수풀에서 하나님과 뜨겁게 교제하는 믿음의 자리를 고수하게 해 주세요.”

아무리 힘이 있고 능력이 출중하고 유능한 자라고 먼저 도착하고 재물을 취하는 게 아니라 모든 때와 시기는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잊지 않게 해주세요.”

오늘도 그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늘의 별을 바라보듯 하나님의 말씀만을 좇아 사는 인생길을 택하여 살기를 원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처럼 바울처럼 인생의 새 길이 열리게 하시고 복된 길을 열어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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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오늘도 하룻길 나그네 길을 나 혼자 가야 해

멀고도 험한 길 나그네 길을 나 혼자 가야 해

나 혼자 가야 해 아 아 아

갈래갈래 갈림길 길이라도 내게 주신 주의 길 따라가려오

갈래갈래 갈림길 길이라도 내게 주신 주의 길 따라가려오

내 집은 갈릴리 해변 푸른 풀밭 쉬어갈 수 있는데

내 사명 다하기까지 갈 수 없네 그리운 내 본향 집

그리운 내 본향 집 아 아 아

갈래갈래 갈림길 길이라도 내게 주신 주의 길 따라가려오

갈래갈래 갈림길 길이라도 내게 주신 주의 길 따라가려오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동방의 박사들이 아무리 현자라 할지라도 인간적인 관점에 치우친 채 헤롯을 좇아가고 말았습니다.

믿음의 길을 걷는 우리도 이 세상의 인간적인 관점에 치우치면 그렇게 사람을 좇아 어리석인 길에 들어서고 맙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아브라함처럼 굽어도는 것 같고 안개가 끼는 것 같아도 하늘의 별을 보듯 말씀을 좇아 가는 길을 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성공하는 것 같고 승승장구하는 것 같지만 그 길은 필경 사망의 길입니다.

하지만 힘들고 어려워도 하늘의 별을 보듯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생명과 진리의 길을 얻는 자는 아브라함처럼 복된 인생을 맞이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인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오직 인간적인 관점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관점을 좇아 사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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