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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논지)‘중동의 화약고’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중동의 화약고’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언제라도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지역, 그 전쟁이 자칫 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1948년 팔레스타인의 영토에 독립국가를 선언하면서 존립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팔레스타인 주민들과 이스라엘 사이의 갈등과 분쟁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팔레스타인은 요르단 강 서쪽의 서안 지구와 해변가에 위치한 가자 지구 16개의 주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 중에 베들레헴은 팔레스타인 서안 지구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베들레헴은 유대인 마을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자치기구에 속한 팔레스타인 마을인 셈입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분리장벽과 검문소를 반드시 통과해아만 하는 상태입니다.
혹시라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분쟁이 격화되면 베들레헴을 방문할 수 없게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베들레헴은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거대한 성탄 트리 장식과 화려한 성탄행사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수 많은 관광객과 순례자들이 베들레헴을 가득 채웁니다.
하지만 작년에도 그랬지만 올해도 거대한 성탄 트리 장식도 화려한 성탄행사도 볼 수가 없겠죠.
지금도 이스라엘과 팔레스인은 물론이고 이스라엘과 이라크 사이에 전쟁중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곳 베들레헴에는 예수님의 탄생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 건물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521년에 완공한 것입니다.
바로 그 안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동굴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당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교회 건물에 비해 너무나도 작습니다.
반드시 몸을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는 입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문을 ‘겸손의 문’이라고 부릅니다.
(깨달음)왜 사람들이 그 문을 향해 ‘겸손의 문’이라고 칭했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만 왕의 왕이심에 불구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말 구유통에 오셨기 때문이죠.
영원한 생명이신 그 주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누구든지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고개를 숙여야만 그 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적용)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죠.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자기 힘과 권력과 능력과 지식과 가진 것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 모두가 때가 되면 죽고 죽음 이후에 영원한 심판을 받을 길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영원한 생명이요 영원한 상급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영원한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모두가 무릎 꿇고 경배해야만 진정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죠.
그 분이 이 땅에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듯이 그 분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가 겸손함을 갖춰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분의 구원은 숫자가 많고 적음이 아니라 자기 연약함을 아는 자들을 통해 구원하셔서 새 역사를 써가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대림절 첫째주일인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예수님은 헤롯 왕이 통치할 때 태어났습니다.
헤롯 대왕은 헤롯 왕가의 창시자이자 예수님이 탄생할 때 유대인들을 다스린 왕입니다(마2:1-18).
그는 돈을 주고 25살에 갈릴리 총독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이두메와 사마리아와 갈릴리를 정복해 B.C.37년 27살의 나이에 로마 황제로부터 유대의 왕으로 군림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많은 돈을 로마 황제에게 바치면서 또 유대인들의 왕으로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매우 현명하고 강인했지만 한편으로 너무나도 잔인한 인물입니다.
동방박사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실 이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2살 밑의 아이들을 모두 살해시킨 인물입니다.
그는 10명의 아내를 두었고 많은 자식들을 거느린 통치자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을 다스리는 데 가장 취약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가 유대인이 아니라 이두매 출신이라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이두매란 에돔을 가리키는 것이요 에돔이란 그 선친이 바로 에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야곱과 에서가 형제지간이었지만 이스라엘이 광야를 행진할 때 에돔은 그 그 길목을 터주지 않는 악한 족속이었습니다.
바로 그 사실을 알고 있던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야 정치생명을 오래 끌고 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시한 게 있다면 유대인들이 우상시하는 성전을 증개축하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성전을 가장 중요시했고 가장 우월시며 산다는 것을 헤롯이 알고 있었습니다.
헤롯 대왕이 그런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고자 성전 증개축을 무려 46년간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평생토록 정치권력을 쥐려고 했던 그는 B.C.4년 악질에 걸려 70세로 생을 마감을 하게 됩니다.
바로 그의 통치 말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구원자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두 살 밑의 아이들을 다 살해하도록 한 포악한 왕의 통치시기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것이죠.
어둠이 짙게 깔리면 깔릴수록 새벽이 밝아오는 것과 같은 이치였습니다.
고난의 터널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 끝날의 소망이 더 밝게 드러나는 것처럼 말이죠.
(깨달음)그렇기에 예수님이 태어나던 그 시기의 세상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구원자로 태어나던 그 시기의 세상은 결코 평화로운 에덴동산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권력투쟁이 심하고 정치적인 정적들을 죽고 죽이는 살벌한 세상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공중권세 잡은 이들과 전쟁을 벌이는 영적인 전쟁터와 같은 세상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세상의 한복판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은 겉으로는 평화롭게 보여도 그 내면 속에서는 온갖 시기와 질투와 정적들을 죽고 죽이는 살벌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세력과 영적으로 깨어있는 자들이 영적 전쟁을 벌이는 영적인 전쟁터와 같은 곳입니다.
그저 예수님을 믿고 복 받는 것을 목표로 삼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진정한 천국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기 위해서는 영적인 싸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적용)그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은 영적인 분별력을 갖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좇아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 세상의 가치에 휩쓸리지 않고 영원한 가치 곧 하나님나라 천국의 가치를 좇아 순종하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급을 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헤롯 대왕이 통치할 때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어느 곳에 오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본문 1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원해)예수님께서는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태어나셨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이란 히브리어로 ‘베이트-레헴’(בֵּית לֶחֶם)으로 ‘떡 집’(house of bread)입니다.
실제로 베들레헴에 떡 곧 빵이 많이 나는 지역이라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겠습니까?
그곳에 곡물이 풍성하고 빵을 많이 만들어내는 지역라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구약시대부터 각광을 받는 지역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누구 하나 관심을 갖지 않는 그야말로 시골 촌동네에 불과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곳이 ‘떡집’인 이유는 예수님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성)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 51절을 통해 이렇게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깨달음)예수님 당신이 살아 있는 생명의 떡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으면 영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떡이란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당신의 살과 피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대속을 믿는 자들에게는 지금도 영생하는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베들레헴이 주는 영적인 의미의 떡 곧 영원한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의미입니다.
(전개)그런데 그곳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남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산동네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만 해도 그랬지만 그 이전에도 실은 누구하나 주목하지 않는 소외된 땅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사울 왕이 천하를 호령할 때만 해도 그때도 베들레헴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아들 다윗을 왕으로 세우고자 그곳 베들레헴 촌동네에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 촌동네에 사는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다음 왕을 삼도록 말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이후에 B.C.700년 경의 미가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낼 것을 약속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5:2)
(깨달음)미가 선지자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700년 전에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그 베들레헴을 향해 뭐라고 선포한 것입니까?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하고 선포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너는 수천 가운데 하찮을지라도”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다윗이 세운 예루살렘에 쏠려 있어서 너에게는 눈길 하나 주지 않는 그런 베들레헴이라 할지라도, 하는 뜻입니다.
바로 그런 곳이라 할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너에게서 나올 것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다는 말씀은 그 통치자가 영원부터 계신 분이다, 하는 뜻입니다.
이 땅의 영원한 통치자요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오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라고 빌립보서 2장 6절에 말씀하고 있는 게 그것입니다.
그 상고에 그 영원에 계신 분이 베들레헴 그 땅에 태어날 것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원성)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선택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7:7)
(깨달음)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세상 만민 가운데 선택하신 것은 그들의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들레헴 땅을 선택하신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실때도 그들의 수가 천천 가운데서 하찮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하찮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구원받은 민족으로 삼기 위해 세계 모든 민족 가운데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적용)그렇기에 영원한 생명의 떡이요 영생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베들레헴에 태어나게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람들은 예루살렘이나 헤롯 대왕이 머물고 있는 왕실에 눈에 쏠렸을지 모릅니다.
실제로 유대인의 왕이 태어날 것이라고 별을 연구하던 동방 박사들도 헤롯 대왕의 왕실을 찾아간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들도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다면 헤롯 대왕의 후계자로서 왕실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단정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계획하신 영원한 생명의 떡이자 영원한 생명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이나 헤롯이 왕실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베들레헴이 촌구석이요 그들의 수가 미미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원한 메시아는 바로 그 땅에서 태어나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선택 기준은 사람의 수가 많고 화려하고 똑똑함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수가 적고 초라하고 연약해도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작고 미련한 자들을 통해 세상의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1장 26-29절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대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깨달음)자기 육체로 자랑하는 자는 결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지혜나 자기 힘이나 자기 능력을 내세우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에 작고 연약하고 미련하게 보이는 자들을 주님께서 택하셔서 세상의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힘과 능력을 내세운 채 영원한 생명의 주관자이신 주님을 거부하는 자들은 결코 영생을 누릴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 땅의 메시아인 예수님을 베들레헴 땅에 태어나게 하신 의미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내가 어떤 땅에 살고 있는가, 내가 어느 곳에 살아가고 있는가,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 내가 어떤 것을 누리고 있는가, 그것도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내가 어떤 곳에서 어떤 위치에 있든지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나의 심령 상태 아니겠습니까?
내가 진정한 구원자요 영원한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실만한 겸손한 심령의 상태인가, 바로 그것이 중요한 것이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대림절 첫주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 영원한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을 모시는 겸손한 심령의 은혜를 부어주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팔레스타인의 베들레헴 땅에 세워진 예수님의 탄생교회 입구는 작고 좁은 문이지 않더냐?”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이 말구유통에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고 그 분을 만나고자 한다면 겸손한 심령이 돼야 함을 일깨워주는 것 아니겠느냐?”
“이두매 출신의 헤롯이 통치하던 그때에 예수님께서 구원자로 오신 것도 영적인 전쟁의 한복판에 오신 것 아니더냐?”
“지금도 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 공중권세 잡은 영적 세력과 전쟁을 치르는 한복판임을 네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주전 700년경 미가 선지를 통해 베들레헴 땅에 영원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알린 이유도 그것이지 않더냐?”
“이 세상의 많고 적음이나 능력의 유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든지 어떤 위치에 있든지 그 심령 상태가 겸손한 자들에게 주님은 구원자로 찾아오신다는 것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주님의 성탄을 맞이하는 대림절 첫째주일에 너의 심령 상태가 자기 자랑으로 자기 의로 가득차 있지는 않는지 점검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주님께서 말구유통의 자리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촌구석 베들레헴에 오셨는데 너는 주님을 모실 만한 마음 상태가 되어있는지 말이다.”
“세상에 연약함과 무능함을 인정하는 겸손한 자들을 택하셔서 세상에 자기 자랑으로 뭉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게 주님의 구원방식이니 말이다.”
“주님께서는 네가 어떤 곳에 어떤 위치 속에 사는지를 보시는 게 아니라 너 스스로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며 사는 가난하고 겸손한 심령을 기뻐하시는 분이니 말이다.”
“지금도 겸손하게 주님을 붙들고 의지하는 자들에게 베들레헴의 산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겠느냐?”
(찬양)나 약해 있을 때에도 주님은 함께 계시고
나 소망 잃을 때에도 주님은 내게 오시네
나 시험당할 때에도 주님이 지켜주시고
나 실망당할 때에도 주님이 위로하시네
주님만이 내 힘이시며 오 주님만이 날 도우시네
오 나의 주님 내 아버지여 오 나의 주님 내 사랑이여
(예화)전신전보의 발명가 모스는 유명해지고 나서 사람들로부터 그런 찬사를 들었습니다.
“교수님. 교수님은 큰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교수님의 이름은 우리의 자랑이 되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모스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사실 전 이런 찬사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전신전보를 발명한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우수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누군가에게 그 일을 시켜야만 했고 그 대상이 바로저였던 까닭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신전보는 결단코 제 작품이 아닙니다”
(예화2)1808년 유명한 작곡가 하이든이 작곡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가 연주되었습니다.
그 연주장에는 하이든도 참석을 했습니다.
연주가 모두 끝난 후에 사회자는 그 곡을 작곡한 하이든 선생이 이 자리에 참석했다고 소개했습니다.
모든 청중은 일제히 자리에 일어나 하이든을 향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때 하이든은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작품은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깨달음)전신전보를 발명한 모스나 천지창조 곡을 작곡한 하이든은 정말로 겸손한 사람 아닙니까?
자신이 발명한 것과 자신이 자곡한 그 원천이 모두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한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요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겸손한 사람입니다.
(원성)“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57:15)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5:5)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4:6)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언제 어느때나 겸손한 자로 살게 해 주세요.”
“전신전보를 발명한 모스도 천지창조 곡을 완성한 하이든도 그 원천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겸손하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도 언제 어디서나 겸손한 자에게 임하시는 줄 믿습니다.”
“베들레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도 비천한 말구유통에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으니 저도 겸손한 심령으로 왕이신 주님을 모시는 심령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랑과 자기 의를 내세우는 자들은 물리치고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고 구원을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겸손한 심령으로 주님을 바라볼 때 나의 연약함이 벗겨지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독수리치며 날아 오를 수 있는 은혜를 부어주시옵소소.”
(찬양)주께 가오니 날 새롭게 하시고 주의 은혜를 부어주소서
내 안에 발견한 나의 연약함 모두 벗어지리라 주의 사랑으로
주 사랑 나를 붙드시고 주 곁에 날 이끄소서
독수리 날개 쳐 올라가듯 나 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으리 주의 사랑 안에
나의 눈 열어 주를 보게 하시고 주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매일 나의 삶에 주 뜻 이뤄지도록 새롭게 하소서 주의 사랑으로
주 사랑 나를 붙드시고 주 곁에 날 이끄소서
독수리 날개 쳐 올라가듯 나 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으리 주의 사랑 안에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의 영원한 생명의 떡이요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베들레렘 촌동구석의 말구유통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숫자자 많고 적음도 아니요 지휘가 높고 낮음이 아니라 가난한 심령 겸손한 심령 가운데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베들레헴의 예수님 탄생교회로 들어가는 문이 겸손한 문이듯이 저와 여러분들도 나 자신을 의지하기보다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심령으로 변화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눈에 보이는 헤롯의 권력과 화려보다 이 땅에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을 좇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전신전보를 발명한 모스처럼, 천지창조를 작곡한 하이든처럼,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사는 겸손한 자들에게 지금도 주님의 사랑으로 날개치며 올라가는 은혜를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총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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