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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언제나 얼굴에 기쁨이 넘쳐나는 꽃장수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늘 그분의 모습을 궁금해하던 단골손님이 어느 날에는 그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걱정 근심이 전혀 없으신가봐요?”
“천만에요. 사람에게 걱정 근심이 없을 수가 있나요. 내게도 역경과 고통이 있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도 매일 기쁘게 사실 수가 있어요?”
“나는 ‘3일의 비밀’을 가지고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3일의 비밀’이라니요?”
“‘3일의 비밀’이란 걱정거리가 내게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3일을 기다리는 거에요.”
“그게 무슨 뜻인가요?”
“무덤에 계신 예수님께서 3일 만에 부활하셨는데 그걸 제 삶 속에 적용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물론 숫자대로 3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주님의 부활 원리는 늘 동일하게 제 삶에 역사하고 계신답니다.”
“그래서 어떤 암흑 같은 고난이 내게 닥쳐와도 3일이 지나면 광명의 열매로 끝나는 걸 목격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 삶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저는 기뻐하면서 살고 있는 거예요.”
(깨달음)우리도 그렇게 인생에 어려움과 고난이 닥쳐올 때 3일을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한 것 아닐까요?
고난 앞에 내 능력밖이라고 주님 앞에 인정하고 내 명철보다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모습 말입니다.
비록 3일이 아닐지라도 나보다 앞서 행하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지혜 말입니다.
그것이 말씀을 통해 고난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비결인 줄 믿습니다.
(성화) 구역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종이책 몇 권과 전자책 몇권을 냈습니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바울과 관련된 책을 한 권 내고 성경에 관한 책은 끝낼까 하고 있습니다.
그 책은 이제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의 가택연금으로 2년간 갇혀 지내면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썼죠.
그 중에 빌립보서를 정리하면서 깨달은 바가 많았습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 기뻐하라는 내용으로 쓴 편지였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울 때도 두 차례에 걸쳐 물질로 헌신한 교회였죠(빌4:16).
고린도교회를 세울 때도(고후11:9), 예루살렘교회에 구제헌금을 보낼 때도(고후9:2) 헌신한 교회였죠.
바울이 로마의 가택연금에 처했을 때 옥바라지를 하도록 에바브라디도를 보낸 교회였습니다(빌2:25).
그 정도로 물심양면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바울을 위해 헌신한 교회가 빌립보교회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면 바울이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빌1:3)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세울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복음에 참여하고 있다면서 하나님께 기쁨으로 간구한다고 말했습니다(빌1:4∼5).
자신은 매여 있지만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심지어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했습니다(빌1:20∼21).
(깨달음)저도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쌀도 주시고 생선도 주시고 용돈도 주시고 여행경비도 주시고 옷도 사주시고 하니 말입니다.
지난 10년간 그런 은혜를 여러분들에게 덧입었을 때 제가 어찌 잊어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그것은 저에게만 주신 게 아니라 주님 앞에 동역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긴 모습인 줄 믿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19:17)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6:6)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히13:17)
이 말씀처럼 지난 10년간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저를 섬겨주신 여러분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새벽과 점심시간과 밤에 기도할 때, 그래서 더더욱 감사한 마음으로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바울이 그런 심정으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주님안에서 감사하고 축복의 기도를 드린 것이죠.
(적용)그런데 빌립보교회가 자주색 옷감 장수가 있어서 물질적으로 풍요롭다고 해도 교회 안에 힘든 성도가 없었을까요?
교회 안에 영적으로 힘들거나 아파하는 성도가 없었다면 바울이 누가를 그곳에 남겨두지 않았겠죠.
빌립보교회가 여러 교회를 세우고 돕는데 헌금을 보내고 로마의 가택연금에 처한 바울을 옥바라지하도록 에바브라디도를 보냈어도 영적으로 힘들어는 교회이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향해 기뻐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자신이 육신적으로 매여 있어도 영적으로 자유함 속에 기뻐하듯이 여러분들도 영적인 기쁨을 잃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기쁨을 잃어버리면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만사가 힘들고 귀찮아 보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기쁨이 샘솟듯 솟아나면 아무리 힘든 일도 거뜬히 헤쳐나갈 수 있는 법이죠.
(예화)어느 날 스펄전 목사님이 울고 있었습니다.
그의 부인이 의아해서 물어봤죠.
“여보. 왜 울고 있어요? 힘든 일이 있어요? 아니면 슬픈 소식이라도 들었어요?”
그 말을 들은 스펄전 목사는 눈물을 그치고 차분하지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내가 지금 울고 있는 이유를 알고 싶소?”
“그것은 말이오, 오늘 내가 십자가를 생각해도 아무런 감동이 없더란 말이오.”
“그 사실이 너무나도 가슴 아프게 느껴졌소.”
“나에게 십자가의 감격이 없고 이렇게 메말라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말할 수 있겠소?”
(적용)신앙생활의 최대 위기는 외부의 핍박이나 어려움보다도 실은 내적이 영적 불감증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서 싱싱하게 살아있으면 어떤 핍박과 어려움도 믿음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물살이 쎄도 물고기가 살아 있으면 거친 물살을 거슬러 기쁜 마음으로 올라갈 수 있으니 말이죠.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제가 아무리 설교를 많이 준비해도 성령님이 여러분들의 심령을 흔들어 깨우지 않으면 감동이 일어날 수 없는 법이죠.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 많이 기도해도 성령님이 여러분들의 영적 정체성을 회복시켜주시고 영적인 감각을 깨워주셔야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바울은 2차 선교여행 때 데살로니가에 들어갑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드로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 사모드라를 거쳐 네압볼리 항구에 도착한 후 ‘빌립보’에 갔죠.
빌립보 강가에서 두아디라 출신의 자주색 옷감 장사 루디아를 만나 복음을 전하고 그녀의 집에서 빌립보교회가 태동되죠.
그곳에서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쫓아낸 일로 그 상전들에게 고발당해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붙잡혔지만 간수장과 집안 식구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죠.
그후 바울은 루디아의 집 사람들의 제안에 따라 마게도냐의 수도 데살로니가로 갑니다.
그곳에서 안식일날 회당에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을 전했죠.
그때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시장 일용직 노동자를 동원해 폭동을 일으켰고 바울이 머물던 야손의 집까지 쳐들어가 난동을 피웠죠.
그래서 야손의 집에 모인 성도들이 제안한 베뢰아로 가는데 베뢰아에 도착하자마자 바울은 회당을 찾아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전하죠.
베뢰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진짜로 메시아인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들었는지 데살로니가에 있던 유대인들이 그곳까지 쳐들어와서 소란을 피우자 베뢰아 성도들 몇이 바울을 데리고 피드나(Pydna) 항구로 가서 배타고 아테네로 떠나죠.
바울이 아테네 회당을 찾아 유대인과 경건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시장에서는 시장에서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죠.
더욱이 시장의 광장에서는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와 논쟁을 벌였고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더 논리적으로 복음을 전했죠.
그렇게 바울이 아테네에서 혼자 복음을 전하고 있을 디모데와 실라를 재회했지만 신생 데살로니가교회로 디모데를 보냈고 또 누가만 남아 있는 빌립보에 실라를 보냈습니다.
그 후에 바울 홀로 고린도에 왔는데 아가야 지방의 수도인 고린도는 아테네보다 두 배 컸고 인구도 60만 명에 달했습니다.
고린도의 동쪽에 겐그레아 항구가 있고 서쪽에 레카이온 항구가 있어서 고린도는 동서와 남북을 잇는 무역의 중심지였죠.
고린도 사람들은 고린도의 수호신인 포세이돈과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를 열렬히 숭배했습니다.
해발 575m에 ‘아크로폴리스’ 성채가 세워졌는데 그 중심에 ‘아프로디테 신전’ 비너스 신전이 있었죠.
그 신전에서 섬기는 여사제가 1천 명에 달했는데 낮엔 신전을 섬겼고 밤에는 시내에서 매음을 했죠.
그만큼 고린도는 우상과 음행과 타락이 만연한 도시였는데 그곳에 이미 천막을 만드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살고 있었고 바울과 동역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평일엔 그 부부와 함께 천막을 만들고 안식일이면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죠.
그때 신생 데살로니가교회를 돌보던 디모데와 빌립보교회를 돌보던 실라가 고린도에 와서 바울과 합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을 보고했고 실라는 빌립보교회의 상황과 더불어 그 교회에서 헌금한 것을 바울에게 전달해주죠.
그때 바울은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복음을 전했는데 유대인들이 거부하자 회당 옆에 있는 유스도의 집을 거쳐 삼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로 그 시점에 디모데로부터 들은 데살로니가교회 소식을 듣고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쓰게 된 거죠.
(깨달음)데살로니가교회가 세워진 지 1년도 안 됐지만 바울은 교회 성도들이 눈에 선하지 않았겠습니까?
야손의 집에 모여 예배드릴 때 유대인들과 우상숭배자들의 유혹과 핍박이 얼마나 거셌는지 말이죠.
그래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유대 율법주의자들이나 우상숭배자들에게 휩쓸리지 말고 믿음으로 굳게 서라고 권면의 편지를 써 보낸 것이죠.
더욱이 주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그대로 곧 재림하실 것이니 공중에서 혼인잔치할 걸 준비하며 흠 없는 믿음의 삶을 살라고 말이죠.
물론 주님의 재림만 바라보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남에게 폐를 끼치기보다 자기 손으로 일하면서 궁핍함 없이 살면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라고 권면하죠.
(전개)본문은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권면한 말씀이라 했습니다.
재림을 준비하지만 교회 안에 모두가 인격적이고 영적으로 강직한 성도들만 있었던 게 아니라고 했죠.
오히려 ‘게으른 자들’ 다시 말해 무질서하고 난폭한 이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취하던 방식 그대로를 교회 안에 가져와 자기 고집대로 하려고 하는 이들이죠.
또 신생 데살로니가교회 안에 ‘마음이 약한 자들’ 다시 말해 ‘용기가 없고 소심한 자들’이 있었죠.
유대인들과 우상숭배자들이 유혹하면 거기에 넘어가는 이들이 없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힘이 없는 자들’ 다시 말해 ‘영적으로 나약한 자들’도 교회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배하고 기도할 때는 세상을 이길 것 같다가도 예배당 밖을 나가면 세상의 불의와 거짓에 휩쓸리는 성도들이죠.
더욱이 영적으로 나약한 자들은 감정 기복이 심해서 성도들 서로가 비위를 맞추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깨달음)바울은 그런 성도들을 내치고 마음 맞는 성도들과 신앙생활하라고 권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성도들을 포용하는 마음으로 격려하고 붙들어 주고 오래 참으라고 권면했죠.
우리말 ‘오래 참다’는 헬라어 원어는 죄에 대하여 분노하시면서도 희생제물되신 예수님의 인내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했죠.
우리가 누군가를 향해 오래참는다는 것은 나를 십자가에 올려놓고 죽일 때에만 가능한 법입니다.
일흔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할 수 있는 길도 나를 십자가에 제물 삼아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용서할 수 있는 것이죠.
바울도 30년 넘게 자신을 향해 오래 참아주신 주님의 사랑 때문에 변화된 것 아닙니까?
그 전까지는 멧돼지가 옥수수 밭을 쑥대밭으로 만들 정도로 강퍅하고 포악한 자였으니 말입니다.
그걸 체험한 장본인이기에 신생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향해 서로가 서로에게 오래 참으라고 권면한 거죠.
그만큼 너희들 각자를 십자가에 올려놓고 죽여야 타인의 허물과 티를 보듬어 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15절 말씀도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누군가 악으로 나를 대하는데 내가 어떻게 선으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 내게 악한 감정으로 대하는데 내가 어떻게 선한 마음으로 꿋꿋하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나 자신을 십자가에 제물로 올려놓고 ‘나는 예수님으로 죽은 사람입니다’할 때에만 가능한 법이죠.
자식 앞에서도, 남편과 아내 앞에서도, 일터의 동료 앞에서도, 교회 안의 성도들 사이에서도, 나를 십자가에서 죽일 때에만 포용과 격려가 넘쳐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지난 시간 16-18절 말씀을 살펴봤는데 오늘은 16절 말씀만 한 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살전5:16)
(원해)여기에 ‘기뻐하다’는 헬라어 ‘카이로’(χαίρω)는 히브리어로 ‘샤마흐’(שָׂמַח)와 같은 단어입니다.
‘샤마흐’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신분에 대한 ‘자긍심’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왕의 자녀나 대통령의 자녀만 되도 어느 곳에서나 보호받고 누구 앞에서는 당당할 수 있는 법이죠.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기뻐하라’고 말한 것도 바로 그런 이치입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외적으로 힘든 일을 겪을지라도, 내부적으로 난폭하고 소심하고 영적으로 나약한 자들이 있을지라도, 기뻐하라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지 않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영적인 기쁨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항상’은 헬라어 ‘판토테’(πάντοτε)는 ‘항상’ ‘언제나’ ‘늘’ ‘때를 가리지 않고’라는 뜻입니다.
내 생활이, 내 감정과 상황이, 내 성적과 내 재정이, 내 직장과 자녀가, 예외가 생길지라도 어김업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꽃가게 할머니도 어떤 역경과 고난 앞에서도 주님의 부활하신 3일을 바라볼 때 기뻐하며 살았습니다.
스펄전 목사님도 영적인 정체성과 영적 감수성을 회복해을 때 영적인 기쁨으로 승리했습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어떤 상황속에서도 항상 기뻐하는 영적인 정체성과 영적 감수성을 잃지 않고 사는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인생을 많이 산 꽃가게 할머니에게도 아픔과 고통과 괴로움이 있지만 주님의 부활하신 3일을 바라보며 그 어려움들을 기쁨으로 이겨내며 살아온 것 아니더냐?”
“외적으로 고통당하고 괴로운 일을 당할 때 힘들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때로는 영적인 정체성과 영적인 감수성을 잃을 때 더 힘든 법 아니겠느냐?”
“스펄전 목사님도 영적으로 무감각해 있을 때 우울하고 복잡했지만 영적인 정체성과 영적 감각을 회복했을 때 모든 것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지 않았더냐?”
“빌립보교회도 다른 교회를 세우고 돕고 구제하고 바울을 물심양면으로 도왔지만 영적인 정체성을 잃어버렸을 때 힘들어한 것 아니었더냐?”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도 교회 안에 난폭하고 소심하고 영적으로 눌린 자들이 있을지라도 그들이 기쁨을 잃어버린 이유가 영적인 정체성과 영적인 감각을 잃어버린 까닭이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오늘 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적인 신분의 정체성과 영적인 감각이 살아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적인 정체성을 놓치고 산다면 아무리 기분 좋은 일이 있어도 마음에 기쁨이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떤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적 정체성을 갖고 있으면 그 모든 고난과 역경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지 않겠느냐?”
“네가 영적으로 살아 있는 감각을 갖고 있으면 죄도 유혹도 고난고 역경도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달아나지 않겠느냐?”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지금도 네 가운데 계시고 너를 잠잠히 바라보시고 너를 사랑하고 계시니 너는 영적 기쁨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찬양)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예화)해방되기 전에 함경북도 나남에 한 여자 거지가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젊은 여자였는데 항상 살이 보이는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고 이집 저집 다니며 구걸행각을 벌인 여자였습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말했다고 하죠.
“젊은 것이 무엇을 못해 거지가 된지 모르겠어?”
“멀쩡한 여자가 일하기 싫어서 저 모양 아니겠어?”
그렇게 사람들이 그녀에게 욕설을 퍼붓고 살았지만 그녀는 한 번도 화 내는 일 없이 싱글벙글 웃어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흡사 정신병자로 보고서 미친 여자 취급하며 제대로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8월 15일 해방이 되고 함경북도 그곳 나남에 소련군이 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거지처럼 보이고 정신병자처럼 보이던 그 여자가 갑자기 소련군 장교 옷을 입고 중위 견장을 달고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거지가 아니라 여태껏 소련군으로부터 밀파된 여자 간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거지요 정신병자라며 그녀를 조롱하고 업신여길 때 여태껏 태연하게 웃을 수 있는 자세를 취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그녀는 자기의 신분에 대한 소명과 긍지를 갖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그녀였으니 누가 뭐라고 말해도 누가 멸시해도 그녀는 주눅들지 않고 당당한 기쁨 속에서 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그러니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적인 신분 속에 사는 우리도 세상이 무시하고 조롱한다고 해도 화를 내면서 살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아무리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하고 어려움과 고난을 부여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적인 당당함과 자신감을 갖고 살 수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모든 만물의 창조주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의 아버지신지 말입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자녀인 내가 어려움과 고난에 처할지라도 가장 선한 것으로 역사하실 것을 믿기에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의 3일을 바라보며 기뻐하며 기다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님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배신당하고 로마 병저들에게 매맞고 침뱉음 당하고 온갖 조롱을 받았어도 불평치 않고 기뻐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닙니까?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요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신 기쁨의 주인공이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내 영적인 무감각을 깨우사 영적 감각을 회복하게 하셔서 어떤 죄와 유혹과 고난도 기쁨으로 이겨내게 하시는 아바 아버지이신 줄 믿습니다.
(적용)로마의 가택연금상태에 있을 때 빌립보서를 써 보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록 몸은 갇혀 있지만 영적인 자유와 영적인 감각이 깨어 있었기에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 기뻐하라고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를 써 보낸 고린도시가 사치와 향락과 우상이 넘치는 도시였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영적으로 위축되지 않고 기쁨을 잃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적인 정체성과 영적인 감각을 하나님께 항상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기도)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실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요. 주님. 8·15 해방 전에 함경북도 나남에서 구걸하고 정신병자처럼 보였던 그녀가 조롱받고 무시받아도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네요.”
“해방 후를 대비해 그 지역을 정탐하는 소련군으로부터 밀파된 소련군 중위라는 신분이었기 때문이네요.”
“주님. 저도 이 세상에서 어떤 고난과 여러움과 수난을 당해도 영적인 기쁨을 잃지 않고 사는 비결이 그것이네요.”
“어떤 일이 있어도 제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적인 정체성과 영적인 감수성을 잃지 않는 것이 그 비결이네요.”
“주님.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빌립보서를 써 보낼 때도 육적으로는 자유를 잃었지만 영적인 자유함을 누리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기뻐하라고 권할 수 있었네요.”
“바울이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보내면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한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었어요.”
“올 한 해 아픔도 괴로움도 고통도 많았지만 제가 주님의 자녀라는 영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고 내 영혼을 흔들어 깨우시는 영적인 감각을 잃지 않는 한 나에게도 언제나 기쁨이 떠나가지 않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날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으니 그 날을 바라보며 깨어 있을 때 더더욱 기쁨으로 맞이하게 하실 줄 믿어요”
(찬양)그날이 도적같이 이를 줄 너희는 모르느냐
늘 깨어 있으라 잠들지 말아라 주님과 동행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향하신 하나님 뜻이니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를 거룩하게 하시고
온몸과 영혼이 주 오실 그날에 흠 없기 원하노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향하신 하나님 뜻이니라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적인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영적인 무감각 속에 살면 어떤 즐거움도 즐거움으로 다가오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고 영적인 감각 속에서 살고 있으면 어떤 고낙과 역경 앞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꽃가게 할머니가 일평생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며 살았던 것도 주님의 부활 3일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함경북도 나남에서 구걸하며 살고 정신병자 취급받았지만 소련군 중위로 파견된 장교였기에 그녀는 온갖 구박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영적인 정체성과 내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는 한 어떤 어려움과 고난도 기쁨으로 이겨내며 살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총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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