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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드디어 〈바울의 일생과 편지〉란 책이 나왔습니다.
그 책을 내면서 바울의 일생을 다시금 조명할 수 있고 새롭게 깨달은 점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34살에 주님을 만난 이후 67세에 참수형 당하기까지 30년 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 세상의 출세와 성공만을 목적으로 산 그였었죠.
하지만 영원한 세계에 눈을 뜬 바울은 그때부터 죽을때까지 좌로우로 치우치지 않고 끝까지 생을 불태웠습니다.
뭔가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매진하는 게 어리석어 보여도 산을 옮길 수 있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바울 곁에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동역자들을 대거 포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디모데를 비롯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도 그렇습니다.죠.
그런데 이번에 더 깊이 알게 된 인물이 하나 있었는데 디도였습니다.
그는 안디옥교회의 이방인 신자 중 하나였는데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교회에 갈 때 따라나섰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이 디도에게 할례를 시행토록 할 때 바울과 바나바가 망설일 때 기꺼이 수용한 디도였습니다.
그때부터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이 안디옥교회가 이방인 선교사역의 주역이라는 걸 인정해줬죠.
그 후에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서 고린도교회의 다툼과 분열을 듣고 디모데와 디도를 보냈습니다.
그때 젊지만 성격이 유약한 디모데는 그 문제를 해결치 못했는데 나이 많고 강단있는 성격의 디도가 해결하고 돌아오죠.
그때 바울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런 디도는 바울이 참수형 당하기 직전의 67세까지 바울 곁에서 늘 함께 했다는 사실입니다.
A.D.64년 7월 로마에 대화제가 발생했는데 네로는 그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렸습니다.
그때 체포명령을 내렸는데 바울도 체포당하고 로마의 마메르틴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때까지도 디도는 바울의 지시시항을 저울질하지 않고 끝까지 흔들림없이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영생의 세계가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에 변함없이 나아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나 누가나 디도도 바울을 통해 그런 빛의 세계와 영생의 세계가 있음을 확신했기에 흔들림 없이 믿음으로 나아간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이 땅의 세계와 영생의 세계를 간 보며 왔다갔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길이 천국의 길인지 지옥의 길인지 분명한 노선을 갖고 죽는 순간까지 천국의 세계를 향해 나아간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곁에 디모데나 누가나 디도와 같은 선한 동역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이 영생의 주인인지 아닌지 말씀을 상고한 베뢰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빛의 세계를 맛보아 알았음에도 영원한 세계와 이 땅의 세계 사이를 간보다 결국 바울을 떠난 데마같은 사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로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선 데마였습니다(히6:4-6).
(적용)그런 디도와 데마의 모습은 마치 룻과 오르바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의 흉년을 피하고자 이방 땅 모압을 향해 남편과 두 아들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10년간 살면서 말룐과 기룐 두 아들을 장가보냈지만 결국 10년간 남편 죽고 두 아들도 죽고 말았죠.
그런 혹독한 고통을 겪은 후에 베들레헴 생명의 떡집, 그 믿음의 집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본인의 삶도 버거운 형편에 며느리들까지 함께 동행하는 부담을 주는 게 싫었습니다.
그래서 홀로 고향 땅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두 며느리에겐 이 땅에 남아 새 인생을 살도록 했죠.
그때 두 며느리 모두 결코 그럴 수 없다면서 어머니를 따라나서겠다고 이야기를 하죠.
하지만 한 번 더 권하면서 이땅에 남아 새롭게 개가하여 살도록 할 때 두 며느리의 반응이 엇갈렸죠.
둘째 며느리 오르바는 모압 곧 자기 족속의 땅에 남겠다고 했고 첫째 며느리 룻은 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룻이 나오미를 향해 고백한 신앙고백이 룻기서 1장 16-17절에 나옵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룻1:16-17)
바로 이것이 룻과 오르바의 차이요 디도와 데마의 차이와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둘째 며느리 오르바는 영생의 떡집과 이 세상의 떡집을 간보며 그 마음이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은 이 세상의 떠집이라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모압 땅을 선택하다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첫째 며느리 룻은 어머니 나오미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어머님이 믿는 하나님을 자신도 끝까지 믿고 따르겠다는 신앙고백을 한 것이죠.
자신의 처지가 한 없이 연약하고 부족해도 약할 때 강함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간 그녀였죠.
끝까지 바울의 동역자로 함께 한 디도와 중간에 세상으로 니간 데마의 차이가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데마처럼 간을 보며 좌우로 치우치기보다 디도처럼 살기를 바라시는 줄 믿습니다.
부족함과 연약함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주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영생의 주인공으로 삼아주시는 줄 믿습니다.
대림절 넷째 주일인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4주째 살펴보고 있는 본문은 B.C.4년 경 헤롯 대왕이 70세가 되던 통치 말년의 시기였습니다.
그는 에돔의 후예로서 전쟁의 공로로 26살에 갈릴리의 총독, 33살에 유대인의 왕으로 37년간 다스렸죠.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도시를 건설했고 농업을 장려했고 해상 무역을 발전시켰습니다.
더욱이 유대인들이 하나님처럼 떠받들고 우상시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46년간 성전을 증개축했습니다.
권력욕이 너무 강한 그는 자신의 뒤를 이을 장남도 의심해서 죽였습니다.
그가 죽기 4일 전에는 다른 두 아들조차 살해해버렸습니다.
심지어 장모와 자기 부인 마리암네까지도 정적으로 죽이고 말았죠.
(전개)바로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태어나신다는 것을 첫 주에 살펴봤습니다.
왜 하필 베들레헴 땅이었습니까?
베들레헴은 히브리어로 ‘떡집’ ‘빵집’을 뜻한 곳입니다.
하지만 곡물이 풍성하게 나는 곡창지대가 아니라 그야말로 산동네의 허름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목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 ‘영생의 떡’으로 베들레헴에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이목은 화려하고 멋진 왕실에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은 달랐죠.
하나님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산동네에서 구원의 주님이 태어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임을 만천하에 깨닫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의 자치구에 있는 예수탄생교회에 들어가는 그 문도 아주 작고 좁다고 했습니다.
메시아요 구원자 아기 예수를 알현코자 한다면 지휘고하를 막론하게 누구든지 경배하는 마음을 지녀야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둘째 주에 살펴본 말씀은 동방 박사들이 별을 보고 유대 땅까지 찾아왔지만 막판에 헤롯에게 나아간 모습이었습니다.
동방의 마고스란 별점을 보는 사제단으로 동방의 현자들로 불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 땅에서 동쪽이란 바벨론이나 페르시아 땅으로 짧게는 3개월 길게는 8개월에 걸려 별을 보며 유대 땅까지 온 그들이었죠.
하지만 그 별을 따라 유대 땅까지 왔지만 막판에 그들은 헤롯 궁으로 가버렸죠.
유대인의 왕이라면 헤롯 왕에게서 태어날 후손이라 생각한 채 그들의 인간적인 관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늘의 별처럼 말씀을 좇아 잘 살다가 막판에 인간적인 관점에 치우치면 그들처럼 엉뚱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 모습이라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처럼 도시 소돔과 고모라 땅을 택할 수 있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자라면 하늘의 것을 좇아 살아야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3:1)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은 동방 박사들이 헤롯 왕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실 일을 경배하러 왔다고 할 때 헤롯과 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소동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소동하다는 헬라어 ‘타랏소’(ταράσσω)는 ‘액체를 휘젓다’(to agitate) ‘사람을 선동하다’는 뜻과 함께 ‘불안하다’ ‘근심하다’는 뜻이 있다고 했죠.
왜 헤롯과 예루살렘 사람들 모두가 불안과 근심에 휩싸인 것이었습니까?
헤롯은 자기 권력을 지키는 일이라면 장남도 두 아들도 장모도 자기 아내도 서슴없이 처단하는 극악무도한 인물임을 알기에 새 왕이 태어난다면 피비린내가 진동할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죠.
살아있는 권력과 새로운 권력의 충돌로 온 시내가 소동하고 불안과 근심에 휩싸일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극악무도한 헤롯의 목숨도 실은 그 해에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거둬가셨습니다.
모든 주권과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인데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자기 권력에 취하다 비참한 생으로 마감케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인간이 벌이는 모든 소동의 근원, 불안과 근심의 근원은,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아와 주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내어맡길 때만 소동과 불안과 근심은 사라지고 평안이 자리잡을 수 있는 것이죠.
(깨달음)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찬식을 가지면서 제자들에게 한 말씀이 그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예수님이 체포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 제자들은 절망속에서 불안과 근심에 휘말릴 것을 내다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소란과 불안과 근심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비록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으로 시체 가운데 있는 당신을 다시 부활케 하실 것을 내다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위한 거처까지 예비하겠다고 한 것이요 친히 제자들을 영접하여 예수님 있는 곳으로 불러오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그만큼 제자들도 자기 자아와 주권을 온전히 주님께 내어맡기고 살라는 뜻이었습니다.
시국이 수상할수록 영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모든 자아와 주권을 맡기는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지금도 평안과 담대함을 불어넣어주실 줄 믿습니다.
(본문)오늘은 본문 4-6절을 눈여겨보시면서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원해)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갓난 아이를 보고 경배하러 왔노가 할 때 헤롯이 보인 반응입니다.
헤롯은 자신에게서 태어날 아들은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전을 하나님처럼 떠받드는 유대인들을 위해 46년간 증개축하면서 유대인들에게 내려오는 메시아 사상에 대해서 익히 들은 헤롯이지 않았겠습니까?
그 까닭에 그 동방박사들이 말한 그리스도를 알아보고자 대제사장과 구약성경에 능통한 서기관을 불러모아 물었던 것이죠.
‘과연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겠느냐’하고 말이죠.
우리말 ‘그리스도’란 헬라어로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로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입니다.
구약시대에 기름을 붓는 세 유형의 사람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였습니다.
다윗에게도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았고 아론에게도 기름을 부어 제사장으로 삼았고 엘리사도 기름을 부어 선지자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아 구원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깨달음)헤롯이 유대 백성들 사이에 퍼져 있는 메시아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어디서 그리스도가 태어나겠냐고 했는지 물어봤습니다.
하지만 진짜로 메시아가 어디서 태어나는지, 그 구원의 주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몰라서 물어봤겠습니까?
성전을 증개축하면서 유대인의 두루마리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난다고 예언돼 있는 사실을 한 번더 확인코자 물어본 것이었겠죠.
물론 그것은 헤롯이 구원의 주님을 믿고자 물어본 게 결코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통치권력과 주권을 내려놓고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를 자기 심령에 모시고자 물어본 게 아니었습니다.
설령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알고 있어도 자신의 현재 주권이 훨씬 더 커보였기 때문에 자기 자아와 주권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영원한 세계의 그리스도와 그 땅의 자기 주권 사이를 간 보면서 왔다갔다 하다가 결국 지옥으로 떨어진 헤롯이었습니다.
(적용)바로 그것이 비울의 동역자로 살다가 이 세상의 것을 좇다가 사망의 길로 치달은 데마의 모습과 같은 격이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베들레헴의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세계와 모압 땅의 세계를 간보며 왔다갔다 하다가 결국은 모압 땅에 눌러 앉다가 사망으로 치달은 오르바의 모습이지 않겠습니까?
헤롯이 46년간 성전을 증개축하면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를 들어왔지만 그도 이 세상과 영원한 세계를 간보다가 끝내 사망의 길로 치달은 모습이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은 이 세상과 영원한 세상, 천국과 지옥, 영적인 세계와 육적인 세계를 간 보며 왔다갔다 하지 않고 디도와 룻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과 영원한 세계를 간 보며 왔다갔다 하기보다 영원한 세계를 끝까지 바라보며 사는 은혜 안에 거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34살에 주님을 만난 바울이 30년 넘게 복음의 길을 참수형 당할때까지 걸어간 것은 그것이 영원한 생명의 길임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며 살았기 때문이지 않았겠느냐?”
“디도가 바울의 동역자로 30년간 끝까지 함께 한 것도 영원한 세계를 확신하며 나아갔기 때문이지 않더냐?”
“하지만 데마는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 육신의 세계와 영원한 세계 사이에서 간을 보며 왔다 갔다 하다가 끝내 사망의 길로 향한 것 아니더냐?”
“나오미가 영생의 떡 베들레헴으로 가고자 할 때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을 좇아 끝까지 나아갔지만 오르바는 그 땅의 것을 좇다가 그만 지옥으로 향한 것 아니더냐?”
“헤롯도 성전을 증개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요 구원자임을 알았지만 이 땅의 것과 영원한 세계를 간보다가 끝내 사망의 길로 치달은 것 아니었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영원한 영적 세계를 맛보아 안다면 바울처럼 디도처럼 나오미와 룻처럼 흔들림 없이 영생의 길을 걸어야 하지 않겠느냐?”
“데마처럼 오르바처럼 헤롯처럼 이 세상과 영원한 세계를 간 보며 왔다 갔다 하다 사망으로 치닫지 말도록 말이다.”
“어떤 사람이 보기에 이 세상의 길이 바르게 보일지라도 필경 사망의 길이 있고 좁고 협착한 길일지라도 그 길이 생명의 길이 있지 않더냐?”
“헤롯처럼 자기 자아와 자기 주권을 부인하지 못하는 자는 지금도 이 세상과 영원한 세상을 간보며 왔다 갔다 하다가 끝내 지옥으로 치닫지 않겠느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이 그렇게 왔다 갔다 간 보는 것들을 피하고 오직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영생을 취했으면 좋겠구나.”
“그를 위해 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를 위해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증거를 하나님께 베풀어주실 터이니 말이다.”
(찬양)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믿음 흔들리고 사람들 주를 떠나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나라는 영원히 쇠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예화)1967년 이스라엘 총리로서 연립 내각을 이끌었던 여자 정치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중동 평화를 위해서 무척이나 애를 썼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고 모든 국민이 잘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했던 인물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골다 메이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녀가 죽은 후에야 12년 동안 백혈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때때로 골다 메이어 총리는 자기의 약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제 얼굴이 못생긴 것을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일반적인 다른 사람과 비교해 봤을 때 너무나 못났기에 열심히 기도했고 정말 최선을 다해 공부했습니다.”
“나의 이러한 연약함은 나에게 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도 무한한 도움을 줬습니다.”
“우리의 약점과 실망은 곧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입니까?
나의 약점과 나를 향한 실망감이 실은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사모하는 간절함이 된다는 사실이죠.
(예화2)어느 날 세계적인 설교자 스펄전 목사가 화단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집 강아지 한 마리가 그 울타리를 넘어 들어와 화단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꽃을 좋아했던 스펄전 목사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강아지를 향해 고함을 치며 나무토막을 집어 던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강아지가 반갑게 꼬리를 흔들면서 나무토막을 물고 스펄전 목사 앞에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자신을 향해 꼬리를 흔들면서 다가오는 그 강아지를 향해 더이상 고함을 지를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강아지를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강아지야. 화단에 들어오고 싶으면 이제는 언제라도 들어오렴. 내가 너에게 졌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입니까?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자기 행위로는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염치없는 강아지처럼 오히려 하나님께 계속 매달리는 사람이 결국 큰 사랑을 얻는 것 아니겠습니까?
신앙생활에는 간을 보면서 왔다 갔다 하고 눈치보는 것보다는 묵묵히 순종하는 것과 하나님께 매달리는 간구가 훨씬 더 은총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12년 동안 백혈병을 앓고서도 하나님께 매달리며 총리직을 잘 감당했던 골다 메이어 저도 살게 해 주세요.”
“어떤 경우에도 내 힘이나 내 능력이나 내 주권을 의지하지 않고 나의 약함을 하나님께 아뢰며 살게 해 주세요.”
“스펄전 목사가 아끼는 화단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강아지를 향해 소리치고 나무 토막을 던졌지만 그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올 때 스펄전 목사의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나의 강함이나 나의 능력이나 나의 주권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께서도 내 안에 역사하실 수 없고 성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도 임재할 수 없음을 압니다.”
“바울도 디도도 나오미도 룻도 실은 자기 약함과 부족함을 아는 자들이요 그렇기에 끝까지 주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 저도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이 오히려 하나님의 강함과 능력이 되도록 끝까지 주님만 붙잡고 살게 해 주세요.”
“어떤 경우에도 헤롯처럼 이 세상의 것과 영생의 것을 간보며 왔다갔다 하지 말고 한결같이 영생의 주권자이신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게 해주세요.”
“약할 때 강함되시는 주님만 붙잡고 사는 저희에게 오늘도 성탄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임재하시고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을 강함과 능력으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찬양)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십자가 죄 사하셨네 주님의 이름 찬양해 주 나의 모든 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원한 진리와 생명의 세계를 맛본 자들은 결코 흔들림 없이 영생의 세계를 향해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땅의 세계와 영생의 세계를 간보며 왔다갔다 하는 자들은 결국 이 세상을 좇다 사망의 길로 빠져들게 됩니다.
바울처럼 디도처럼 나오미처럼 룻처럼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간 보지 말고 연약함 속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좇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데마와 오르바와 헤롯처럼 영생과 그리스도를 알고 있지만 이 세상의 자기 자아와 주권을 내려놓지 못한 자들은 결국 세상을 좇다 지옥의 길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12년간 백혈병을 앓던 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살았던 골다 메이어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나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역사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끼는 화단을 쑥대밭을 만들었어도 꼬리를 흔들며 찾아오는 강아지를 스펄전 목사가 품어줬듯이 우리가 약하고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께 나아갈 때 주님은 더 큰 은혜로 품어주실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나의 자아나 강함은 내려놓고 나의 약함을 주님께 의탁하고 신뢰할 때 성탄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친히 임재하시고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총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충만하게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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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에 나시매(마2:1-6)_2024년 12월 1일 대림절첫째주일 설교문 (1) | 2024.11.29 |
항상 기뻐하라(살전5:14-18)_2024년11월24일 주일설교문 (2) | 2024.11.21 |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4-18)_2024년 11월 17일 추수감사주일설교문 (7) | 2024.1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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