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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8장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와 관련한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질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입니다. 8장 1-11장까지 같은 주제가 계속됩니다.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 말이죠. 이런 문제를 전문적인 용어로 ‘아디아포라’라고 하죠. ‘아디아포라’란 대수롭지 않는 일을 뜻합니다. 성경에 하라 하지 말라, 한 예가 없을 때에는 사회문화적인 상황과 개인적인 신앙양심에 따르는 것이죠. 2천년전 고린도교회에서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가장 심각하고도 미묘한 ‘아디아포라’였습니다. 2천년전 고린도 시내에 수많은 신전들이 있었는데, 아폴로, 헤라클레스, 아프로디테 신전 등 밝혀진 것만 12개 신전이 있었죠. 그 신전의 사제들은 신전에 제사를 드리는 게 아니라 관혼상제와 결혼식과 피로연도 신전에서 했죠. 당연히 신전 음식이 나오겠죠. 그때 그 음식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이 심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 신전 음식이 고린도 시내에 유통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것을 먹어도 무방하다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지만, 유대계그리스도인들은 율법주의 관습에 얽매여 먹는 것을 죄라고 여겼습니다. 당연히 양 진영에서 논쟁이 붙었고, 그 문제를 에베소에 있는 바울에게까지 편지를 보낸 것이었죠.
그런데 우리가 이미 읽어봤지만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 유대인 교사들이 교회에 들어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이죠. 할례를 구원의 절대 조건과 같이 여긴 것이었죠. 바울은 그 문제를 예루살렘으로 직접 가지고 올라갔고, 첫번째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그때가 A.D.50년이었죠. 그때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의장이었는데, 사도행전 15장 19절의 말씀과 같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야고보는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막지 말되,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그리고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때 그 현장에 바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공의회 결정에 따라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풀어나가고자 하지 않고, 다른 차원으로 풀어나간다는 점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다 지식이 있는 줄 아나’ 하는 말은 ‘벌써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쪽이 옳고, 저쪽이 옳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하는 까닭입니다. 지식의 토대 위에서 논쟁하고 결정하면 해결될 방법이 없다고 봤던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오직 사랑으로서만 덕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본 것이죠. 이를테면 고린도 교인들은 그 문제의 해결책을 지식으로 보았던 반면, 사도 바울은 그 문제의 출발점의 해결책을 사랑의 덕으로 봉합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지금 양 진영에서 자신들이 다 맞는 것처럼 편지를 보낸 상황이고, 바울은 무엇을 아는 것처럼 단정하는 것은 실은 하나도 모르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점으로 그 문제를 대하면 분명한 해결책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상처만 주기 때문이죠.
4절에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우상의 제물을 먹고 못 먹고 따지기 전에,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상의 실체에 대해 시편 115편 4-8절이 잘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우상은 한마디로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 낸 것이란 뜻이죠. 바울은 그래서 이 세상에서 신이라고 우리가 경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5-6절입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2천년전 시대에 하늘과 땅에 많은 신이라 불린 신들이 있다 할지라도, 실재로 존재하는 신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주장을 하면서 여기에서 끝내버렸다면, 바울도 우상에 관한 문제를 지식으로 해결하려는 자와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다음에 계속 이야기합니다. 7절에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우상은 나무 조각이나 쇠붙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직까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우상의 음식을 먹을 때마다 주님께 죄를 범하는 것 같은 거리낌을 받아 양심이 약해진다는 것입니다.
8절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내세운다’는 ‘파리스테미’(παρίστημι)로 ‘가깝게 한다’는 뜻입니다. 음식을 잘 먹는다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고 못 먹는다고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음식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데 아무런 요인도 못 된다는 것이죠.
9절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네가 우상의 음식은 아무 것도 아니기에 먹을 자유 곧 먹을 권한이 있지만, 믿음이 약한 자들, 아직도 우상의 음식이라 생각하는 자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권리를 함부로 사용치 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10절에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이게 무슨 말일까요? 내 친구의 자녀가 결혼하는데 신전에서 합니다. 당연히 우상한테 바친 제물이 나오겠죠. 나는 그 우상이 쇠붙이요 나무에 불과하기 때문에 음식을 먹을 수 있죠. 그런데 그런 믿음과 지식에 이르지 못한 자들이 나를 보고 엉뚱한 담력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저런 믿음 좋은 사람도 우상의 음식을 먹으면서 우상한테 뭔가를 비나 보네’하고, 양심이 부정적으로 담대해져서 우상을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1절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주님께서 네 믿음의 형제를 위해 돌아가신 일을 너 스스로 허무는 꼴이 되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래서 12절에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너의 자유와 권리만내세우다보면 누군가 실족당할 것이고, 그것은 한 개인에게만 죄를 짓는 게 아니라 주님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다,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13절에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만약 내가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로 누군가 실족케 된다면 영원히 고기를 입에 대지 않을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령님께서 무엇을 깨닫게 하십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는 자들이지만 나를 위한 자유보다 함께 신앙생활하는 동료를 위해 스스로 절제하는 것, 그것이 참된 믿음이자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죠. 그런 관점으로 ‘아디아포라’의 문제도 해결하라는 것이죠. 담배 피우는 부분도 죄냐? 아니냐? 실은 신부들도 피고, 유명한 개신교 신학자도 피웠죠. 스위스 같은 유럽은 포도주를 주식으로 마시죠. 그런데 어느 가정이나 가풍이 있는 것처럼, 한국 기독교의 교풍이라는 게 있죠. 예배 때 슬리퍼랑 반바지차림도 똑같죠. 그걸 사람에게 매이게 하라는 차원이 아니라 사람을 섬기는 종으로, 타인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교풍을 지키는 게 좋다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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