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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7장부터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질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이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1-16절까지는 결혼여부의 원칙, 배우자와 사별한 독신자의 재혼문제, 기혼자의 이혼 문제 등에 대해 바울이 답변해주고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신분, 혹은 사회적 처지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지에 대한 바울의 답변입니다. 결혼 문제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2천년전 고린도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을 알아야 한다고 했죠. 오늘 읽은 사회적 신분에 관한 말씀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통용될 수 있는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본문 17절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장관이나 각 부처 자리는 이해관계에 따라 나눠주는 경향이 없지 않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상대적인 관계를 맺는 분이 아니라 절대적인 관계를 맺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나누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하는 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여기에서 ‘행하라’는 ‘페리파테오’(περιπατέω)는 ‘걸어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부르신 그대로 걸어가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이것은 고린도에 있는 특수한 상황의 말씀이 아니라 모든 교회를 향한 말씀, 곧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좀 더 살펴봐야 알 수 있죠. 본문 18절입니다.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유대인들은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태어난 지 8일 만에 생식기의 양피를 베는 할례를 행했죠. 그들을 제외한 이방인들은 하지 않았습니다. 2천년전 복음이 전해질 당시 로마제국 시대에 유대인만 회심하고 교회의 교인이 된 게 아니라 외국인들도 교회 교인이 되었죠. 그런데 한 그룹은 할례를 행한 유대인, 한 그룹은 할례를 행하지 않은 이방인이 있었죠. 그들 사이에 논쟁이 붙었던 것입니다. 할례를 받는 게 구원의 표식이자 조건이다, 하고 말하는 부류가 있었고,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은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인데 무슨 할례가 필요하냐고 말이죠. 그러면서도 그 중간에 할례받지 않는 이들 가운데 할례를 받으려는 이들도 있었고, 이미 할례를 받았는데 다시금 할례의 이전 상태로 성형수술을 받으려는 이들도 있었다는 것이죠. 지금 그 이야기죠.
본문 19절입니다.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이 할례문제가 초대교회에서 얼마나 뜨거운 감자였는지, 사도행전 15장에 최초의 공의회까지 열렸습니다. 그 주제가 할례문제였죠.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냐? 아니냐? 그리스도인은 할례를 받아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그런데 바울은 말하기를 할례를 받고 안 받고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상충되는 것 아닙니까? 유대인들이 그토록 할례에 집착한 것은 단순한 관습이나 옳다고 생각한 까닭에 한 게 아니라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명령이었죠. 창세기 17장 10절에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손도 다 지켜야 한다고 말이죠. 그러니까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주장하는 것인데, 바울은 할례를 행하는 게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죠.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 같고, 한 편으로는 계명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무엇을 중요시하고 있습니까?
그걸 알기 위해서는 할례의 본질적인 의미를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했는데,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했기 때문에 의로운 백성이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죠. 창세기 15장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하기 전에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의롭다고 여겨 주신 것입니다. 그만큼 할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를 쓴 바울이 로마서 4장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을 인치시기 위해 할례를 행하게 했다는 뜻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확증하는 증표가 할례였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입니다. 그들은 육체의 한 부분에 칼을 대고 할례를 행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구원받은 것으로 착각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신명기 30장 6절에서 육체의 할례보다 마음의 할례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았다면 그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도록 해라, 반대로 할례를 받지 않았다면 그 상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라는 것 말입니다.
본문 20절입니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첫 번째 ‘부르심’은 ‘칼레시스’(κλῆσις)로 동사이고 두 번째 ‘부르심 그대로’는 ‘칼레오’(καλέω)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부르심 받은 그 상태로 하나님 앞에서 걸어가라, 그 상태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에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네가 노예인데 자유인이 될 수 있거든 굳이 피하지 말라, 자유 하도록 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의 헬라어 원문의 의미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자유할 수 있으면 자유해도 되고, 그대로 있어도 된다는 것이죠. 물론 원문의 무게는 앞에 있습니다. 종이어도 거리낄 게 없이 살라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22절에,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비록 종이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자유인이라는 말입니다. 또 하반절에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하는 말씀은 네가 자유자로 있을 때에 너를 부르신 것은 네 마음대로 살라고 하신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도록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네가 다른 사람보다 자유롭고 지위가 높다면, 그걸로 네 맘대로 살라고 하신 게 아니라 네 곁의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종이 살라는 뜻으로 자유를 주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에 대해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 이렇게 밝혀줍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본문 23절입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주고 우리를 샀는데,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회사에 사표 내라는 뜻일까요? 아니죠. 내가 종으로서 윗 사람을 섬기는 것과 그리스도인의 소명으로 섬기는 것은 다르다는 뜻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는 다면서도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람을 섬기지 않고 사람을 더 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람의 종이 된다면 비굴함과 열등감의 노예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섬기면 어떤 경우에도 자유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24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이 말을 17절과 18절에 이어 세 번째 똑같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 마디로 줄이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부르실 때의 상황을 회피하지 말고, 그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걸어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부르실 때 현재 상황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자리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질 것이기에, 그 상황에 순종하며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순종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자 주어진 상황에 대한 순종 말입니다. 아브라함도 혈혈단신일 때 부르심에 순종했고, 요셉도 감옥에 있을 때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주어진 상황이 힘들고 고달파도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귀한 은혜의 복을 열어주신다는 점입니다. 오늘도 그런 은혜의 하루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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