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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교회에 우상의 제물과 관련해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 곧 자유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아무 일 없다고 했고, 율법의 관습에 빠진 사람들 곧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의 제물을 절대 먹을 수 없다고 논쟁을 했습니다. 에베소에 있던 바울이 그들에게 답장을 보냈는데, 그 출발점은 사랑이었습니다. 자신이 행할 자유가 있지만 누군가 실족한다면 그걸 하지 않겠다는 것이죠. 그렇게 자기 자유를 절제한 내용이 고린도전서 8장이고, 권리 자체를 포기한 게 9장의 내용이죠. 9장 1-14절까지, 바울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쭉 열거했는데, 그것은 세상 관습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법, 곧 율례와 법도를 통해 주어진 권리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15절에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라고 밝힙니다. 바울은 고린도 시장에서 텐트를 팔면서 자비량으로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모든 수요가 충족이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죠. 고린도후서 11장 9절에서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마게도냐의 사람들에겐 경제적인 도움을 받지만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겐 받지 않았다는 것이죠. 이유는 첫째로 당시 헬라 문명 속에 있는 사제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둘째로 돈을 받고 자기 철학을 설파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울이 그렇게 하면 자기 밥벌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셋째는 고린도교회에 파벌이 있어서 교회에서 경제적인 지원을 받는다면 다른 파벌에게 책잡힐 수 있기 때문이죠. 그만큼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훼손당하지 않도록,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함이었죠.
그래서 16절에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여기에서 ‘부득불’이란 ‘아나케’(ἀνάγκη)인데 ‘반드시’ 혹은 ‘필수적’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반드시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죠?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택한 그릇이라 여겼기 때문이죠. 16절 하반절에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화’란 ‘우하이’(οὐαί)로서 ‘슬픔’ ‘불행’이란 뜻입니다. 잘못 해석하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저주와 화를 내리시는 분으로 오해할 수 있죠. 하지만 그 뜻이 아닙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 자체가 슬픔이자 불행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복음전하는 게 복이죠.
17절입니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여기에서 ‘사명’이란 헬라어 ‘오이코니아’(οἰκονομία)인데 그 뜻은 노예와 같은 개념입니다. ‘자유인’ 혹은 ‘주인’과는 상대 개념입니다. 내가 이 일을 하도록 하신 것은 주님께서 노예로 뽑아주셨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18절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그런데 노예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상’도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상은 상대적이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절대적인 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은 복음 안에서 철저하게 자유를 얻은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그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얻고자 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다소에서 태어난 바울은 헬라파 유대인 곧 해외파 유대인이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전통적안 히브리어를 하고 이스라엘 국경을 넘은 적이 없는 사람들은 히브리파 유대인 곧 국내파 유대인이었습니다. 해외파 유대인인인 바울은 히브리파 유대인을 만나 같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왜죠? 그런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20절 하반절에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국내파 유대인을 강조한 말입니다. 바로 그런 율법주의자들을 복음 안에서 얻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 실례가 사도행전 16장에 나오죠. 바울이 2차 선교 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나죠.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지만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죠. 그 당시 헬라인의 영향력 컸기 때문에 디모데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할례를 행치 않았죠. 그런 디모데에게 바울이 루스드라를 떠날 때 할례를 행케 하죠. 이른바 루스드라에 있는 유대인들이 실족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1절에서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이 율법 없는 자들 곧 아덴 즉 아테네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랬습니다. 22절에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여기에서 ‘약한 자’란 믿음이 약한 자입니다. 이른바 고린도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걸 보고, 우상에게 신적인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연약한 자들이죠. 바울은 그들을 얻고자 그들 앞에서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바울은 여러 사람의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그걸 기회주의자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의 본질에 관해서 확고부동했습니다. 죄의 문제에 대해서 철저했습니다. 지금 이야기는 것들은 복음의 본질이 아닌 형식에 관한 것이죠.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복음으로 얻고자 했다는 거죠. 물론 이것은 사도 바울이 독창적으로 고안해 낸 생각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2장 5-7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그대로 바울이 쫓아 행한 것입니다.
23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내가 복음을 위해 여러 사람의 모양으로 대한 것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24절에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로마제국 시대에 스포츠는 절대적이었습니다. 고린도 북쪽에 파르나소스 산이 있고, 그 산에 델포이 신전이 있고, 그 신전 위에 스타디움이 있었습니다. 2700년 전에 그곳 스타디움에는 7천 석 규모의 돌로된 관중석이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도 참여할 정도였죠. 그런데 고린도에서 경기를 하면 오직 1등만 상을 주었습니다. 24절 하반절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권면하는 것이죠. 다만 그 당시는 상대평가요 하나님은 절대평가죠.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이기기 위해서는 하고 싶은 것 다하고, 보고 싶은 것 다 보고, 바로 그것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기기 위해선 다른 모든 것들을 절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프로는 그만큼 절제하면서 오직 그것만 하는 것이죠. 하지만 아마추어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상으로 야생 감람잎을 엮어 씌워줬습니다. 하지만 그 상급은 다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고자 하는 면류관도 영원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썩어 없어질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얻고자 말입니다.
26절,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사도 바울이 향방 없는 것 같이 하지 않는가? 허공을 치지 않는가? 분명한 목표 때문이죠. 27절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내 몸을 ‘친다’는 ‘휘포피아조우’(ὑπωπιάζω)는 멍이 들 정도로 친다는 뜻이죠. 내가 주님의 노예가 아닌 나를 주인으로 삼을 때 말이죠. 그만큼 바울은 자신에게 엄격하고 단호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왜요? 자신이 버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완성이 아닌 시작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먼 시선 곧 상급을 바라보며 사는 자입니다. 그리고 모든 삶의 동기는 믿음이 약한 자들에 대한 사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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