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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켰습니다. 그만큼 자기 자신을 주님의 노예로 삼은 바울이었죠. 왜 그렇게 자신을 쳐서 복종시켰습니까? 남에게 복음을 전한 뒤 버림받지 않고자 함이었죠. 그때의 버림받음이란 구원에서 버림받음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상급을 말한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13절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선조들이 홍해 바다에서 세례를 받는 큰 은혜를 덧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지 못해, 자유를 남용한 채 가나안의 상급을 받지 못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오늘 본문 14절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 1절부터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결론으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자칫 우상숭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경계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15절에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너희들의 지혜로 판단해 보라는 것이죠. 쉽게 말해 영적인 자립인이 되라는 뜻입니다.
16절에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여기에서 말하는 잔과 떡은 성찬식을 일컫는 것입니다. 성찬식 때 받은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떡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하는 것이죠. ‘참여’란 말은 ‘코이노니아’인데, 성찬식에 참여하는 게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17절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성찬식 때 함께 참여하는 것이 실은 그리스도의 몸에 하나가 되어 참여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성찬식의 견해에는 로마가톨릭의 화체설(化體設) 곧 성찬식 때 신부가 기도할 때 그 떡과 잔이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견해죠. 또한 공재설(共在設 Consubstantiation)이 있습니다. 그 떡과 포도주 안에 예수님의 몸도 같이 있다는 뜻이죠. 상징설 곧 기념설(Symbolic Memorialism)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받아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26:26)하신 말씀도 있지만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하신 말씀이 그것이죠. 주님의 성찬식 때 주님의 뜻을 받들어 기념하라는 것 말이죠. 또 칼빈의 ‘영적임재설’(Spiritual Presence)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하늘에 있지만 성찬식 때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이죠. 어떤 견해든지 간에 성찬식은 그리스도와 연합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18절에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라는 것은 곧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한다는 뜻입니다.
19절에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우상은 단순한 쇠붙이나 나무조각일 뿐이죠. 그렇기에 우상의 제물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20절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우리가 성찬식 때 떡과 잔을 대하는 것은, 그게 공재설이든 기념설이든, 다른 무엇이든,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떡이나 잔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내가 이방 신전에 들어가 그들의 종교 축제에 참예하여 먹는다면 우상과 교제하는 일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21절에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내가 주님과 연합하는 마음으로 성찬식에 참여하면서 어찌 이방 신전의 축제에 참여할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6장 14-15절에 “의와 불법이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를 이루겠느냐.”하고 말한 것도 그것이죠.
그래서 22절에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내가 우상을 섬기는 꼴이라면 그것은 주님을 잡신의 수준으로 끌어 내리는 것이든지, 아니면 우상을 그리스도의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3절,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구원받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고, 무두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내가 덕을 세우고 유익을 도모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24절에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참 믿음은 내가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나보다 믿음이 약한 자를 위해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5-26절,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내가 사러 갔는데, 이방 신전에 제물로 드려진 고기가 나올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것이 신전 제물이든지, 도살장의 제물이든지, 너의 양심을 위해 묻지 말고 그냥 사 먹으라는 것입니다. 왜요? 음식 그 자체는 신성한 것이기 때문이죠.
27절,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믿지 않는 집에 가서, 주인이 말하지 않거든 묻지 말고 그냥 먹으라는 것이죠. 그 식탁에 오른 음식은 모두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28절에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만약 초받은 집에서 그것이 우상 제물이라고 밝힌다면 그 사람을 위해 먹지 말라는 것이죠. 왜요 내가 먹는 것으로 인해 믿음이 연약한 자가 시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9절,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너의 양심이 아니라 우상이라고 말한 그 사람을 위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으나, 육체로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종노릇하라.”하고 말했습니다. 그 자유를 사랑을 위한 종노릇의 도구로 쓰라는 것이죠. 그래서 30절에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옛날 유대인들이나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무슨 음식을 먹든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요. 그 원천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죠.
이제 결론으로 들어갑니다.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먹는 것과 마시는 것, 곧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는 것이죠. 그래서 32절에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을 이렇게 풀어 쓴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면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실족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33절,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고 단 몇 사람이라도 구원할 수 있다면 그 길을 걸어가라는 뜻입니다. 어떻게요? 우리 실력으로는 안 되지만 적어도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나의 유익보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위해 살 때 주께서 구원을 얻는 도구로 우리를 삼아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결론이 11장 1절에 담겨 있습니다. 옛날 서기관들은 성경을 쓸 때는 장절 구분돼 있지 않았죠. 성경의 장을 최초로 나눈 사람도 1228년에 스테판 랑톤이고, 구약성경의 절을 구분한 사람은 1448년 라탄이란 사람, 신약성경의 절을 구분한 사람은 1551년 스테파누스란 사람입니다. 그런데 장 절을 잘못 구분한 게 많았습니다. 오늘 11장 1절도 10장 끝에 붙어야 할 말씀입니다.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얼핏 보면 바울이 굉장히 교만한 사람 같지만, 바울은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님을 전하게 하는 ‘당신의 택한 그릇’이죠.
그만큼 바울은 자기 생에 예수님을 담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담는 그릇으로 보여주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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