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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8장에는 바울이 어떻게 자기 자유를 절제했는지를, 고린도전서 9장은 바울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왜 쓰지 않았는지를 보여줬습니다. 바울이 쓸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쓰지 않은 것은 그 자체를 하나님의 상급을 여겼기 때문이죠. 바로 그런 믿음으로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처럼,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는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다가갔습니다. 바울이 기회주의자로 다가간 게 아니라 믿음의 접촉점을 삼고자 함이었습니다. 단 몇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는 사명을 이루고자 말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산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연장선상에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삶을 등한시하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선조들의 모습에 대해서 말이죠.
10장 1절에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요?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조상들이 바다 가운데 지났다는 것, 곧 홍해를 건넌 걸 말합니다. 그것을 세례로 바울이 해석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세례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연합이라고 밝혔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함께 죽는 것, 곧 죄인 된 나의 옛 삶이 죽는 것, 그리고 무덤을 깨트리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다시 사는 것, 그것이 세례라는 것이죠. 그것처럼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는 애굽으로 갈 수 없고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세례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자기들의 노력이나 공력으로 되는 게 아니죠.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3절에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신령한 음식이란 광야에서 먹은 만나를 말합니다. 만나는 육체의 양식이죠. 그런데 왜 그 만나를 신령한 음식이라고 합니까? 그 만나가 땅에서 나온 게 아니라 하늘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만나를 얻기 위해서는 하늘을 쳐다봐야 하는데, 그것 자체가 은혜라는 것이죠. 더욱이 만나는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졌지만 하나님은 하루 세 끼 분만 주우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불순종한 사람들은 욕심껏 주웠고 다 썩고 말았습니다. 그만큼 만나는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너희들은 내 말을 들어야 살 수 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들 인생은 썩는다’는 것 말입니다. 4절의 ‘신령한 음료’란 광야의 반석에서 나온 생수죠. 바울은 그 반석을 그리스도라고 해석하죠. 예수님께서도 사마리아의 수가 성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신비스런 세례의 은혜와 신령한 떡과 음료를 마신 그들이 과연 신령한 삶을 살았습니까? 5절에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들의 다수’란 ‘플레이온’(πλείων)으로 ‘폴뤼스’(πολύς)의 비교급입니다. 다수란 말은 ‘절대 다수’ 곧 ‘대부분’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신령한 은혜를 받았지만 절대다수가 광야에서 멸망당했다는 뜻입니다. 민수기 14장에 그 이유가 나오죠. 12명의 정탐꾼 가운데 2명을 뺀 10명과 절대다수의 군중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들이 신령한 세례를 받았고, 신령한 음식과 음료를 매일 먹고 마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도무지 믿지 않았던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6절에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아 멸망당한 것,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본보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본보기’란 ‘튀포스’(τύπος)인데 ‘분명하게 새긴 자국’을 의미합니다. 보일 듯 말 듯 한 자국이 아니라 푹 페인 자국이죠.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가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디두모 도마가 없었고, 자신은 자기 손가락으로 주님의 못자국난 자국을 넣어봐야 믿겠다고 하죠. 바로 그 자국이 ‘튀포스’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부활하심의 자국을 지닌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악을 범했습니까? 7절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그들이 우상숭배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황금송아지를 만들고서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하면서 경배했죠. 그 황금송아리를 향해 안식일을 지키자고, 제사를 드리자고 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당시의 우상 신전에 들어가 먹고 마시는, 광란의 축제에 참여한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그래서 8절에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민수기 25장을 보면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을 지나가는데, 그때 여인들과 음행을 벌였고, 그것이 바알 브올이라는 우상숭배로 이어졌죠.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죠. 지금 바울이 왜 그 이야기를 합니까? 고린도교회에 음행이 있었기 때문이죠. 자칫 그것이 신전의 음행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오면 온통 교회는 음행의 소굴이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9절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민수기 21장 4-9절 말씀을 두고 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에돔 땅을 둘러가게 하는데, 길 상태가 좋지 않다면서 원망하죠. 그때 하나님께서 불 뱀을 보내 물려 죽게 합니다. 바로 그 행위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한 것입니다. 왜죠? 하나님께로부터 신령한 은혜를 받고, 신령한 음식과 음료를 마시면서도, 말씀과 무관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그 근저에 깔려 있는 게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시험하는 마음 말이죠. 그래서 바울은 10절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너희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여기에 또 ‘본보기’가 나오는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12절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못 받았다가 아니라 구원을 받은 자로서, 그 삶을 완성해 가는 길 위에 서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성장해야 가야 한다는 뜻이죠.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시험하다’는 ‘페이라조’(πειράζω)는 ‘유혹한다’는 뜻입니다. 그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죠. 시험의 주체가 하나님이면 훈련이 되는 것이고 사단이면 유혹이 되죠.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한 시험은 훈련이고,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것은 유혹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페이라조’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속에 있는 훈련이죠. 훈련을 통과해서 더 강건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피할 길은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 피할 길이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신령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피할 길입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신령한 세례와 신령한 생수를 주셨다면,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가치를 지니고 살 때 그 유혹은 물거품처럼 끝나는 거죠.
중요한 것은 바울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내가 날마다 나를 쳐 복종시키는데,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내가 하나님의 시상에서 제외될까 두려워서 나를 복종시킨다는 것인데,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받긴 받았지만, 그 은혜를 누리기만 했을 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는 불신에 빠져 있다는 것이죠. 은혜를 받았음에도 자신들이 살고 싶은 데로 살 뿐, 방종한 나머지 가나안이라는 하나님의 가장 큰 상급을 놓치고 마는 것 말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정말 이 세상에서 자기를 쳐야 하고, 정말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는 큰 틀을 가질 때에만,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세우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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